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36화 (335/407)

전화위복 (7)

다음 날, 오전 회의가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은 의국에서 동기들과 대화를 나눈 후 책상 앞에 앉았다.

딸칵. 딸칵.

개인 메일을 확인한 순간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왔다!

의무기록실에서 벤 차트 내역과 접속 IP를 보내온 것이다.

최기석은 우선 첨부된 문서부터 확인했다.

[미스터 최. 의무기록실 베이커입니다. 해당내역을 확인하고 나니 저도 좀 당황스럽군요. 이런 케이스는 처음 경험하는 거라서요. 이제야 당신이 환자 차트를 두 번이나 요구한 이유도 알 것 같군요.]

..[오늘 오전 회의 때 의무기록실 부장님께 해당 내용을 전해 드렸습니다. 부장님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우리 쪽에도 보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베이커의 메일을 읽은 최기석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큰 그림이 그려졌다.

그동안 환자를 내팽개치고 본인의 커리어만 얌체같이 챙겼던 벤슨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릴 수 있을 만한 큰 그림이.

최기석은 눈을 빛내며 벤의 차트를 살폈다.

스크롤이 내려갈수록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상황.

벤슨이 벤의 차트를 조작한 것이 맞았다.

벤은 수술 일주일 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바이탈이 불안정했으며 흉통을 호소하여 지속적으로 진통제를 맞았다.

급기야 수술 이틀 전에는 CPR 처치를 받기도 했다.

약물기록지에서 발견한 에피네프린은 바로 이때 사용된 것이었다.

벤의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벤슨은 수술이 어렵지 않다며 수술을 강행했고 그 결과 벤은 목숨을 잃었다.

인재(人災)를 자초한 셈이다.

환자가 죽은 후 벤슨은 의무기록을 조작했다.

간호기록지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내용과 CPR처치를 했던 내용을 빼 버렸고 수술기록지 일부도 수정했다.

의무기록실에서 보낸 차트 수정 IP와 수정 내역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다.

더욱 괘씸한 것.

그것은 차트를 수정했음에도 수정한 내역을 조금도 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다.

“이래서 제니가 당했구나.”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남편이 죽은 후 차트를 떼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제니 손에 들린 차트는 이미 벤슨이 조작한 차트였기에.

그녀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을 맞이했으리라.

어쨌든 현시점에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벤슨이 차트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변경 내용을 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기석은 곧바로 야사다의 집무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야사다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 일인가?”

“간단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표정은 전혀 간단해 보이지 않는 걸?”

야샤다가 피식 웃으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고 최기석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할 이야기 뭐지?”

“벤슨 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벤슨이라…… 그 이름을 들으니 아침부터 정신이 확 깨는군.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헤드 치프와 제게는 좋은 소식이고 벤슨 교수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어쩌면 사형선고가 될지 모릅니다.”

최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크루즈 검진 때 만난 제니와 그의 남편 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야사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졌다.

그는 침음성으로 대답을 대신했으며 설명이 끝나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 일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군.”

“네. 의사가 환자의 차트를 변경, 아니 의도적으로 제 입맛에 맞게 조작했습니다. MHC의 정신인 환자 중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폐동맥 협착증 환자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제대로 걸렸어. 이 자리에서 환자 차트를 확인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최기석은 야사다 책상 앞에 앉아 본인 아이디로 병원 포탈에 접속했다.

이윽고 그가 띄운 차트를 야사다가 유심히 살폈다.

“환자가 이 지경인데 수술을 강행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그 인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군.”

야사다가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최는 여기서 손 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사건은 내가 해결하지. 레지던트인 자네가 섣불리 나섰다가는 병원 쪽에 미운털이 박힐지 몰라.”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이해했어. 그러니 안심해도 돼.”

“알겠습니다. 저는 헤드 치프만 믿겠습니다.”

“그래. 내게도 그 밉상을 혼내 줄 기회를 달라고.”

야사다의 농담으로 집무실 분위기가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벤슨을 싫어하는 것은 최기석뿐이 아니었다.

“헤드 치프,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

“제니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으음…… 일의 진행상황을 봐야겠지만 병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보상안을 제시해야지.”

야사다의 대답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야사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내일 오후 2시쯤에는 시간을 비워 둬. ABD 채널에서 자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거든.”

“저를 왜…….”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난 오히려 늦었다고 보는데? 자네만큼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의사는 많지 않아. 방송국에서도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하지.”

“네. 시간 비워 두겠습니다.”

최기석은 야사다와 대화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왔다.

마치 날개라도 단 듯 가벼운 발걸음.

벤슨 퇴치에 야사다가 힘을 보탠다면 일처리가 한결 수월해진다.

람보 흉내에 병원 징계까지 더해지면 벤슨은 어떤 얼굴을 할까.

그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벌써 마음이 들떴다.

복도를 걷던 최기석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미구엘을 발견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땅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기석을 발견하고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미스터 최, 바빠?”

“아니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커피라도 한잔하자.”

미구엘의 깜짝 제안에 최기석은 그와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바깥 날씨는 화창했다.

아침햇살은 눈부셨으며 한 줄기 바람에 정원의 풀과 나뭇가지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들면서 로비에 역동성이 넘쳤다.

“내가 밉지?”

미구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티칭 펠로우라고 와서는 사사건건 트집만 잡았으니까. 근데 날 미워하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

“나 조만간 MHC 관둘 거니까.”

미구엘이 고백하듯 건넨 말에 최기석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병원을 떠나도록 만든 건, 최기석 자신이었다.

“의외로 담담하네? 놀라 자빠질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미구엘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퇴사를 결정할 때 미스터 최를 많이 원망했어. 너만 없었으면 일이 술술 풀렸을 텐데. 내가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싶었지.”

“…….”

“그런데 어제 저녁,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후배나 다른 레지던트들을 괴롭혔을 때 그 사람들도 지금의 나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야.”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네요.”

“정말 그런가 봐. 당해 봐야 안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어.”

자승자박.

미구엘은 본인이 다른 의사들에게 사용했던 불편한 가시 디버프에 당해 퇴사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자신을 성찰하게 된 모양이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걸 보면 구제불능의 막돼먹은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벤슨급은 아니라고 할까.

“미스터 최. 내가 왜 후임들을 못살게 굴었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사실 난 써전으로서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야. 그런데 노력하고 성장하는 후배들을 보니 점점 초조해지더라고. 내 자리를 위협받는 느낌이 들었어.”

미구엘이 커피를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제자리걸음을 하던 나는 결국 방향을 바꿨지. 내가 잘난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을 깎아내리자. 그러면 내가 돋보일 수도 있다고 말이야.”

“…….”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결론이었어. 남을 깎는다고 내가 올라가는 건 아니었단 말이지. 미스터 최. 내 깨달음이 너무 늦은 걸까?”

“아니요. 언제나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미구엘은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깨달음을 얻은 거예요. 문제는 지금부터 변할 수 있느냐는 거겠죠.”

“지금부터 변한다라……. MHC나 메이죠 계열을 벗어나면 확실히 나아질지 모르겠네. 솔직히 내 분수에 안 맞는 곳이었어.”

미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네. 고마워. 지루한 이야길 들어 줘서.”

“꼬투리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래. 남은 시간이라도 사이좋게 지내자고.”

지이이잉.

훈훈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의 콜폰이 몸을 떨었다.

“잠시만요.”

최기석은 가운에서 콜폰을 꺼내 통화를 연결했다.

“흉부외과 기석 최입니다.”

[선생님. 여기 흉부외과 중환자실인데요. 잠깐 올라와 주실 수 있나요? 빅터 환자에게 문제가 생겨서요.]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최기석은 미구엘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중환자실을 찾았다.

중환자실은 떠들썩했다.

고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장소를 중심으로 간호사들과 보안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현장의 중심에 있던 주인공은 바로 빅터.

얼마 전 일가족 가스 흡입사건에서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다.

“다들 꺼져. 꺼지라고!”

빅터가 손에 든 주사기로 스태프들을 위협했고 스태프들은 그를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나 죽을 거니까 말리지 마.”

“우선 주사기부터 내려놔요.”

“나 혼자 살아남아서 뭐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형이랑 아버지 따라서 나도 갈 거야!”

“빅터.”

최기석은 스태프들과 합류한 후 빅터를 바라보았다.

“진정해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나 빼고 가족이 다 죽었는데?”

“…….”

“날 내버려 두라고. 나만 죽으면 다 끝이란 말이야.”

“대기실에 당신의 조부모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심정은 헤아려 보셨습니까?”

최기석의 말에 빅터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힘들고 괴롭고 슬프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에요. 하늘에 있을 빅터의 가족들도 빅터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떠나는 건 원치 않을 거예요. 제 말 틀렸나요?”

“…….”

“우선 주사기 내려놔요.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 해 봐요.”

최기석은 빅터를 끈질기게 설득하며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빅터의 정신 상태를 알아보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하기 위함이다.

상황을 봐서 페인킬러나 토끼 간호사 등의 스킬이나 아이템을 쓸 수도 있었고 말이다.

이윽고 빅터를 살핀 최기석의 몸이 얼어붙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 걸까.

그에게는 호흡기 관련 질환과 증상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자살충동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과적인 영역 또한 지극히 멀쩡했던 것이다.

그럼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왜 자살 기도를 하는 걸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자식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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