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35화 (334/407)

전화위복 (6)

그날 오후, 일과가 끝난 의국.

최기석은 팀 CPR 동료들과 피자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고난이도의 케이스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중간에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는 그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지 않는가.

고난과 시련은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었다.

‘이만하면 훌륭하지.’

상태창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수술을 끝낸 후 보상으로 보너스 경험치를 얻었다. 단결력 스탯이 1.5 상승한 것이다.

[소속: 팀 CPR]

[팀 레벨: 3/5]

[단결력: 3.5/5]

[처치레벨: 2.5/5]

현재 팀 CPR의 스탯은 팀 세이버 스탯의 초창기에 버금갔다.

레지던트들로만 이루어진 팀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 활약은 눈부셨다.

“아까는 미안했다.”

찰스가 멋쩍은 표정으로 제레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가?”

“좌심실 파열이 발생했을 때 너한테 못할 말을 했어. 감정이 머리까지 솟구쳐서 주체가 안 되더라.”

“괜찮아. 신경 안 써.”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런다고.”

제레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찰스의 얼굴이 단풍처럼 잘 익었다.

[난 이제 수술을 못하겠어요. 누가 나 대신 이 환자를 수술해 주세요. 나중에 그딴 소리하는 의사가 되고 싶은 거야?]

제레미에게 했던 말은 인신모독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었으면 주먹다짐을 했을지 모른다.

“너 흥분하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네 판단이 맞기도 했고.”

“그럼 바다처럼 마음이 넓은 네가 이해해 주는 거지?”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제레미가 담담하게 찰스의 손을 잡으면서 의국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의견 충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잠자코 있던 엠마가 입을 열었다.

“아까 카타리나 교수님하고 이야기했는데. 참관실에서도 이야기가 많았대요.”

“참관실에서도요?”

“카타리나 교수님은 우리를 도와주려 하셨고 헤드 치프는 그걸 말리셨대요.”

“와우. 정말 그랬대요?”

“네. 결국 카타리나 교수님이 헤드 치프의 결정에 따르는 그림이 됐지만.”

“우리 둘이 싸운 건 아무 것도 아니었네. 교수님과 헤드 치프 의견이 갈릴 정도면.”

“사람이 다르면 생각도 다른 법이잖아.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서 환자에게 가장 최선인 길을 택하는 것. 그게 집도의와 스태프의 역할이지.”

“짜식. 갑자기 명언 타임이네.”

찰스가 곁에 앉은 최기석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하여간 다음 케이스는 좀 쉬웠으면 좋겠다. 환자 바이탈 떨어졌을 때 내 심장도 덩달아 내려앉았다니까.”

“저도 동감이에요.”

CPR 팀원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문이 벌컥 열렸다.

미구엘이 팔짱을 낀 채로 팀원들을 훑었다.

“얼씨구. 수술 끝났다고 팔자 좋게 피자나 먹고 있었어?”

“…….”

“너희는 이제 고작 케이스 한 건을 해결했을 뿐이야. 앞으로 볼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고작 이 정도로 들뜨다니……. 너희 꼬락서니를 보니 벌써 미래까지 훤히 보인다.”

미구엘의 지적으로 팀원들의 표정이 팍 상했다.

수술 후 간단한 식사나 티타임을 갖는 건 규칙으로 정해지지 않은 규칙과 같았다.

그런데 그 부분을 꼬집었으니…….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아닙니다.”

“엠마는 당직이니까 빨리 당직 준비하고 찰스와 제레미는 모형 봉합 연습해야지. 먹던 거 빨리 치우고 일들 하자고.”

“잠시만요.”

최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 앞에 섰다.

마치 팀원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된 것처럼.

“왜?”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난 너랑 할 말 없는데?”

“자기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티칭 펠로우의 역할이 아닐 텐데요? 지도 중인 레지던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주는 것도 티칭 펠로우의 역할 아닙니까?”

“…….”

“오늘 이야기, 카타리나 교수님께 말씀드릴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휴게실로 가시죠.”

최기석은 앞장서서 의국을 나왔고 그 뒤를 미구엘이 따랐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미구엘의 불편한 가시 디버프 중첩이 8단계다. 앞으로 2단계만 더 올리면 중첩 효과로 퇴직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참에 이 인간을 쫒아 버리자.

최기석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미구엘은 날파리 같아서 환자와 동료스태프들 사이에서 윙윙거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병원 생활에 도움이라고는 1도 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나한테 불만이 많은가 보다?”

휴게실 소파에 앉은 미구엘이 최기석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불만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뭐라고?”

“티칭 펠로우라고 해서 미구엘이 팀원들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죠? 사사건건 트집 잡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지 않았나요?”

“너 말이 심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다른 스태프들은 아무 말도 안하는데 왜 너만 이렇게 나서니?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미구엘의 반박에 최기석이 코웃음을 쳤다.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 겁니다. 미구엘이 티칭 펠로우니까요. 하지만 저는 동기들하고 달라요.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레지던트 1년 차 찌끄레기 주제에. 개기기는…….”

미구엘이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주변에서 떠받들어 준다고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적당히 설치는 게 좋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그건 그렇고 미구엘, 캘리포니아 브랜치에서 왔다고 했죠? 안 그래도 얼마 전 그쪽 브랜치에 연락해서 미구엘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습니다.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요?”

“…….”

“거기서 완전 개차반이었다고 하던데요. 동료 스태프들에게 밉보이고, 징계를 수차례 먹고, 환자 클레임도 산처럼 쌓였고요. 그 정도면 짤리기 직전 아닌가요?”

“운이 없었을 뿐이야.”

“행실이 엉망이었을 뿐이죠.”

최기석의 지적에 미구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캔 커피를 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띠링!

[불편한 가시 디버프를 1 중첩하였습니다. 현재 중첩수 9/10]

‘좋아. 계속 간다.’

최기석은 미소를 띤 채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더 알아보니 벤슨 교수님이 미구엘을 MHC로 불러왔다고 하군요. 전 거기서 모든 걸 알아차렸죠.”

“…….”

“벤슨 교수님이 미구엘을 불러서 팀 CPR을 망치려는 속셈이라는 걸요. 아마 미구엘은 우리 팀을 망치는 조건으로 수련을 약속받았을 겁니다. 내 말이 틀려요?”

“모…… 몰라. 그런 거.”

“당연히 모른다고 잡아떼시겠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미구엘이 철석같이 믿는 벤슨 교수님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해요. 조만간 제가 아주 기막힌 선물을 드릴 거거든요.”

“…….”

“당신은 이제 끝났어. 최소한 MHC에 당신이 발붙일 자리는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너 이 새끼 와…… 완전 악…… 악마잖아.”

미구엘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질 나쁜 놈들에게 자비는 필요 없어. 본인이 한 행동을 뼈저리게 반성하도록 만들어 줘야지.”

“너……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왜? 없을 것 같아? 최소한 당신보다는 내가 더 힘이 있다고 보는데?”

최기석의 말에 미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이다.

진료부원장 송명진, 흉부외과 헤드치프 야사다 등등.

흉부외과의 핵심 스태프은 전부 최기석을 신뢰하고 있었다.

평판이나 정치 싸움은 물론이요 써전으로서의 능력까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두고 봐. 남은 MHC 생활 아주 즐겁게 만들어 줄게.”

최기석은 미구엘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휴게실을 떠났다.

띠링!

[불편한 가시 디버프를 1중첩하였습니다. 현재 중첩수 10/10]

[중첩수를 모두 만족하여 특수효과 퇴직욕구가 발동하였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사표를 재출합니다.]

* * *

그날 저녁.

벤슨은 집무실에서 내일 있을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밀릴 수는 없지.”

차트를 훑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본래 MHC의 소아흉부외과 파트 환자는 벤슨이 도맡았으며 그의 힘은 자연스럽게 커져 왔다.

그런데 권일수가 온 이후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권일수는 그가 어려워하거나 꺼리는 수술을 척척 해냈다.

“권 교수님.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번에 스크럽 섰는데 손이 완전 빨라요. 보조를 맞추는 게 벅찬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벤슨 교수님보다 친절하신 것 같기도 하던데. 인사도 꼬박꼬박 잘 받아주세요.”

“그러게요. 한국 흉부외과의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아요. 부병원장님도 그렇고 헤드 치프도 그렇고 미스터 최도 그러고요.”

얼마 전 엿들은 소독간호사들의 대화가 떠오른 순간 빠드득 이가 갈렸다.

이대로 MHC 소아파트의 일인자를 내줄 수 없는 일.

그래서 벤슨도 내일 고난도의 소아심장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똑. 똑. 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말하자 미구엘이 나타났다.

그는 풀 죽은 얼굴로 소파에 앉았고 벤슨도 잠시 작업을 멈춘 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교수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저기…… 그게…….”

“옹알이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봐!”

벤슨의 호통에 미구엘이 초초한 듯 이를 부딪쳤다.

“이제 와서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저 교수님이 주신 숙제 못하겠습니다.”

“제정신이야? 이제 와서 왜!”

“미스터 최. 그 여우같은 놈을 더 이상 못 당하겠습니다. 그 녀석만 마주치면 이상하게 페이스가 말려서요. 오늘도 된통 얻어맞고 오는 길입니다.”

“레지던트 킬러가 약한 소리를…….”

“그 녀석은 보통 레지던트가 아닙니다.”

“내 숙제를 못하겠다고 한다면…… 퇴사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건가? 자네가 지금 MHC에 발을 붙이고 있었던 건 다 내가 힘을 썼기 때문이야.”

“알고 있습니다.”

미구엘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MHC에서 나가겠습니다.”

“진심인가?”

“네. 백번 생각했지만 매번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더 버틸 자신이 없어요.”

시무룩한 미구엘을 보며 벤슨이 혀를 찼다.

대체 최기석 그 녀석이 미구엘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대화가 끊긴 후 흐르는 무거운 침묵.

벤슨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퇴직은 한 번만 더 고려해 봐. 말재간이라면 자네를 감당할 사람이 몇 없다고.”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느니 차라리 작은 병원에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미구엘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미스터 최는 저와 교수님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예상했던 것보다 눈치가 빠르더군요. 참고로 교수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미스터 최가 교수님을 향해 이를 갈고 있습니다. 조만간 해코지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나를? 고작 레지던트 주제에?”

벤슨이 코웃음을 쳤다.

“얕잡아 보시다가는 교수님까지 당할지 모릅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흥! 건방진 자식.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군. 그건 그렇고 정말 퇴사 이야기는 재고할 생각이 없는 건가?”

“……네.”

“됐어. 그만 가 봐.”

벤슨의 손짓에 미구엘이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벤슨은 불편한 마음으로 다시 수술 준비에 나섰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최기석이 보복을 준비한다는 미구엘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밟혔다.

그 세상 깜찍한 녀석은 대체 무엇을 준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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