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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32화 (331/407)

전화위복(3)

최기석은 그길로 기숙사에 복귀했다.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복장을 갖추자 온종일 쌓였던 피로가 사르르 녹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트레이닝 룸에서 스승의 신 수술을 연습하고 싶었지만 이를 간신히 억눌렀다.

내일 있을 승모판막 치환술을 생각하면 컨디션 조절은 필수다.

“자, 그럼 어디 확인해 볼까나?”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최기석, EMR에 접속하자 알림창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드디어 의무기록실에서 자료 열람 허가를 내주었다.

제니 남편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그 수술에 연루된 벤슨.

그 속살을 엿볼 기회가 찾아왔다.

딸칵!

눈에서 광채를 뿜어내며 벤의 차트를 훑었다.

제니에게 들었던 대로 벤은 심각한 심방세동과 심장판막 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로 인해 벤슨에게 메이즈 수술을 받았고 말이다.

지금의 벤슨은 소아심장 파트를 전담하지만 과거에는 부정맥 관련 수술도 참여했다고 한다.

최기석이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수술기록지.

수술기록지를 살핀 결과 수술 과정 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수술 중 예기치 못한 폐동맥 출혈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지 못해 환자가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

즉 차트상으로는 벤슨의 과실이 없었다.

제니가 억울해하면서도 벤슨에게 소송을 걸지 못했던 이유를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흐음…….”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간호기록지, 각종 수술결과지 등을 살폈다.

그러던 중 약물기록지에 기록된 약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 삼 일 전에 에피네프린 처방이 있었다.

에피네프린은 기관지 천식, 쇼크와 심정지의 보조치료용으로 쓰이는데, 문제는 벤에게 에피네프린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혹시 CPR이라도 한 건가?’

이상하다 싶어서 여러 차트들을 훑었지만 CPR을 했다는 언급은 없었다.

정말 CPR을 하지 않았던가.

CPR을 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던가.

결론은 두 가지밖에 날 수 없었다.

최기석은 의무기록실에 추가 메일을 보냈다. 의무기록을 수정한 내역이 있는지, 수정했다면 기존의 내용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메일이었다.

‘곧 결판이 나겠지.’

최기석은 노트북을 덮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오전, 의국.

최기석은 동료들과 오후에 있을 승모판막 치환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팀 CPR의 첫 번째 수술인 만큼 열띤 대화가 이어졌다.

“환자 상태는 어때?”

“바이탈은 정상이고 얼마 전에 한 검사 결과와 크게 다른 것도 없어.”

최기석의 질문에 찰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수술 전까지 환자를 케어하는 일은 찰스가 맡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나이 있는 환자들은 수술 전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던데.”

“의술의 신이 오늘 꼭 수술에 성공하라는 계시를 내렸나보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니 꼭 그렇게 만들어야죠.”

엠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하던 최기석은 동료들에게 실례를 구하고 의국을 나왔다.

오전 회의에 들어가기 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었다.

“미란다. 지금 바빠요?”

스테이션을 찾아 업무 중인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요. 한가해서 미칠 지경이에요.”

“잘됐네요. 혹시 일 년 전에 입원했던 벤이라는 환자 기억해요? 벤슨 교수님께 메이즈 수술을 받았던 환자인데.”

“……모르겠는데요?”

미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최기석은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언가가 있다.

동물적인 본능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MHC에 환자가 워낙 많아야 말이죠. 저번 주에 입원한 환자도 기억 못하는 판국인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최기석이 미란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메이즈 수술 공부하느라 관련된 환자 차트를 살피고 있거든요. 도중에 우연히 벤의 차트를 보게 됐는데 말이에요.”

“…….”

“약물기록지에 에피네프린을 사용했다고 나오더라고요.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에피네프린을 사용할 이유가 없는 환자인데. 혹시 CPR이라도 한 거 아닌가요?”

그의 말에 미란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CPR을 했으면 그 사실이 간호기록지에 남아야 하는데 그 기록마저 없다는 거예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이 안 나네요. 게다가 약물 투여 지시는 의사의 몫이잖아요. 저랑은 상관없어요.”

“상관이 있을 수도 있죠.”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만약 미란다가 의도적으로 간호기록지를 수정했다면 말이에요.”

“미스터 최.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간호기록지를 멋대로 수정해야 할 이유도 모른다고요.”

미란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냥 이상한 점이 있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미란다가 아니라면 아니겠죠. 그럼 이만.”

최기석은 유유히 스테이션을 빠져나왔다.

미란다의 미심쩍은 반응으로 충분히 단서를 얻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서가 아니라 증거다. 벤슨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을 수 있는.

소아병동을 찾은 그는 가장 먼저 라훌의 병실로 들어갔다.

라훌은 심실보조장치에 의존한 채 간신히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곁에는 파김치가 된 부모가 안쓰러운 모습으로 잠들었다.

라훌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다시금 제라드가 떠올랐다.

더불어 가슴이 찌릿찌릿하게 아파왔다.

그 말을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타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을까.

이어서 찾은 곳은 소아흉부외과 중환자실.

에어 샤워를 마친 최기석은 처치 도구를 챙겨 쥰 증후군을 앓는 켈리의 격리실로 들어갔다.

끼리리릭.

익숙한 동작으로 견인기 나사를 풀고 흉곽을 좌우로 넓혔다.

그런데 처치를 하던 중 누군가가 격리실로 들어왔다.

“여기는 무슨 일이 십니까?”

“환자 상태가 궁금해서 와본 것뿐이야.”

벤슨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흉곽은 잘 늘어나고 있나?”

“네. 매일 좌우로 1밀리미터씩 갈비뼈를 늘려 주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3주 안에 28밀리미터를 늘릴 수 있을 겁니다.”

“엉터리 수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경과가 좋군.”

“수술이라고 해서 꼭 메스를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충돌했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군. 하지만 경과라는 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법이야.”

“그 말은 꼭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하고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뭐…… 뭐라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벤슨 교수님처럼 훌륭한 분이 그렇게 막돼먹은 생각을 했을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또 그 잘난 입을 나불거리는구나.”

최기석은 대답없이 벤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처치를 마무리 지었다.

“괜찮으면 휴게실에서 잠깐 이야기라도 하시겠습니까?”

“내가 미쳤다고?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지.”

벤슨이 격리실을 떠난 후 최기석은 처치 도구를 챙겨 스테이션을 찾았다.

“선생님. 격리실에 있는 켈리 환자 말인데요.”

“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간호사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저 이외에 다른 의사는 격리실에 못 들어가게 해 주세요.”

“왜요?”

“그냥 지시 사항으로 남겨 주세요. 누가 뭐래도 켈리의 주치의는 저니까요.”

“알겠어요. 미스터 최가 정 그렇다면.”

“고맙습니다.”

최기석은 후련한 마음으로 소아흉부외과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다른 환자와 달리 켈리는 장기적인 흉곽 확장이 필요했다.

다만 그 기간 동안 벤슨이나 그 휘하에 있는 의사들이 켈리에게 장난을 칠 위험이 다분했다.

방금 벤슨이 격리실로 들어왔던 것도 음흉한 계략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았고 말이다.

흉곽확장술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경계하는 편이 좋았다.

최기석이 세 번째로 찾은 곳은 흉부외과 중환자실.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빅터에게 머물렀다.

빅터.

이틀 전 있었던 일가족 가스흡입 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다.

의식불명 상태로 에크모에 의존하던 그에게서 바로 어제 에크모를 제거했다.

예상 외로 상태 호전이 빨랐던 탓이다.

“으으으윽.”

빅터의 입에서 가녀린 신음이 터졌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힘겹게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 네.”

빅터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최기석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아시겠어요?”

“벼…… 병원 같군요. 아흑.”

머리를 감싸 쥐는 빅터를 보고 최기석은 페인킬러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빅터의 얼굴에 한결 생기가 감돌았다.

최기석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빅터의 GCS(Glasgow Coma Scale, 의식장애평가)를 살폈다.

방금 깨어난 것치고 그의 의식은 상당히 또렷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왜 병원에 있는 겁니까?”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때가 되면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뉘앙스가 묘한데요? 혹시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죠? 그렇죠?”

“…….”

“선생님. 빨리 말해 주세요.”

빅터의 다그침에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결심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아야 하는 일이니 지금 이야기하죠. 그게…….”

최기석은 그가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했고 이를 듣는 빅터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붉으락푸르락했졌다.

“마…… 말도 안 돼. 거짓말이죠?”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건 분명 꿈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어요. 하하하. 이것 참 고약한 악몽이네.”

빅터는 자신의 팔을 꼬집으며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혼자 있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호출하세요.”

최기석은 빅터를 뒤로하고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절망하는 그의 모습이 아른거리면서 돌덩이가 가슴에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위로마저 할 수 없는 환자를 만났을 때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본인의 무력함이 뼛속 깊숙한 곳까지 찔러 왔다.

* * *

그날 오후, F 로젯 참관실.

송명진과 야사다, 권일수, 카타리나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잠시 후 펼쳐질 팀 CPR의 수술을 살피기 위함이다.

“오늘 집도의는 누굽니까?”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미스터 최입니다.”

송명진의 말에 카타리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환자 상태는요?”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카타리나의 브리핑이 끝나자 자리에 앉은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음성을 흘렸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수술은 간단해 보이지 않는군. 갓 흉부외과에 들어온 레지던트에게 너무 어려운 케이스를 준 건 아닌가?”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네 사람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깊군. 근거는 있는 건가?”

“제 눈입니다.”

야사다의 질문에 카타리나가 똑 부러진 답변을 내놓았다.

대화가 끝나고 찾아온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권일수다.

“관객들이 굳이 수술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 있나요?”

권일수가 미소를 띤 채 검지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마침 주인공들이 입장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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