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30화 (329/407)

전화위복 (1)

최기석은 차를 몰며 뉴욕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MHC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건 무척 낯선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물원을 처음 찾는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가 신호에 멈춘 동안 반대편 도로를 응시했다.

출근길이 북적거리는 건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어 다시 출발한 후 최기석은 아침에 검색한 올리버의 정보를 떠올렸다.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진 여의사.]

[올리버, 세계 최초의 흉부외과 트리플 보드 달성!]

[가든 유니버시티 대학병원 세계 최초로 심장 폐 동시 이식 성공.]

보통 써전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의사가 메스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트리플 보드의 주인공인 올리버는 여자였다.

그것도 모든 사진에서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동네에서 한 번은 마주쳤을 법한 인상의 여인이 그런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니…….

외모로 사람의 전부를 판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새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지.’

최기석은 올리버를 생각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외과 계열의 여의사는 많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콜을 받는 데다가 응급환자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은 물론이요, 수술실에 들어가면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한다.

그 육체적인 피로는 중노동에 가깝다.

이 때문에 외과 계통의 여의사 수는 남성에 비해 한참 못 미쳤다.

분명 올리버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최기석의 확신은 점점 단단해졌다.

이윽고 고속도로로 접어든 자동차.

최기석은 규정 속도를 지키며 도로 위를 달려갔다.

반쯤 열어 둔 창틈 사이로 흘러든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저절로 어깨춤이 나왔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기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의사가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

“약속은 지켜야겠지?”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음악 재생 리스트에 신곡을 띄웠다.

[꿈인가? 아닌가? 몽롱한 느낌이야. 그대가 날 좋아한대. 어떡해. 정말인가 봐~

뚜벅뚜벅. 조명 아래 우리 둘.

방긋방긋. 내 입가엔 미소 가득.

사뿐사뿐. 발걸음을 맞춰 봐.

정말인가 봐. 애인이 된 건가 봐.]

이영호가 추천한 러블리 걸즈의 음악을 재생한 최기석.

이윽고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걸그룹, 아니 여자에게조차 관심 없던 이영호를 푹 빠지게 만든 러블리 걸즈의 매력은 무엇일까.

노래를 감상하던 최기석은 이제야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최기석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다가 고속도로 휴게소로 진입했다.

시간은 흘러 벌써 오후 1시가 되었다.

아침도 안 먹고 나온 탓에 배 속의 거지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차에서 내려 패스트푸드점을 향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한 가족이 그를 보며 연신 ‘오 마이 갓’을 외쳤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연예인이라도 왔나?’

최기석은 가족들의 반응이 신기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의 뒤에 특별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 혹시?

“저기요. 혹시 닥터 최 아닙니까?”

가족 중 한 여성이 그와 거리를 좁혔다.

“저…… 저를 아시나요?”

“당연하죠. MHC에 근무하는 흉부외과 레지던트 기석 최잖아요.”

여자의 말에 최기석은 허허 웃고 말았다.

연예인도 아닌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저는 닥터 최의 팬이에요. 캐롤대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는데 우연히 닥터 최에 관련된 기사를 보고 완전히 빠졌다니까요. 샴쌍둥이 수술도 라이브로 시청했고 얼마 전 뉴튜브에 뜬 코드블랙 영상도 봤어요.”

“…….”

“닥터 최를 여기서 볼 줄이야. 정말 영광이에요.”

“너무 띄워 주시니까 어찌할 줄 모르겠네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소 당황하던 최기석은 여성과 그 자리에서 통성명을 나누었다.

여성의 이름은 데이지.

남편과 아들이랑 가족여행을 떠나는 중이라고 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사…… 사인이요? 저 그런 거 없는데…….”

“와우! 그럼 더 잘됐네요. 닥터 최의 첫 사인을 받는 사람이 저라는 소리잖아요.”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보며 최기석은 난감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다.

“여기요.”

최기석은 데이지가 내민 수첩을 받아 자신의 이니셜을 휘갈겼다.

동양화풍의 현학적인 느낌이 드는 멋들어진 사인은…… 개뿔.

아이 낙서 같은 사인이 완성되었다.

데이지도 그의 사인이 탐탁지 않다는 듯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닥터 최. 정말 이게 사인 맞아요?”

“흠흠.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기석은 환자에게 할 법한 이야기를 하며 데이지의 시선을 피했다.

“뭐. 닥터 최의 사인을 최초로 받은 거에 의의를 둬야겠네요. 대신 나중에 사인 바꾸면 안 돼요. 아셨죠?”

“아,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진도 찍어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데이지의 남편 조니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이번 가족여행이 더 즐거워진 것 같아요.”

“데이지가 기쁘다니 저도 좋네요. 그런데 칼론은 다친 건가요?

최기석의 시선이 칼론에게 닿았다.

칼론은 데이지의 여덟 살 난 아들로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찧었어요. 응급실에서 몇 바늘 꿰맸는데 진짜 속 터져 죽는 줄 알았죠.”

“우리 칼론, 앞으로는 몸조심할 거지?”

“네.”

조니의 말에 칼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석은 호기심에 칼론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써 보고 혀를 찼다.

칼론에게 특수한 칭호가 있었다.

[Misfortune, 불운 사냥꾼]

- 불운은 항상 네 곁에 있지. 언제나.

- 뜻하지 않은 사고로 외상을 입을 확률이 50퍼센트 증가하며 높은 확률로 외상이 중첩됩니다. 단 외상을 이겨낼 경우 해당 외상에 대한 저항력이 두 배 상승합니다.

칼론의 칭호는 환타 칭호와 맞먹을 정도로 끔찍했다.

설명대로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수준 아닌가.

자세히 보니 칼론의 몸에는 자잘한 생채기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가 닥터 최를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정말 고마워요.”

작별 인사를 나눈 최기석은 데이지 가족과 헤어져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꾸역꾸역 먹고 있자니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갔다.

식사를 마친 그는 느긋하게 휴게소를 둘러보았다.

미국의 휴게소라고 해서 한국의 휴게소와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식당에서 흐르는 달콤한 음식 냄새, 시끄러운 음악 등등.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런데 최기석이 차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저기 먼 곳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발걸음이 저절로 현장에 향했다.

한 음식점 안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는데 인파를 헤치고 나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데이지 가족이었다.

조니와 데이지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고 그런 부부의 발밑에 칼론이 쓰러져 있었다.

“데이지. 어떻게 된 겁니까!”

“닥터 최!”

데이지가 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칼론이 사탕을 먹었는데 사탕이 목에 걸렸어요. 그러다가…….”

“그 정도면 됐습니다.”

최기석은 몸을 낮춰 칼론의 상태를 살폈다.

칼론은 숨이 막히는지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더불어 턱이 돌아갔으며 입가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렀다.

‘그런 건가?’

최기석은 테이블 모서리에 묻은 피를 확인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사탕이 기도에 막히면서 몸부림치다가 치아를 테이블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불운할 수가…….

칼론을 일으켜 세운 최기석은 아이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칼론의 배꼽과 명치 사이에 주먹 쥔 손을 올려놓고 다른 손을 그 위로 얹었다.

퍽! 퍽! 퍽!

팔에 힘을 주며 칼론의 배를 안쪽으로 밀어 올렸다.

처치를 할 때마다 짚단처럼 들썩거리는 칼론.

“쿠에에에엑!”

괴상한 신음과 함께 그의 입에서 사탕 조각이 튀어나왔다.

가장 시급한 기도 폐쇄를 해결한 셈이다.

호흡이 돌아오자 칼론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닥터 최. 우…… 우리 칼론 치아가 빠졌는데.”

“잠시만요. 손대면 안 됩니다.”

최기석은 조니가 나서는 것을 저지했다.

손상된 치아를 함부로 만지면, 특히 뿌리 부분을 만지면 치아가 오염될 수 있었다.

“데이지.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다 주세요. 혹시 소독용품이 있으면 그것도 챙겨 주시고요.”

“네!”

“칼론. 선생님이 있으니까 안심해. 알았지?”

최기석은 칼론을 안정시키며 스킬을 사용했다.

[페인킬러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의 육체적 통증을 70퍼센트 감소시킵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닌 단순 통증 경감이기에 증상을 가릴 수 있습니다. 지속효과는 일주일입니다.]

“어때? 지금은 좀 괜찮지?”

그의 말에 칼론이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처치는 턱 관절 되돌리기.

최기석은 칼론의 턱을 부드럽게 감싼 후 손으로 턱을 회전시켰다.

뚜두두둑.

관절음과 함께 칼론의 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닥터 최! 다 챙겨 왔어요.”

데이지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든 최기석은 우선 빠진 치아를 우유 속에 담갔다.

생리식염수를 사용하는 게 더 좋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칼론 입을 살짝 벌려 봐.”

턱이 제자리로 돌아와서인지 칼론이 어렵지 않게 입을 벌렸다.

칼론의 윗니 하나가 통째로 빠졌다.

이가 빠진 부분의 잇몸이 부풀어 오른 채 피를 토해 내고 있었으며 그 옆의 치아는 반쯤 깨져 있었다.

최기석은 거즈로 출혈 부위를 압박하며 누워 있는 칼론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할 수 있는 처치는 여기까지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것도 흉부외과의인 그가 가능한 처치는 많지 않았다.

“데이지, 칼론을 데리고 당장 병원으로 이동하세요. 30분 정도 달리면 인터체인지가 나옵니다.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을 찾아요.”

“네. 지금 출발할게요.”

“아이가 걱정되는 건 이해하지만 과속하면 안 됩니다. 분명 한 시간 안에 치료받을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치아 회복률은 100퍼센트에 가까워요.”

최기석은 세 명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자신을 만난 것이 데이지 가족에게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불행이었을까.

아직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그는 곧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올리버의 자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근처에 차를 세운 최기석은 심호흡을 하고 그녀의 집 앞에 섰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 최초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의 집에 도착했다.

과연 그녀에게서 어떤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최기석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초인종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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