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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28화 (327/407)

숨 가쁜 일정 (5)

그날 저녁.

최기석은 휴게실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막 수술을 함께했던 스태프들과 야식으로 피자를 시켜 먹었다.

다른 때와 달리 과식해서 그럴까.

배가 더부룩하고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응급환자가 얼마나 더 올지 모르는데…… 이 정도는 먹어 둬야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당직 첫 환자에게 식도 절개술을 펼쳤다. 긴 밤 동안 그보다 더 위급한 환자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환타 칭호의 악랄함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드르르륵.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휴게실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보니 레온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스터 최도 당직이에요?”

“네. 식도 절개술 끝내고 잠깐 숨 좀 돌리고 있었어요. 레온도 당직이죠?”

최기석의 물음에 레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레온. 혹시 걱정거리 있어요?”

“왜요? 그래 보여요?”

“레온의 트레이드 마크가 안 보여서요.”

레온은 평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덕분에 메이죠 신경외과에 있었을 때는 부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그게…….”

레온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몇 시간 전에 소아 응급환자를 받았는데 상황이 좋지 않네요.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인데 부모는 멀쩡하고 뒷좌석에 있는 아이만 뇌를 크게 다쳤어요.”

“…….”

“수술은 마쳤는데 경과가 썩 좋지 않네요. 어쩌면 뇌사판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레온의 목소리에 고통스러움이 묻어났다.

의사의 기분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칠 할이 환자다.

문득 의진대 시절에 들었던 말이 최기석의 머리를 스쳤다.

“어린 나이에 뇌사라니…… 부모님 마음이 찢어지겠네요.”

“아마 본인이 아픈 거에 몇 십 배는 되겠죠.”

짧은 대화가 끝나고 다시 찾아온 침묵.

최기석은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위로조차 받고 싶지 않은, 잠잠하게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파고들고 싶은 때가.

최기석은 레온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후 가볍게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대로 휴게실을 나왔다.

‘하아…… 지금은 도저히 말을 못 하겠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레온이 환자 이야기를 털어놓은 순간 곧바로 라훌이 떠올랐다. 만약 환자가 뇌사판정을 받는다면 라훌에게 심장이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차마 레온에게 할 수는 없었다.

설령 환자가 뇌사판정을 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실의에 빠져 있을 부모에게 찾아가 장기이식을 부탁한다는 것, 그것 자체도 무척 힘겨운 일이었다.

최기석은 무거운 마음을 떨쳐 내고 의국에 복귀해 스승의 신수술에 대해 고민했다.

스승의 원래 수술법과 샬롯의 개량 수술법.

두 가지를 전부 만족시킬 만한 제3의 길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마치 저 하늘의 구름처럼.

똑똑똑.

생각이 깊어지던 중 누군가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바로 찰스다.

“안 자?”

“내가 잘 시간이 어디 있어? 난 너랑 달리 모형 봉합연습까지 해야 한다고.”

찰스가 피식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는 길에 마크 만났다. 아까 식도 절개술 했다면서?”

“홍합이 식도에 걸린 환자가 있었거든. 덕분에 진땀 좀 뺐지.”

“부럽다. 나도 너처럼 식도 절개술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말이라도 고맙다.”

찰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 MHC에 온 이후로 제자리걸음만 하는 건 아닌가 싶고. 열심히 연습해도 봉합 실력은 그대로인데다가 환자 보는 것도 점점 벅차고.”

“넌 잘하고 있어. 내가 보증할게. 아, 물론 보증을 서겠다는 뜻은 아닌 거 알지?”

“……너 농담이 부쩍 늘었다?”

“후후후. 곧 유머러스한 의사의 시대가 올 것 같아서 말이야. 그쪽으로도 신경 쓰고 있지.”

[깔깔깔, 호호호]

- 짜릿해. 늘 재미있어. 즐거운 게 최고야.

- 유머감각이 대폭 상승하여 대화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단 30퍼센트의 확률로 썰렁 개그가 발동되어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 수 있습니다.

최기석은 새로 얻은 칭호를 확인하고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무거운 분위기는 적당히 걷어 내는 편이 좋다.

그래야 서로 부담이 없다.

다행히 이번 유머는 적재적소에 터졌다.

“원래 의사 생활 하다 보면 자신에게 회의가 드는 때가 있잖아. 지금이 그런 시기 아닐까?”

“…….”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너처럼 답답할 때가 많았어. 예전에는 폐동맥 협착증 수술로 벤슨 교수님과 다퉜을 때 그랬고, 지금은 신수술의 해법이 보이지 않아서 벼랑 끝에 선 기분도 들고.”

“우와. 상상도 못했는걸? 난 네가 철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깜빡였다.

“넌 언제나 앞장서서 모든 일을 해결해 왔잖아. 나 같은 고민은 없을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겠어? 나도 사람인데. 다만 마음씨 따뜻하고 배려 깊은 애인과 멋진 동료들이 있으니까 이겨 내는 것뿐이야.”

“흠흠. 지금 나보고 연애하라는 뜻?”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 병원에 있는 스태프들 모두 느끼고 있을 거야. 심지어 헤드 치프나 송 진료부원장님까지도.”

“…….”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네 감정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야. 그저 이 순간을 슬기롭게 넘기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고맙다.”

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는데 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기왕이면 아주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성실하고 솜씨 좋고 눈치 좋은 레지던트라고 할까?”

찰스의 성향은 환자 중심이며, MHC에 들어올 만큼 처치능력 또한 탄탄했다.

더불어 정치력은 최기석과 어깨를 견줄 만했다.

아직 그 정치력을 드러낼 만한 사건이 생기지 않았을 뿐.

“그 정도면 나쁘진 않네. 그런데 내가 정치인이 되면 어떨 것 같아?”

“정치인?”

뜻밖의 단어에 최기석이 몸을 들썩거렸다.

“내가 의사가 된 건 미국의 거지 같은 의료체계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싶어서야. 시스템을 건드릴 수 있는 자리에 오르면 내 뜻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서.”

“…….”

“그런데 의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한계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더라.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생각한 게 정치인이라…….”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찰스의 목적을 생각하면 정치인이 되겠다는 판단은 옳았다.

아무래도 의사가 의료체계를 건드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통 의사가 상대하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환자였기에.

“지금 와서 진로를 트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바로 그게 걸림돌이야. 그것 때문에 요즘 머리가 쑤셔서 죽겠어.”

“내 생각인데…… 앞으로 한 십 년 이상은 의료 쪽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유는?”

“네가 존 카슨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존 카슨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의사인데 지금은 드럼프 정부에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뭐. 개인적으로 존 카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배울 필요가 있겠지.”

“그렇겠지?”

찰스가 공감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네가 의사로 명성을 날리면서 기존 의료체계에 의문을 던진다면 언젠가 정치계의 콜이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정치계로 뛰어드는 건 부담이 커.”

“나도 그 생각은 해 봤는데. 그때까지 내 성질머리를 못 견딜 것 같아서 말이지. 의료와 관련된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펄펄 끓는다고.”

“으음…… 참는다는 생각보다는 내실을 다진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 봐.”

“휴우……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너랑 이야기를 하니까 좀 차분해졌어.”

“도움이 됐다니 오히려 내가 고맙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훈훈한 분위기를 질투하듯 책상에 놓인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 댔다.

“흉부외과 기석 최입니다.”

[선생님. 여기 응급실입니다. 응급환자가 있는데 바로 내려와 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인턴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슨 환자죠?”

[환자가 총 세 명입니다. 바비큐용 연탄을 피워 놓고 가족이 자살기도를 한 모양이에요. 세 사람 다 위독한 상황입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이 통화를 끊자 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자. 도와줄게.”

“땡큐.”

두 사람은 가운을 휘날리며 응급실로 내려갔다.

보호자가 없는지 911 대원들이 원무과에서 환자를 접수하고 있었으며 인턴들은 환자들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최기석은 하마터면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가스 흡입환자 세 명에게 전부 D.O.A가 떠올랐다.

D.O.A(Dead on arrival).

즉 환자가 죽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선생님. 세 사람 전부 호흡과 심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인턴이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우선 에피네프린 IV로 투여하고 N/S 달아줘. 그다음 기관삽관하고 고농도 산소 투여하고. CPR은 나와 찰스, 그리고 응급의학과 당직의 선생님이 환자를 한 명씩 맡아서 진행할 거야. 옆에 두 명씩 보조 붙어 주고.”

최기석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위급한 환자가 있더라도 의사가 당황하면 끝이다.

의사가 감정을 내비쳐도 좋은 건 처치가 끝난 후다.

[반드시 살린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각성 CPR 버프를 동료에게 적용합니다.]

[반드시 살린다 MAX]

- 응급환자, 난이도가 높은 환자를 처치하는 경우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각성 CPR, 각성 T.A 환자 처치, 각성 산과처치 등의 특수모드를 동료에게 걸어줄 수 있습니다. 버프 지속시간은 두 시간입니다.

- 특수효과 매서운 칼날: 모든 처치 정확도와 속도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처치로 환자를 회복시킬 경우 환자의 회복속도가 세 배 상승합니다. 매서운 칼날의 지속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스킬을 사용한 최기석이 남자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왼쪽 팔에 3도 화상을 입었으며 가스 흡입으로 인해 폐수종을 앓고 있었다.

호흡곤란으로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손과 발끝에 부종이 관찰되었다.

최기석은 황급하게 기관삽관 후 고농도 산소를 투여했다.

제세동기를 준비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자 찰스와 응급의학과 당직의도 같은 처치를 하고 있었다.

버프를 건 보람이 있다고 할까.

“선생님. 제세동기 준비 끝났습니다.”

인턴의 보고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세동기의 한쪽 패들에 젤을 바른 후 다른 한쪽의 패들에 비벼 묻혔다.

“다들 물러나. 200J!”

충전량을 200J로 맞추고 충전버튼을 누르자 램프에 불이 들어오고 삐삐 하는 전자음이 울렸다.

“Charge!”

“Clear!”

쿵!

전류가 흐르며 환자의 몸이 펄떡 뛰었다.

그럼에도 요지부동인 환자 감시 장치, D.O.A 환자는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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