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26화 (325/407)

숨 가쁜 일정 (3)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처음으로 맘에 드는 소리를 하는 군. 안 그래도 동양인 람보는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권일수와 벤슨은 의외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기석의 제안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엿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MHC 교수가 오전 회의에서 람보 흉내를 낸다고 치자.

그것은 평생의 이불킥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없으니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두 분이 허락하셨다니 경과의 호전 범위를 정해 보겠습니다. 현재 환자 흉골의 가로 너비는 10밀리미터입니다. 앞으로 삼 주 후에 이것이 28밀리미터까지 성장한다면 증상이 호전된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만…… 두 분 다 동의하십니까?”

“그만하면 충분하지.”

“지금 상태에서 10밀리미터만 늘어나도 기적이야.”

두 사람이 다른 목소리를 냈지만 결론은 최기석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비쳤다.

“모처럼 재미있는 이벤트가 생겼군.”

잠자코 있던 야사다가 대화에 껴들었다.

“이번 사건에 공증은 내가 서지. 결과에 따르지 않으면 양쪽 다 재미없을 줄 알아.”

“좋습니다.”

“헤드 치프께서 나서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죠.”

이로써 권일수의 벤슨의 기 싸움이 종료됐다.

할 말을 마친 다한 벤슨이 자리를 떠나자 곧이어 권일수도 집무실을 나갔다. 감정이 상한 채 야사다와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재가 기막히던걸?”

야사다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사실 저는 중재를 한 게 아니라 벤슨 교수를 골탕 먹일 생각이었습니다.”

“작전?”

“폐동맥판막 협착증 케이스가 아직 앙금으로 남았거든요.”

“그 말인즉…… 닥터 권의 수술을 백 퍼센트 믿는다는 뜻이군.”

“네. 익숙하지 않은 수술법이라고 해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늘이 두 쪽 나도 람보 흉내를 내는 건 벤슨 교수가 될 겁니다.”

최기석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수술 후 켈리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해 봤다.

물론 경과는 양호.

견인기 삽입이 수술의 목적에 잘 부합했다는 증거다.

앞으로 차분하게 흉골을 확장시키면 금방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EOB 평가가 끝났다는 소식은 들었나?”

“네. 권 교수에게 들었습니다.”

“MHC가 1위를 했다니……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자겠어.”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뿐만 아니야. 다들 고생이 많았지. 그런데 메이죠 흉부외과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부분은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 메이죠 흉부외과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내가 나를 이겼다고.”

“내가 나를 이겼다?”

야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죠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독립한 게 MHC니까요. 따지고 보면 내가 나를 이긴 셈이죠.”

“재미있는 말이군.”

“한국 유명 개그맨이 했던 말인데 마침 상황이 맞아떨어졌습니다.”

“EOB 평가에 개인 CS 부분이 신설됐어. 병원별로 최고의 직원을 뽑는데 거기에 미스터 최가 뽑혔어.”

“제…… 제가요?”

최기석은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최고의 직원이라니…… 너무 과분한 타이틀 아닙니까?”

“깐깐하기로 유명한 미국 흉부외과 협회야. 이유 없이 상을 줄 리 없겠지. 다음 주에 시상이 있다고 하니 가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헤드 치프.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뭐지?”

“예전에 세계 최초로 흉부외과 트리플 보드를 달성한…… 그 올리버라는 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안 될 이유가 없지. 문자로 보내 주지.”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야사다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집무실을 나왔다.

* * *

다음 날, 일과가 끝날 무렵.

최기석은 동료들과 의국에 모여서 다음 주로 성큼 찾아온 팀 집도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로지 팀 CPR 인원으로만 구성된 승모판막 치환술.

그 무게감에 동료들은 각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수술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우리가 이야기한 대로만 진행되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찰스가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고 엠마를 그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거예요. 돌발 상황에 대한 준비도 거의 끝난 상태고. 혹시 다른 팀 소식은 들었어요?”

“삼십 분 전에 팀 하트비트에서 수술을 끝냈대요. 우리랑 같은 승모판막 치환술 환자였는데 별문제 없나 봐요. 우연히 그쪽 동기를 마주쳤는데 얼마나 콧대를 세우던지…….”

“같은 수술이라도 난이도는 우리가 훨씬 높지 않나?”

제레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팀 하트비트 쪽 환자를 보니까 협착도 그렇게 심하지 않던데? 다른 질병이 겹친 것도 아니고.”

“벤슨 교수님이 어려운 환자를 넘겼을 리 없지.”

“그래도 기왕 맞을 매라면 뼈아프게 맞는 게 좋아. 그러면 앞으로 웬만한 수술은 문제없을 테니까.”

잠자코 있던 최기석이 대화에 껴들었다.

“그것도 그것대로 맞는 말이지. 뭐. 우리 쪽에는 지상 최강의 레지던트가 있으니 큰 걱정도 안 되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야?”

“한 절반 정도?”

찰스가 피식 웃었다.

“찰스, 다라프레이트 소식 들었어요? 튜터가 에이즈 치료제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기로 했다는데.”

“들었어요. 그 인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뭐. 쓰레기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참고로 엿 먹어야 될 제약회사들은 아직 넘치고 넘쳐나요.”

“제약회사 문제는 누가 어떻게 손댈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참.”

엠마가 덩달아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과가 끝났다.

동기들이 떠난 의국에는 오로지 최기석만 남았다.

최기석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의무기록실에 신청한 차트 열람은 아직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벤슨의 뒤를 터는 일이 밀리고 말았다.

‘조만간 결판이 나겠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었다.

제니 남편 벤읜 석연치 않은 죽음,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밝힌다면.

조만간 오전 회의에서 람보 쇼가 진행된다면.

벤슨은 아마 제 발로 MHC에서 나가고 싶어질 것이다.

제이미의 수술을 연기한 대가를 두 배로 받는 셈이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떠돌던 그의 뇌세포들이 이윽고 한 자리에 집중되었다.

그 장소는 바로 스승의 신수술이다.

확장성 심근병증과 심부전증에 대한 부분 이식술.

스승의 수술법은 더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지만 난이도가 높고 수술 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샬롯의 수술법은 난이도를 낮추고 수술시간 또한 대폭 줄어들지만 수술 범위가 좁다는 단점이 있다.

두 가지를 보완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최기석은 더 좋은 방안을 찾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기존에는 수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스승의 방법을 완성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 본인 스스로 최상의 수술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타다다다닥.

최기석은 심부전증과 심근병증에 대한 논문들을 조사해 나갔다. 다다익선이라고 의료적인 지식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좋은 법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운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설화야! 안 그래도 네 생각하고 있었는데. 완전 대박이다.”

[칫! 뻥치지 마. 아닌 거 다 알거든?]

“네가 몰라서 그래. 요즘도 잠만 잤다 하면 너랑 데이트하는 꿈을 꾼단 말이야.”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정설화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은 어때? 아직도 바쁘지?]

“조금 힘들지만 버틸 만해. 배우는 것도 많고. 아 참. 내가 권 교수님 MHC에 왔다는 이야기 했나?”

[혹시 권일수 교수님? 예전에 노우드 팀에 계셨던 분 맞지?]

“맞아. 송 교수님이 삼고초려 끝에 데려오셨어.”

[어머. 잘됐다. 권 교수님은 소아심장 파트에 권위자잖아. 안 그래도 소식이 뜸해서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었는데.]

“안 그래도 오늘 쥰 증후군 수술도 같이했어.”

[고생 많았겠다. 그거 보통 수술 아니잖아.]

정설화의 따뜻한 걱정이 서려있는 말에 최기석은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자를 위한 마음으로,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겠다는 각오로 전생부터 지금까지 달려왔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숱한 환자와 질병, 보호자, 다른 스태프들과 충돌하며 안간힘을 써왔다.

그 힘겨운 여정을 보듬어 감싸 준 것은 언제나 정설화였다.

그녀의 사랑과 배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진작 쓰러지지 않았을까.

최기석은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했다.

[내가 그쪽으로 뿅 하고 날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네가 조금 힘낼 수 있을 텐데.]

“마음은 고맙지만 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해. 당장 팔 굽혀 펴기를 백만 스물한 개는 할 수 있다고.”

[바보. 오버하지 마.]

“보고 싶어, 자기야.”

[나두. 조만간 여름휴가 있는데 내가 뉴욕으로 넘어갈게.]

“기대해도 좋아. 뉴욕은 미네소타랑 비교할 수는 없는 곳이거든. 데이트할 거리가 넘쳐 나지.”

[응. 빨리 가고 싶다.]

최기석은 정설화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특별한 화제가 없어도 좋았다.

저녁 식사 메뉴가 뭐였는지, 오늘은 어떤 환자를 만났는지,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등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일상의 대부분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구태여 특별한 이야기 거리를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야말로 서로의 동질감을 다지는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그런데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의국 전화기가 야속하게 울어 댔다.

[콜 왔구나.]

“하여간 이놈의 응급실은 눈치도 없다니까.”

[괜찮아.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통화했는걸. 환자 잘 봐주고.]

“이따가 여유 있을 때 연락할게.”

[응. 사랑해.]

정설화의 수줍은 고백에 귓가가 간지러워졌다.

더불어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슴.

그녀에 대한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앞으로도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나도 사랑해.”

통화를 끊은 최기석이 전화기를 들었다.

[선생님. 응급실인데요. 환자가 가슴이 답답하고 체한 것 같다고 합니다. 목에 뭐가 걸린 것 같다고 하고요. 방금 내시경 검사 결과 나왔는데 식도에 홍합 껍데기가 박혔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최기석은 서둘러 응급실을 찾았다.

“선생님, 여기입니다!”

최기석을 발견한 인턴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최기석은 다급하게 환자 곁에 자리를 잡은 채 환자를 살폈다.

환자는 수액을 맞고 있었으며 얼굴을 찌푸린 채 연신 몸을 좌우로 뒤척거렸다.

“흉부외과 기석 최라고 합니다. 지금 어디가 제일 불편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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