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쁜 일정 (2)
D 로젯 참관실.
벤슨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팝콘이라도 가져와서 닥터 권의 수술을 지켜보고 싶었다.
집도를 맡은 써전과 이를 지켜보는 써전.
이 두 써전 간의 간격은 하늘과 땅처럼 크다.
전자가 매 순간 피를 말리며 분투해야 한다면 후자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면 된다.
그래서 채플린이 말하지 않았던가.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지이이잉.
로젯문이 열리고 한 인물이 참관실로 들어왔다.
바로 미구엘이다.
“자네는 웬일이지?”
“여유시간이 생겨서 수술 참관을 하려 합니다. 때마침 미스터 최가 수술 보조로 들어가기도 해서…….”
“미스터 최가? 크루즈 팀은 오늘 오프인 걸로 알고 있는데?”
“병원 복귀 후 곧바로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미스터 최는 원래 오프 없이 지내는 걸로 유명하죠.”
“제 살 깎아 먹는 짓을 하는군. 자기가 성인군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저는 그 녀석이 걷는 거하며 숨 쉬는 것까지 꼴 보기 싫을 정도입니다.”
벤슨의 말에 미구엘이 극렬하게 동의했다.
“그래. 그 분노를 담아서 팀 CPR를 부숴 버리라고. 얼마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말하는 기색이 탐탁지 않은 걸? 예전 같은 패기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아.”
“미스터 최 때문에 조금 애를 먹는 중이지만 말씀하신 시간까지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의료계는 그렇게 고상한 곳이 아니라고.”
벤슨이 파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언제나 결론은 두 가지야. 죽거나, 죽이거나. 그건 환자는 물론 의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왜?”
“오늘 수술은 어떻게 보십니까?”
“내 장담하지. 아주 스펙터클한 영화가 될 거야. 1세 미만의 소아에게 행해지는 쥰 증후군 수술이라고. 분명 닥터 권의 손은 피로 젖겠지.”
“그럼 수술 보조를 한 미스터 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겠군요.”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지.”
벤슨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감돌았다.
송명진 후광으로 들어온 권일수보다 최기석이 더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이번 수술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최소 징계라도 먹여 줄 생각이었다.
미구엘과 대화를 나누는데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로젯으로 들어왔다.
“뭐지?”
“저게 다라고?”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고난도 쥰 증후군 수술, 그 스태프가 달랑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 * *
D 로젯 입구.
권일수와 최기석, 엠마가 최종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했겠지?”
최기석의 브리핑이 끝나자 권일수가 엠마를 바라봤다.
“아, 네. 그런데 수술 방법이 정말 획기적인 것 같습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접근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경과가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원래 선구자의 길은 멀고 험해. 아직 뒤에 남은 사람들을 끌어와야 하니까. 하지만 그 무게를 견딜 수 없다면 의료계는 발전하지 못할 거야.”
“저도 교수님 의견에 동감입니다.”
최기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확장성 심근병증 수술을 개발하고 있는 그였다.
권일수의 말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구구절절하게 가슴에 박혔다.
도전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환자는 쳇바퀴 돌듯이 영원히 고통 받는다.
그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선구자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자. 그럼 슬슬 들어가 볼까?”
“네!”
“준비됐습니다.”
세 사람은 스크럽을 마친 후 로젯으로 들어갔다.
타임아웃, 환자 감시 장치 연결, 전신마취 등의 절차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스터 최. 또 만나네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메이의 눈이 씽긋 웃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 걸요?”
“전 아닌데…… 제 아름다운 미모를 다 보여 줄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고 저기 수술 준비하는 여의사는 누구에요?”
“엠마라고 과 동기에요.”
“그럼 미스터 최랑 항상 같이 붙어 다니겠네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장 많이 마주치는 사람 중 한 명이죠.”
“으음…….”
최기석의 말에 메이가 마땅치 않다는 얼굴로 엠마를 훑었다.
“닥터 최.”
“네?”
“큰 가슴에 속으면 안 돼요. 여자의 매력은 팔색조와 같다고요. 가슴 하나로만 판단하면 곤란해요.”
“쉿!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최기석은 메이의 엉뚱한 소리를 막기 위해 그녀와 거리를 벌리며 수술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문득 올려다 본 참관용 수술실에 불청객이 두 명이나 찾아왔다.
그 주인공은 벤슨과 미구엘.
분명 수술 실패를 지켜보기 위해 찾아왔으리라.
쥰 증후군 집도는 소아흉부외과의들이 학을 뗄 정도로 어려웠으니까.
“전신마취 끝났습니다.”
마취의의 보고에 세 사람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별일 없을 거란다. 조금만 참으렴.’
최기석은 곤히 잠든 켈리를 내려다보며 수술에 각오를 다졌다.
결코 이 작은 생명이 스러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그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된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죽으면 그만큼의 절망이 밀려오곤 한다.
희망을 지키고 절망을 막는 일.
그것이 의사의 본분이다.
“지금부터 쥰 증후군 수술을 시작한다.”
권일수의 말에 엠마가 켈리의 가슴 부위를 넓게 소독하고 방포를 씌웠다.
“메스.”
메스를 건네받은 권일수가 아이의 늑간 부위를 절개했다.
아이의 보들보들한 피부가 종잇장처럼 갈라져 갔다.
이윽고 환자의 늑간과 갈비뼈까지 누운 U자 모양의 절개창이 생겨났다.
수술의 첫 단계인 후측방 개흉술이 끝났다.
“벌써 수술이 절반이나 끝났군. 이거 애써 찾아온 관객들이 실망하겠는걸?”
권일수가 수술용 참관실을 힐끔거렸다.
“벤슨 교수가 온 걸 알고 계셨습니까?”
“저렇게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몰라 주면 섭섭해하겠지.”
“준비한 견인기, 여기 있습니다.”
“좋아. 계속 가자고.”
최기석은 엠마와 함께 절개창에 견인기를 삽입한 후 절개창을 넓혔다.
피부가 벌어지면서 흉부 내부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사 결과대로라고 해야 할까.
갈비뼈가 꽉 조인 벨트처럼 아직 자라지 못한 심장과 폐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아이가 숨 쉴 때마다 심장과 폐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쥰 증후군 치사율이 80퍼센트가 넘는 이유.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폐와 심장이 성장하면서 갈비뼈로 인한 심폐의 압박감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결국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교정기.”
권일수는 최기석의 도움을 받아 교정기를 환자의 가슴 앞쪽에 설치했다.
그리고 갈비뼈 양쪽 끝에 교정대를 고정시켰다.
드르르륵. 딸칵.
교정기의 쇳소리가 경쾌했다.
그로부터 이십 분 후, 두 사람은 갈비뼈에 교정기를 삽입 및 고정하는 작업을 마쳤다.
“오늘은 첫날이니 1밀리미터 정도만 늘리고 내일부터 단계적으로 늘리자고. 중요한 환자니까 인턴 시키지 말고 최 선생이 직접 해.”
“물론입니다.”
최기석은 나사 고정을 푼 후 고정대를 잡아당기며 양쪽 갈비뼈를 좌우로 늘렸다.
이것으로 쥰 증후군 수술은 종료.
대략 3개월 정도 교정하면 켈리의 흉곽은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마무리는 최 선생이 하겠나? 잠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네. 피부 봉합쯤은 문제없습니다.”
권일수는 집도의 자리를 넘겨주며 수술대에서 멀어졌다.
문득 참관실을 올려다보자 벤슨이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 미쳤어? 제정신이야?’
그의 얼굴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당신 머리로는 죽었다 깨도 이해 못할 거야.’
권일수는 속마음을 숨기며 벤슨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 참 쉽죠.’라고 말하는 밥슨 아저씨의 모습과 닮았다.
* * *
그날 오후, 야사다의 집무실.
야사다와 최기석, 권일수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아까 전 쥰 증후군 수술을 끝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집도 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야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가 알기로 쥰 증후군은 짧으면 세 시간, 많으면 다섯 시간까지 걸리는 고난도 수술이다.
1세 미만의 소아의 갈비뼈와 폐를 건드리는 일이니 수술시간이 껑충 뛰어오를 수밖에…….
그런데 권일수는 이십 분 만에 수술을 끝냈다.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반적인 수술 방법으로 진행한 게 아니니까요. 한국에서 발견한 신수술을 쓰면 레지던트들도 집도가 가능합니다.”
“레지던트가 쥰 증후군 수술을요?”
“네. 지금의 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최기석이 권일수를 거들었다.
후측방 개흉술과 견인기 삽입.
이 두 가지가 쥰 증후군 수술의 전부다.
이것은 얼마 전 그가 집도한 너스바 수술보다 난이도가 떨어졌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쓰길래 난이도와 집도 시간이 그렇게 떨어집니까?”
“발상의 전환이죠.”
권일수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쥰 증후군은 자라지 않는 가슴뼈로 인해 흉곽이 제한되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슴뼈를 잘라서 늘어트리고 재봉합하는 방식을 택하죠.”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굳이 가슴뼈를 자르고 늘리고 재봉합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든 가슴뼈를 늘려 주기면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
“그래서 택한 것이 수술 대신 견인기를 삽입하는 겁니다. 견인기를 삽입해서 매일매일 가슴뼈를 당겨 주면 충분히 흉곽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죠. 수술로 인한 장기 손상 위험도 사라지고요.”
“으음…….”
최기석의 지원사격에 야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발상의 전환이군요. 외과의사들은 보통 메스로 승부를 보려고 하기 마련인데…… 견인기로 처치를 한다라…… 어쨌든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뭐. 저보다는 제 친구에게 고마운 일이에요. 사실 이 수술법은 친구 녀석이 개발했거든요.”
“좋은 친구를 두셨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게도 소개시켜 주시죠.”
야사다의 농담으로 집무실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똑. 똑. 똑.
대화 중 들리는 노크 소리.
야사다가 들어오라고 하자 벤슨이 인사하며 소파에 앉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벤슨.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헤드 치프. 헤드 치프가 아니라 닥터 권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벤슨이 도끼눈을 뜨고 권일수를 응시했다.
“닥터 권. 쥰 증후군 수술을 뭘로 아는 겁니까? 수술이 애들 장난입니까?”
“…….”
“대체 환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벤슨의 대거리에 권일수가 차갑게 웃었다.
“당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켈리는 내 환자예요. 지지고 볶는 건 내 마음이고 내 책임이에요. 그쪽이 신경 쓸 바 아니라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도의에 어긋나는 수술이지 않습니까? 견인기만 끼워 놓고 수술을 끝마치다니요. 다른 병원 의사들이 보면 까무러칠 겁니다.”
“바보 같은 소리!”
권일수가 일갈을 내질렀다.
“기존 쥰 증후군 수술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 보세요. 견인기를 쓰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닥터 권이 고집을 피운다 한들 이게 문제가 있는 수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MHC는 사이비 수술법을 인정하는 곳이 아니라고요.”
두 사람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집무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중재에 나설 것으로 보였던 야사다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최기석이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이미 끝난 수술로 왈가왈부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환자의 경과를 살핀 후 수술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다 동의하십니까?”
“물론.”
“흥! 바라던 바야. 견인기 따위를 써서 경과가 좋을 리 없어.”
두 사람이 모처럼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두 분의 감정이 많이 상하셨으니까 여기에 작은 이벤트를 더하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말해 봐.”
야사다의 재촉에 최기석이 말을 계속했다.
“지금 이 경우 환자의 경과가 좋다면 권 교수님이 옳은 것이고 그 반대라면 벤슨 교수님이 옳은 게 됩니다.”
“…….”
“그래서 말인데 진 쪽이 오전 회의 때 람보 흉내를 내면 어떨까요?”
“푸하하하하!”
진지한 말투로 엉뚱한 제안을 하는 최기석.
그를 보고 야사다가 빵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