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24화 (323/407)

숨 가쁜 일정 (1)

최기석은 미구엘을 비웃으며 의국을 나왔다.

군기를 잡느라 애쓰는 미구엘이 귀여우면서 한편으로 불쌍했다.

자신에게는 토끼 간호사가 있었다.

미구엘의 디버프 따위는 해체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반대로 미구엘은 불편한 가시 디버프 중첩을 고스란히 축적하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현재 미구엘의 디버프 중첩은 7.

세 번만 더 쌓으면 제 발로 병원을 나가게 된다.

스스로 본인의 무덤을 파고 있는 중이라고 할까.

조만간 우거지상을 하며 사직서를 낼 그를 생각하니 깨소금 맛이었다.

터벅터벅.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유지한 채 성인 병동을 돈 후 소아 병동으로 이동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켈리의 병실.

켈리는 쥰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쥰 증후군이란 신생아 10만 명 중 1명이 걸리는 희귀질환으로 이 질환에 걸린 아이는 흉곽이 성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심장과 폐가 흉곽에 눌린 채 자라지 못해 사망에 이른다.

“보호자십니까?”

최기석은 침상 옆에 앉은 노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하세요. 마릴린의 아버지 노튼이라고 합니다. 마릴린은 일이 바빠서 켈리는 제가 보살피기로 했어요.”

“아. 반갑습니다. 노튼 씨. 저는 켈리의 주치의 기석 최라고 합니다.”

“주치의요?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일이 있어서 한동안 병원을 비웠습니다.”

“그랬군요. 저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중년 동양인분이 주치의인 줄 알았습니다. 그분이 켈리를 아주 세심하게 보살펴 주셨거든요.”

“그분은 켈리의 수술을 집도할 일수 권 교수님입니다.”

최기석은 말을 마치고 노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튼은 영화 반지의 황제에서 마법사로 나온 배우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차분한 말투 속에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성성한 백발과 콧수염은 그를 더욱 현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오늘이 켈리 수술 날이죠?”

“네. 맞습니다.”

최기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켈리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로 인해 권일수가 오늘 오후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제가 알아보니 수술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하더군요. 사망률이 80퍼센트 가까이 된다고.”

“사망률은 수술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죠.”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부터 그 부분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은 미리 챙겨 온 수술 동의서를 내밀며 수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노튼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하긴 나도 놀랐으니.’

최기석은 노튼의 반응을 지켜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쥰 증후군의 표준 수술법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갈비뼈를 한 쌍으로 묶은 후 첫 번째 갈비뼈를 왼쪽으로 길게 자르고 두 번째 갈비뼈는 오른쪽으로 길게 자른 후 두 갈비뼈를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단, 이럴 경우 갈비뼈 절개가 광범위하게 이뤄지며 그 과정에서 장기 손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

1세 미만의 아이에게 사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수술법인 셈이다.

하지만 권일수의 수술법은 표준 수술법과 달랐다.

기존 수술과 궤를 달리할 정도로.

“알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네. 걱정이 깊으면 병이 생기는 법이니, 믿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기석은 노튼과 대화를 마치고 옆 병실을 찾았다.

심장이식 대기 중인 라훌의 병실이다.

사정이 있는지 보호자인 산제이 부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이렇게까지…….’

최기석은 라훌을 내려다보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가 부재중인 동안 라훌의 상태는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라훌은 체외형 심실보조장치를 착용 중이다.

심실보조장치란 심장은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보조장치를 삽입하여 혈액순환을 돕는 장치다.

심실보조장치를 사용했다는 건 라훌의 심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뜻.

심장이식이 더 늦어진다면 라훌은 조만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기석은 아쉬움을 삼키며 병실을 나왔다.

“오랜만이군. 오늘은 쉬는 날 아닌가?”

복도를 걷던 중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권일수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할 일이 쌓여서 그냥 출근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안 될 이유가 없지.”

두 사람은 복도 끝에 위치한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환자들 상태가 많이 나빠진 것 같습니다. 켈리도 그렇고 라훌도 그렇고요.”

“덕분에 내가 고생 좀 했어. 벤슨 교수가 자네 환자를 돌보기 싫다고 아주 학을 뗐거든.”

“제가 싫어서 그랬을 겁니다.”

“알아. 내 앞에서도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으니까.”

권일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쥰 증후군 수술이 있는 걸로 아는데. 제가 제1보조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어? 크루즈 검진 때문에 피곤할 텐데. 그쪽도 워낙 탈이 많았잖아.”

“사방에서 일이 터지는 데는 충분히 이골이 났습니다. 게다가 이번 수술은 그리 어렵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쥰 증후군의 신수술법은 교수님이 개발하신 겁니까?”

최기석이 꾹꾹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켈리에게 진행되는 수술법은 미국에서는 한 번도 실행되지 않은 획기적인 방법이다.

아까부터 그 출처가 알고 싶어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는 아니고, 내 지인이 개발한 수술이지.”

“지인이라면…….”

“그래. 한국 써전이야. 영평대 흉부외과 과장으로 있는 친구인데 얼마 전 연락했더니 이 수술법을 개발했다고 하더군. 따끈따끈한 수술법이라서 아직 임상도 안 해 본 모양이야.”

“…….”

“왜? 검증되지 않은 수술이라서 걱정되나?”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 같습니다.”

최기석은 솔직하게 대답하고 권일수의 표정을 살폈다.

이론으로만 완성된 수술을 실전에 적용하게 됐음에도 권일수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쥰 증후군이라면 어떤 수술을 개발하더라도 기존 수술법보다는 안전할 테니까.”

권일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화제를 돌렸다.

“EOB 기간이라 피곤하지 않나?”

“딱히 불편한 건 못 느끼겠습니다. 평소대로만 하면 별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네다운 대답이군. 그건 아나? EOB 평가는 오늘 오후로 끝났어.”

“네? 벌써 말입니까?”

최기석이 놀란 토끼눈을 했다.

EOB 기간은 2주 후, 그러니까 이번 달 말일에 끝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평가가 벌써 끝났다는 권일수의 말이 망치처럼 머리를 때렸다.

“미국 흉부외과 협회 쪽에서 제법 머리를 썼더군. 올해에는 통지한 평가 기간과 실제 평가 기간에 약간 시차가 있었어. 오늘 오후에 평가가 종료됐다는 메일이 왔다고 하더군.”

“혹시 등수는 나왔습니까? EOB는 평가 종료와 동시에 결과가 나온다고 들었습니다만…….”

“나왔어. 방금 막.”

권일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MHC의 순위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최소한 TOP 3에는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MHC의 순위는 말이야. 전체 중 4등이야.”

권일수의 말에 최기석은 의외로 담담한 기색을 보였다.

“교수님. 제게 장난치신다는 거 다 압니다. 사실 전 송 교수님께 결과를 들었습니다.”

“허허. 김빠지게. 오랜만에 최 선생 좀 놀려 먹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사실 MHC는 이번 평가에서 1등을 했어. 2등은 메이죠 흉부외과고 3등은 제임스 홉킨스 흉부외과지.”

“역시 그랬군요.”

“역시 그랬다고?”

최기석의 대답에 권일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명진에게 이미 결과를 들었다고 한 최기석이다. 그런데 역시 그랬다는 말을 한다는 게 이상했다.

“자네 혹시…….”

“부병원장님께 결과를 들었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MHC가 TOP 3를 벗어났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하하.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군.”

권일수의 호탕한 웃음이 휴게실을 가득 메웠다.

“장혁필이 자네를 좋아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사람을 제법 가지고 놀 줄 아는걸?”

“불쾌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보통 환자만 생각하는 의사들은 순진하기 마련이잖아. 내 생각에는 우리 쪽에도 자네 같은 변종이 더 많이 생기는 게 좋을 것 같군.”

“저는 돌연변이였군요.”

“물론. 하지만 진화에 꼭 필요한 돌연변이라고 할까?”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오늘 병실에 갔더니 라훌이 심실보조장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라훌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어. 하지만 지금 상태를 감안하면 세 달 정도가 고작이겠지. 만약 그 안에 공여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권일수가 말끝을 흐렸다.

끝내지 못한 말이 남긴 무게감, 그것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대화는 이쯤하지. 일 잘하고, 이따가 수술실에서 보자고.”

“네. 교수님.”

최기석은 휴게실을 떠난 후 의국으로 복귀했다.

* * *

그날 오후.

벤슨은 부병원장 파커의 집무실에서 파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부병원장님. 겹경사로군요.”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파커가 미소를 띤 채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하여간 크루즈 화재 사건도 무사히 넘어갔고 EOB 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으니 앞으로 꽃길만 걸으실 겁니다.”

“암. 그래야지.”

“그나저나 이번부터 병원 평가 외에 스태프 평가도 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각 병원별로 최우수 직원을 한 명씩 뽑아서 시상을 한다더군.”

“그럼 MHC에서는…….”

벤슨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비볐다.

그는 누가 뭐래도 파커의 오른팔이다.

파커의 추천만 있다면 최우수 직원이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우수 직원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에서 뽑아. 다음 주 중으로 미스터 최를 협회로 보내라고 하더군.”

“말도 안 됩니다! 이제 막 흉부외과 수련을 시작한 풋내기가 어떻게 최우수 직원이 됩니까?”

“협회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더군. 레지던트가 최우수 직원으로 뽑힌 건 MHC뿐이라고.”

“하아…….”

벤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통 터질 노릇이 아닌가. 자신의 밥그릇을 최기석에게 도둑맞은 기분이다.

“혹시 미스터 최가 뽑힌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CS 측면에서 완벽했다는 말만 하더군.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야.”

띠띠띠띠!

갑작스럽게 울리는 알림.

벤슨은 휴대폰 알림을 끄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지?”

“죄송합니다, 부병원장님. 대화는 여기서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가 볼 곳이 있어서.”

“가 볼 곳?”

파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송명진 부원장이 꽂은 권일수라는 소아흉부외과 교수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사람이 곧 쥰 증후군 수술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쥰 증후군 수술이라…… 우리 병원에서 기피하는 수술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MHC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주목 받고 싶은 마음에 스케줄을 잡은 것 같습니다.”

“오자마자 환자를 잡으면 볼만하겠군.”

“네. 송명진 부원장에 대한 여론도 나빠질 테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죠.”

“그럼 어서 가 봐.”

파커의 손짓에 벤슨이 자리를 떠났다.

수술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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