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레지던트 (6)
“아…….”
최기석은 액정에 떠오른 기사를 확인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다라프레이트 가격 인하, 현 가격에서 50퍼센트 낮추기로.]
[튜터의 파격적인 결정! 에이즈 환자들에게 새로운 길이 생길 것인가.]
[약 먹었던 튜터. 드디어 정신 차리나.]
[비호감남의 파격적인 결정, 더 이상 욕먹기 싫어요.]
약값을 절반으로 낮춘다고 해도 폭리를 취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튜터가 한 걸음 물러섰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의의를 두고 있었다.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하늘이 서쪽에서 떠도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국민 비호감남이라는 칭호를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한국에는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는데, 욕먹으면서 오래 사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거 말 되네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가운에 넣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유람선이 종착역인 허드슨 강 부두에 근접했다.
유난히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1박 2일의 여정, 아니 고난이 끝을 향하고 있었다.
* * *
몇 시간 후.
MHC 스태프들을 태운 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부병원장님께서 오늘 검진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들에게 반나절짜리 휴가를 지급했으니 오늘은 푹 쉬시기 바랍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나이스! 오프다, 오프.”
“안 그래도 화재 때문에 개고생했는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스태프들이 한마디씩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최기석은 기숙사에 복귀한 후 짐 정리와 샤워를 마치고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었다.
다른 스태프처럼 편하게 쉴 여유는 없었다.
드르르르륵.
문을 열고 의국으로 들어갔지만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다.
스크럽이나 병동환자 관리, 응급실 환자 진료 등으로 바쁜 모양이다.
의자에 앉은 최기석은 제일 먼저 벤을 검색했다.
유람선에서 만난 제니의 남편이자, 벤슨의 메이즈 수술로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을.
‘뭐지?’
그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특이하게 벤의 차트에 락이 걸려 있었다.
더불어 이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권한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다.
차트에 락을 걸어 놓는 일이 가능했던가.
깊어지는 의문.
벤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추론이 지금은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미스터 최. 왔어요?”
고개를 돌리자 엠마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반가워요, 엠마. 병동은 별일 없었죠?”
“별일이 있어 봐야 유람선 쪽보다 더 했겠어요? 어젯밤 크루즈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면서요?”
“끔찍한 일이었죠. 불이 객실 칸 반을 태우고도 다친 사람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거기서도 또 한 건 하셨던데요? 사람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본인 몸도 잘 챙겨야죠. 행운이 언제까지 미스터 최의 곁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 말아요.”
엠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제인을 구하기 위해 화재현장으로 뛰어들었던 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는 자제할게요.”
“네. 꼭 그러세요. 제 걱정은 비싼 편이거든요.”
“알아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오자마자 일하는 거예요? 이번 스태프들은 특별휴가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저는 쉴 틈이 없네요. 엠마, 혹시 이거 왜 그런지 알아요?”
그의 검지가 모니터를 가리키자 엠마가 이를 유심하게 살폈다.
“가끔 이렇게 열람을 제한해 놓은 차트가 있더라고요. 문제의 소지가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던 차트들에다가 락을 건다고요.”
“그러니까 락이 걸린 차트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뜻이죠?”
“백 퍼센트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럴 확률이 높아요.”
“엠마는 락이 걸린 차트를 어떻게 확인했어요?”
“의무기록실에 별도로 열람신청 해야죠. 연구나 치료 목적이라고 하면 대부분 받아 줘요.”
“으음…… 그렇군요.”
최기석의 의미심장한 반응에 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이 환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글쎄요.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단순한 추측이라면 의무기록실에서 열람신청을 안 받아 줄 것 같은데…….”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처리할게요. 엠마가 휘말리면 재미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또. 또. 또. 무슨 일이든지 혼자 처리하려는 생각은 버려요. 동료는 장식용으로 있는 게 아니라고요!”
“알아요, 엠마.”
최기석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서 손을 빌리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제 마음 이해하죠?”
“……미안해요. 괜히 열을 내서.”
엠마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미스터 최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병원 내 모든 짐을 혼자서 안고 가려는 느낌이랄까? 폐동맥 협착증 환자 집도할 때도 그랬고…….”
“그때는 너무 흥분해서 그랬던 거죠. 어쨌든 엠마의 충고는 새겨들을게요.”
“네.”
대화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벤의 의무기록 열람을 신청한 후 생각에 빠졌다.
엠마에게 앓는 소리를 괜히 한 게 아니라 정말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할 일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업무는 스승의 신수술을 개량하는 것이다.
스승이 가르쳐 준 수술법과 프랑스 여의사 샬롯의 수술법.
이 두 가지를 조합해서 수술을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 업무는 올리버를 만나는 일이다.
올리버는 야사다의 스승이자 세계 최초의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다.
그를 만나서 트리플 보드를 달성하기 위한 조언을 들어 보고 싶었다.
마침 관련 임무도 받았고 말이다.
마지막은 팀 CPR의 첫 번째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환자를 안 봤구나.’
최기석은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미구엘이 의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구엘.”
“잘 됐네. 안 그래도 할 일이 있었는데. 거기 앉아 봐.”
최기석과 미구엘이 자리에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양쪽 다 상대방에게 반감을 가진 만큼 시선이 충돌하며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드디어 건수를 잡았네.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주마.’
미구엘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가 팀 CPR에 합류한 것은 팀 CPR을 박살 내기 위해서다.
후배들을 쥐 잡듯이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벤슨에게 구원을 받았고 말이다. 그런데 합류한 후에 팀 CPR에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팀원들을 아무리 갈궈도 그들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 과정에서 오히려 미구엘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딱 한 달을 더 주겠어. 그때까지 팀 CPR을 부수지 못하면 자넬 다시 브랜치로 보내겠어.]
어제 받았던 벤슨의 최후통첩을 떠올리며 미구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빨리 해 주시죠. 환자 라운딩을 하려던 참입니다.”
“성격 한번 급하시네. 아침에 뉴스 봤다. 너, 승객을 구하기 위해 화재현장에 맨몸으로 뛰어 들었다면서?”
“네. 맞습니다.”
“제정신이니?”
미구엘이 오만상을 쓰며 말을 계속했다.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치료하는 거라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게 아니란 말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니? 응? MHC에서 잘나간다고 네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아?”
“…….”
“네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어. 결과가 좋았길래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징계감이었다고.”
미구엘은 최기석의 표정을 살피며 희죽 웃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잘난 레지던트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혹시 본인의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고 있는 걸까.
“입이 있으면 말해 보지. 응?”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미스터 최 때문에 아이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잖아요. 게다가 부병원장님이나 다른 분들이 미스터 최의 행동을 꾸짖은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엠마,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소리예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요. 지금 와서 굳이 그 일을 지적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해…….”
“당연히 있어요!”
미구엘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앞으로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언젠가 환자를 잡을 수도 있어요. 사람을 살려야 할 의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
“아까부터 왜 말을 못해?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는 건가?”
미구엘이 의기양양한 모습을 뽐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때처럼 바보같이 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사과만 한마디 해. 그러면 이번 일은 넓은 아량으로 넘어갈게.”
“미구엘. 그건…….”
“엠마는 빠져 있어요. 이건 미스터 최랑 내가 해결할 문제니까.”
미구엘의 호통에 엠마가 딱딱딱 이를 부딪쳤다.
거칠게 군기를 잡는 미구엘과 입도 한 번 뻥끗하지 않는 최기석.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대립각이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헛소리하지 마.”
최기석의 첫 마디에 미구엘이 눈을 부릅떴다.
“뭐…… 뭐라고?”
“사람을 구하는 게 어리석은 일인가? 그럼 이 지구상에서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어리석은 사람이겠군.”
“논점 흐리지 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미구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본래 말싸움을 할 때는 감정을 죽이고 차분하게 상대를 궁지로 모는 게 중요하다.
그걸 잘해서 하급자 킬러라는 별명을 얻은 게 그였고 말이다.
그런데 최기석을 상대하면 이상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논점에 대해 이야기하면 미구엘이 날 감당하지 못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군.”
“과연 그럴까? 애초에 당신은 내 행동에 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 당신이 뭔데 내 행동을 지적하지?”
“…….”
“내 행동이 당신에게 피해를 줬나? 피해를 입은 부분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정중하게 사과하지.”
최기석의 지적에 미구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닌가?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쓸데없는 훈계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이 자식! 사람 한번 살렸다고 우쭐하지 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잖아? 사실 당신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내가 부러웠던 거야. 내 말 맞지?”
“이이이익! 솜털도 안 가신 레지던트가 감히 나를…….”
“미구엘, 직급에 맞는 본보기를 보여 줬으면 좋겠어. 펠로우의 역할은 레지던트를 휘어잡는 게 아니라 진료 및 처치 방향을 잡아 주는 거라고.”
최기석이 할 말 다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다시 앉아!”
“기억력이 닭 수준이군. 방금 전 내가 한 말 잊었어? 당신은 나를 강제할 힘이 없다고.”
“이 자리를 벗어나면 널 징계위원회에 넘길 거야. 네가 화재현장에 뛰어든 무모함은 일벌백계를 받아 마땅하지. 농담 아니니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겁을 주는 건가? 내가 처벌을 받으려면 내 행동으로 사람이 죽었어야 해. 하지만 그건 아쉽게도 물 건너갔지.”
“…….”
“아. 참. 날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네.”
최기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미구엘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게 좋겠어. 시간을 화재현장으로 돌려서 내가 아이를 구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지. 도전해 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