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레지던트 (5)
“저스틴, 프랭클린 템플러에 다녀요?”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프랭클린 템플러는 미국의 대형투자회사 중 한 곳으로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다.
고객들에게 각종 펀드를 제공하며 투자상담에도 일가견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수석 금융 매니저네요?”
“어렸을 때부터 경영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월스트리트에 발을 디디게 됐죠.”
“그렇군요.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나중에 완치되면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있어요. 회사 운영이라든지 주식 매입 같은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 중이라서요.”
“닥터 최의 상담은 24시간 환영입니다. 물론 상담비는 무료고요.”
말을 마친 저스틴이 씽긋 웃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새로운 패시브 전립선의 황태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전립선의 황태자]
- 불의의 사고로 성기능에 일시적인 장애가 온 저스틴. 절망한 그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 전립선 기능이 대폭 상승합니다. 밤일을 치를 경우 2세를 가질 확률이 증가하며 2세의 기형 출산율이 떨어집니다.
패시브를 확인한 최기석은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고자가 될 뻔한 저스틴을 구했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보상이 평소와 달랐다.
“말만으로도 힘이 되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 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병실을 떠난 최기석이 스태프 전용 객실로 이동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인과 제니가 침대에 누워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선생님!”
제인이 달려와 그의 품에 와락 안겼고 최기석은 제인을 끌어안은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제인의 즐거운 비명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최기석이 제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씩씩한 게 보기 좋은 걸? 선생님 생각에 제인은 커서 씩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저도 그럴 것 같아요.”
제인의 재치 있는 답변에 최기석은 그저 웃었다.
“오셨군요, 닥터 최.”
“네. 문득 제인과 제니 생각이 나서요. 스태프 전용 객실이라 많이 불편하시죠?”
“아니에요. 이만하면 충분해요.”
제니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그렇게 큰 사건을 겪고도 저나 제인이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는 게.”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전 종교가 없는데요? 애초에 신이 있었다면 이런 고통스런 화재도 생기지 않았을 걸요?”
제니의 대답은 냉소적이었다.
사실 두 사람의 멘탈이 유지된 이유는 토끼 간호사 덕분이다. 토끼 간호사로 모녀에게 걸린 디버프를 해결했기에 정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했다.
화재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제인.
딸 걱정에 속을 태운 제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두 사람은 아직까지 화재의 고통을 떨쳐내지 못했으리라.
“너무 늦었지만 제인을 구해줘서 감사해요.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닥터 최가 너무 바빠 보여서…….”
“괜찮습니다. 제인이 무사했으니 됐죠.”
“헤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 차례 대화가 끝나고 찾아온 침묵,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제니다.
“닥터 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나요?”
“의미심장한 말이군요.”
“사실 저는 EOB 평가단 중 한 명이에요. MHC 크루즈 담당이고요.”
그녀의 말에 최기석이 몸을 들썩거렸다.
사건 사고가 바람 잘 날 없이 터지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이 EOB 기간임을.
“놀라셨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설마 몇 천 달러가 넘는 검진을 평가하기 위해 인원을 투입할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 흉부외과 협회를 얕보지 말아요. 얼마나 철두철미한 곳인데.”
“그나저나 EOB 평가단이라는 걸 갑자기 털어놓은 이유가 궁금하군요. 원래 평가가 끝날 때까지 숨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미스터 최가 딸의 생명을 구해 줬잖아요.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제니가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서 내밀었고 최기석은 이를 받은 후 안의 서류를 살폈다.
서류에는 검진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판단하는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수가 무려 5장에 달했다.
EOB 평가가 그만큼 꼼꼼하다는 뜻이다.
“이 문항들을 다 작성하려면 중노동을 해야겠군요.”
“안 그래도 벌써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제니가 인상을 쓰며 화제를 돌렸다.
“미스터 최가 제인을 구하지 않았다면 아마 크루즈 검진 쪽은 평가 최하점을 받았을 거예요.”
“최하점이라……. 화재가 발생했다는 걸 감안해도 우리 검진이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루즈 검진의 시설 및 진료 스케줄, 의사들의 CS 등은 훌륭한 편이었다. 파커가 MHC에서 최초로 진행한 사업인 만큼 힘을 많이 쏟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니는 왜 최하점을 주려 했던 걸까.
“MHC에 안 좋은 기억이 있거든요. 남편이 MHC에서 수술 받던 중 죽었어요.”
“…….”
“평가 최하점을 매기려고 했던 건 개인적인 복수예요. 그러니까 MHC 진료가 천국처럼 황홀했다고 하더라도 평가는 야박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요. 뭐, 미스터 최의 활약 때문에 그건 물 건너갔지만.”
제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미스터 최도 본인이 일하는 곳의 평가가 나쁘면 기분 나쁘겠죠?”
“물론입니다.”
“역시 안 되겠네요. 복수 같은 건.”
“혹시 남편분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진 않아요.”
“오해는 풀릴 수 있겠죠.”
최기석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상하네. 내가 왜…….’
제니는 온몸이 옥죄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저 최기석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이거늘, 저승사자를 만난 것처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남편 이야기가 불편하면 더 캐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휴우…… 알았어요. 말하면 되잖아요. 눈 좀 풀어요.”
제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의 남편 벤은 심방세동과 삼첨판막 협착증을 앓고 있었다.
심방세동.
이것은 가장 흔한 부정맥의 한 종류로 심방에 비정상적인 전기 자극이 일어나 맥이 아주 불규칙하게 뛰는 질환이다.
삼첨판막 협착증이란 여러 가지 이유로 우심방과 우심실 사이에 있는 판막이 좁아진 질환을 말한다.
“벤은 제임스 홉킨스에서 삼첨판막 수술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았지만 이 년 만에 다시 통증을 호소했죠. 그렇게 두 번째로 찾은 곳이 MHC예요. MHC가 막 개원했을 때니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군요.”
“…….”
“벤은 메이즈 수술(심방세동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어요. 갑자기 응급상황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당시가 떠올랐는지 제니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최기석은 말없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당시 그녀가 느꼈을 고통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분명 어려운 수술이 아니라고 했어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 놓고선…….”
“제니.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요.”
“네.”
제니는 최기석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감정을 추슬렀다.
시원하고 울고 나니 가슴이 뻥 뚫렸다.
“그때부터였어요. MHC를 불신한 게. 미스터 최가 제 입장이라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남편의 목숨을 앗아 간 병원을 평가하는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겠어요?”
“암요. 충분히 이해해요.”
최기석은 제니의 표정을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집도의 이름은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죠. 어떻게 그 사람 이름을 잊겠어요. 집도의 이름은…… 벤슨이었어요.”
“베…… 벤슨이요?”
“닥터 최도 아는 사람인가요?”
“흉부외과 외래 교수니 모를 수가 없죠.”
최기석은 최대한 담담한 척했다.
벤슨과는 이미 폐동맥 협착증 환자 케이스로 악연을 겪었다.
그런데 그가 벤의 죽음과도 연결되었다니…….
띠링!
[숨겨진 임무, 남겨진 자의 슬픔을 획득하셨습니다. 벤의 사망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하여 제니에게 전달할 경우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상태창을 확인한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사건에 악취 가득한 사건과 음모들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아는 벤슨이라면 충분히 뒷수작을 부리고도 남았다.
“제니. 제 말이 야속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수술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갑작스런 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고, 검사 결과와 실제 수술 부위의 상태가 다른 경우도 있죠.”
“…….”
“그런데 제니는 아직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아요.”
“네. 맞아요.”
“그러니까 제가 대신 확인해 볼게요. 정말 돌발적인 사고가 벌어진 건지, 아니면 인재(人災)가 발생한 건지. 그것만 확실해져도 마음이 편하겠죠?”
그의 말에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석은 제니를 충분히 위로한 후 병실을 나왔다.
* * *
다음 날 오전.
크루즈 검진의 새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뒤숭숭한 화재가 발생했지만 유람선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파커는 승객들에게 피해보상을 약속했으며 내년 검진을 무료로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대부분의 승객이 이것에 만족했다.
오전 식사와 강의가 끝나고 찾아온 여유시간.
최기석은 갑판에 서서 허드슨 강을 바라보았다.
‘잘 걸렸다.’
좋은 경치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빠드득 이를 가는 최기석.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벤과 벤슨에 대한 생각들 때문이었다.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벤의 죽음에 벤슨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집도의가 환자의 죽음을 보호자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구린내가 훅 풍겨 왔다.
만약 벤슨이 의료사고를 은폐했다고 하면 폐동맥 협착증 사건 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아니 몇 배로 돌려줄 수 있으리라.
최기석은 유람선이 하루라도 빨리 정박하기를 바랐다.
유람선에 있는 EMR로는 환자들의 차트를 완벽하게 살펴볼 수 없었기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니 레온이 씽긋 웃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 하나 늘어서요.”
“화재도 끝났는데요?”
“제가 원래 그렇죠, 뭐. 레온은 피곤하지 않아요?”
최기석의 시선이 레온에게 향했다.
어젯밤 수술에 나선 것은 최기석만이 아니었다.
레온은 뇌경막하 출혈이 발생한 환자가 발생해서 몇 시간 동안 수술에 나섰다.
실제 처치 시간은 그보다 레온이 몇 배나 더 길었던 셈이다.
“한숨 자고 나니까 살 것 같네요.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뱃멀미가 좀 있거든요. 수술 중 멀미약효가 떨어지는 바람에 진땀 뺐어요.”
“우와. 대단한 정신력이네요. 저라면 레온처럼 못했을 거예요.”
“칭찬 고마워요. 그나저나 아침 뉴스는 봤어요?”
“유람선 화재가 기사화됐나 보죠?”
“그것도 있지만 사실 더 쇼킹한 사건이 있어요.”
레온이 담담하게 휴대폰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