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21화 (320/407)

진격의 레지던트 (4)

MHC 집무실.

파커는 소파에 앉아 원무과 과장 윌리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화재로 인한 피해상황 보고드립니다. 불길로 지하 1층 객실 칸의 절반이 훼손되었으며 인명피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승객들의 소지품 등에 관한 피해보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명피해가 없단 말이지?”

“일부 부상자가 있지만 현재 병실에서 치료중입니다.”

“지상으로 이송한 환자는?”

“역시 없습니다.”

“그럼 됐어.”

파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화재라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MHC 재정에 큰 타격은 없었다.

우선 화재피해는 보험으로 배상할 수 있었고 대여한 유람선의 수리비도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승객당 5천 달러를 받고 진행하는 크루즈 검진이 아닌가.

수리비를 대고도 충분히 이득이다.

그가 주변의 반대를 묵살하면서까지 검진을 추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말이다.

“부병원장님. 승객 보상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 년 후에 다시 크루즈 검진 예약을 잡아 줘. 5천 달러짜리 검진이니까 싫어할 사람은 없을 거야. 만약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변상하고.”

“알겠습니다.”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화제를 돌렸다.

“크루즈 검진에 이런 암초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슬슬 입소문 타면서 예약 건수가 늘어나는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화재로 타격이 크겠죠?”

“아닐 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외로 우리 검진을 홍보할 좋은 기회일지 몰라. 화재 진압과정이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전혀 없었지. 오히려 믿을 만한 검진이라는 평이 생길 수 있어.”

파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ABD 방송국에 있는 우리 병원 전담기자, 그 이름이 뭐였더라?”

“사무엘입니다.”

“그래. 사무엘에게 연락해서 기사 좀 팍팍 써 달라고 해. 미스터 최가 승객을 구하기 위해 화재현장에 뛰어들었던 일, 고환파열 수술한 일, 그리고 화재진압 과정에 대해서 말이야. 최대한 우리가 돋보이는 쪽으로.”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윌리엄은 대답하며 파커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단어, 그것은 바로 수완가다.

파커는 자신의 뜻대로 주변사람을 주무르고 일을 처리하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번 화재 사건만 해도 그랬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황을 비관하며 대비책을 짜내느라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런데 파커는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며 언론플레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배포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긴 그러니까 역대 최고로 빨리 부병원장에 진급했겠지.’

월리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비상한 머리로 돈 벌 궁리만 하지 말고 환자를 생각했으면 MHC가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최라는 친구 정말 대단하더군요.”

“미스터 최 말인가?”

“네. 소문만 듣다가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만…… 상당히 강단 있는 친구 같더군요. 오후에 있었던 강연을 보면 말도 잘하고, 흉부외과 의사가 고환파열 수술 보조로도 들어가고. 거기다 승객을 구하겠다고 불 속에 뛰어들지를 않나.”

“…….”

“잘난 의사와 못난 의사, 제 생각만 하는 의사와 환자밖에 모르는 의사, 그밖에 많은 의사들을 물리도록 봐 왔지만 이런 의사는 처음 봤습니다.”

“엄청난 돌연변이지. 실력 면에서도, 인성 면에서도.”

“그런데 이 친구 쳐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금만 더 크면 부병원장님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파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못 먹는 떡이 커 보인다고 쉽게 놓을 수가 없어. 계속 눈에 아른거린단 말이지.”

“부병원장님답지 않은 말씀이군요. 제가 아는 부병원장님은 매사가 칼 같으신 분인데.”

“칼도 가끔 무딜 때가 있지 않나?”

파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자네는 왜 내 밑에 있는 건가?”

“…….”

“자네의 목표와 내 목표는 정반대인 걸로 알고 있는데.”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부병원장님의 영원한 왼팔입니다. 부병원장님의 뜻을 따라 MHC를 살찌우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믿어 주십시오.”

“흐음…… 사람들 중에는 말이야. 아주 드물게 위악자라는 포지션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어.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인데 일부러 나쁜 짓을 하는 타입이지.”

파커의 말에 윌리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지 부병원장님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선한 인간이라면 굳이 나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말이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세상은 말이야.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이기적인 인간들이 많아. 생각해 봐. 그 많은 돈과 지위가 어디서 나왔을까?”

“…….”

“그것들은 전부 다 남에게서 짜낸 것들이야. 그러니까 윗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짜서 자기 배를 채운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 구조를 깨달은 몇몇 선한 사람들은 스스로 그 구조 속에 뛰어들어. 그게 바로 내가 말한 위악자지.”

“……그렇군요.”

“왜? 자네 이야기를 하니까 뜨끔한가?”

“아닙니다. 그저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서 놀랐을 뿐입니다.”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해. 이 순간에도 감정을 숨길 수 있을 만큼 유능하니까.”

파커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자네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제아무리 위악을 부린다고 해도 결국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짜내는 시스템은 바꿀 수 없다는 걸 말이야.”

“그건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크크크큭.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겠지. 나중에 오늘 대화를 떠올리면 분명 이불에 발차기를 할 테고.”

“그럼 부병원장님은 미스터 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라이벌로 생각하네.”

“라이벌이요? 레지던트 주제에 부병원장님과 라이벌이라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자네가 미스터 최를 과소평가하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부병원장님. 혹시 CKS 컴퍼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글쎄? 처음 듣는데?”

“MHC 클리닉의 지분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최근 지분 상승률이 그 어떤 투자회사보다 높습니다.”

“뭐하는 회사지?”

“그걸 밝혀내지 못해서 골머리를 썩고 있습니다. 신생 투자회사로 보이는데 자금력이 생각보다 좋습니다. 제임스 홉킨스 쪽 주식도 일부 사들이는 중이고요.”

“흐음…… MHC에 적대적으로 보이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주주총회 때 무슨 의견이라도 피력했을 테니까요.”

“CKS 컴퍼니라…… 왠지 어감이 좋지 않은데……. 병원장님께 말씀드려야겠어.”

“네.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쉬고 싶군. 나가 봐.”

“푹 쉬십시오.”

윌리엄은 집무실을 나온 후 물끄러미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자네는 왜 내 밑에 있는 건가? 자네의 목표와 내 목표는 정반대인 걸로 알고 있는데.]

파커의 말이 비수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다.

설마 거기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을 줄이야. 감쪽같이 속였다고 자신했거늘…….

“미스터 최라. 적의 적이라면 아군이 될 수 있겠군.”

윌리엄의 중얼거림이 복도로 퍼져 나갔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진료실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후 한 차례 환자 폭풍이 불어닥쳤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환자, 심한 기침을 호소하는 환자,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 등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물론 그중에 심각한 환자는 없었다.

화재로 겪은 심리적 충격으로 진료를 원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기석은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늘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자 쓴웃음만 나왔다.

자살충동 환자 저지, 고환파열 환자 수술, 화재로 인한 인명구조와 응급처지까지.

스펙터클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하루에 하나도 겪기 힘든 사건을 세 개나 치른 셈이다.

‘뭐. 그래도 보상은 있으니까.’

상태창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받은 유람선 임무를 완수한 후 제법 짭짤한 보상을 얻었다.

첫째로 스승에게 받은 심장의 지휘자 스킬이 한 단계 성장했다.

[심장의 지휘자 Lv.2]

- 소아와 성인에 관계없이 심장 수술 성공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 레벨이 오를수록 수술 성공률이 증가합니다.

- 높은 확률로 생환의 빛 효과가 환자에게 적용됩니다.

[특수효과 혜안(慧眼): 30퍼센트의 확률로 응급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떠오릅니다. 해결방법의 구체적인 방법과 다양성은 그동안 읽은 논문에 비례합니다. 발동 횟수는 일일 1회입니다.]

[특수효과 거장의 손길: 20퍼센트의 확률로 송명진의 수술 접근법과 수술능력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지속시간은 삼십 분입니다.]

레벨이 오르면서 거장의 손길 효과가 추가되었다.

거장의 손길은 스승의 능력을 잠시 빌릴 수 있는 획기적인 기능이 있었다. 앞으로의 수술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둘째로 새로운 칭호를 얻었다.

[깔깔깔, 호호호]

- 짜릿해. 늘 재미있어. 즐거운 게 최고야.

- 유머감각이 대폭 상승하여 대화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단 30퍼센트의 확률로 썰렁 개그가 발동되어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 수 있습니다.

셋째로 얻은 것은 레전드 젬이다.

레전드 젬은 다른 젬들과 달리 황금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모든 스킬의 유지시간을 10퍼센트 상승시켜 주는 엄청난 효과를 지녔다.

고된 하루를 보냈지만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고 할까.

상태창을 살피던 최기석은 진료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다른 때와 달리 진료실과 병실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승객이 아니라 스태프였다.

지하 1층 객실 칸에 화재가 나면서 승객이 잠잘 곳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스태프들이 진료실과 병실로 이동하고 승객들이 스태프 전용 객실을 사용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윽고 최기석이 복도 끝에 위치한 병실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미스터 최. 오셨어요?”

“벌써 깨셨습니까?”

“아. 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팔다리가 무거운 걸 빼면 괜찮아요.”

저스틴이 힘없는 미소를 지었고 그의 곁에 있던 린지는 벌떡 일어나 최기석에게 다가왔다.

“닥터 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저스틴이 험한 꼴을 면했어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스틴이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고자가 되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아…… 앞으로도 문제없는 거죠?”

“네. 수술 후 찍은 초음파에서도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검진 종료 후 외래만 몇 번 다녀오면 될 거예요.”

“휴우…… 다행이다.”

린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인사가 늦었네요. 고맙습니다, 닥터 최.”

“천만에요. 그리고 저는 남자의 고통을 이겨 낸 저스틴이 더 대단해 보이는 걸요?”

“확실히 그때는 죽는 줄 알았어요.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벼락 맞은 것처럼 온몸이 짜릿했다니까요. 닥터 최가 아는 그 고통에 한 열 배는 됐을 거예요.”

“으…… 상상도 하기 싫네요.”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에야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닥터 최. 딱히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요.”

“도움 받으려고 저스틴을 구한 게 아닙니다.”

“알아요. 하지만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은인을 빈손으로 보내면 마음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린지, 내 지갑에서 명함 좀 꺼내 줘.”

“알았어.”

린지가 저스틴을 대신해서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그것은 한 장의 명함이다.

[프랭클린 템플러 수석 금융 매니저 저스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