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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16화 (315/407)

배움에는 끝이 없다 (5)

"대단하네."

제니는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정박되어 있는 유람선을 바라봤다.

유람선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런 곳에서 진료와 검진을 시행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우와! 엄마. 우리 여기서 하룻밤 자는 거야?"

"그래. 기대되지?"

"응. 심장이 막 쿵쿵 떨려."

딸 제인이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제니는 그런 딸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검진 받는 것 외에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으니까.

그것은 바로 MHC의 크루즈 검진을 평가하는 일이다.

우연치 않은 기회로 흉부외과협회에 근무 중인 지인에게 EOB 평가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평가지는 그녀의 가방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유람선에서 내리는 순간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MHC를 찌를 것이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지.'

유람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살기등등했다.

"엄마. 눈이 왜 그렇게 무서워?"

"햇살이 너무 세서 그래. 그럼 들어갈까?"

제니는 제인과 승선한 후 객실에 짐을 풀었다.

객실은 홍보책의 이미지대로 깔끔했다.

웬만한 호텔방에 비견될 정도다.

객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인이 침대에 서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걸 말리느라 심력이 제법 소모되었다.

짐 정리가 끝난 후 2층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이번 크루즈 진료의 첫 번째 단계인 오리엔테이션이다. 양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내일까지 진행되는 일정 및 주의사항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물론 사람들은 다과를 즐기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제니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은 귓등으로 흘리며 주변에 방해되지 않는 수준에서 딸과 놀아 주었다.

시간이 흘러 찾아온 첫 번째 진료시간.

제니는 일반외과를 시작으로 각종 과를 들러 검사 결과를 들었다.

위장 내시경, 대장 내시경, 복부 초음파, 갑상선 초음파, 유방암 검사 등등.

모든 검사 결과가 양호했다.

그 사람이 곁을 떠난 후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마지막으로 찾은 흉부외과.

진료실에 들어가자 검은 머리의 동양인 의사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았다.

"제니. 왜 그렇게 저를 뚫어져라 보시나요?"

"호…… 혹시 닥터 최 아닌가요? 얼마 전 뉴튜브 동영상에 나왔던?"

"아. 맞습니다. 제가 그 기석 최입니다. 유명인도 아닌데 알아봐 주시니까 쑥스러운데요?"

최기석이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거렸다.

"쑥스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좋은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니까."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들은 하얀 가운을 입은 악마들이잖아요. 겉으로는 환자를 위한다고 떠들지만 사실은 자기 실적하고 봉급만 신경 쓰잖아요. 제 말이 틀린가요?"

제니의 목소리에 노기가 감돌았다.

"의사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모양이군요.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하시는 걸 보면."

"……."

"세상에는 옳은 행동을 하는 사람과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제니가 만난 사람은 후자였겠죠. 당시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의사 전체를 매도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제니는 순간 말문을 잃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폐부를 찌르는 힘이 있었다.

마치 그 사람처럼.

"전 설교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검사 결과나 알려 주세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기석이 꼼꼼하게 검사 결과를 설명했고 제니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결론적으로 이상은 없다는 거죠?"

"네. 하지만 검사 결과에 의지한 채 무리하게 생활하면 없던 병도 생깁니다. 항상 건강에 유념하세요."

"……."

"옆에 있는 분은 따님입니까?"

최기석이 제인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네. 제 이름은 제인이에요."

"어머니 진료에 따라 왔나보구나. 아버지는…… 아. 그 이야기는 됐다. 유람선에 타니까 신나지?"

"처음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별로에요. 혼자서 놀려니까 심심해요."

제인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러다가 최기석의 목에 걸린 청진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선생님. 저 그거 한 번만 써 봐도 돼요."

"제인. 그러면 안 돼. 여긴 네 놀이터가 아니야."

"히이이잉. 엄마."

"괜찮습니다. 마지막 진료라서 여유가 있거든요. 제인이 괜찮다면 아이에게 청진음을 들려주고 싶습니다만……."

"의미 없는 짓이에요."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혹시라도 오늘 청진기를 써 보고 제인이 의사의 꿈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의미를 부여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을 뿐이죠."

"……좋을 대로 하세요."

"이야! 신난다!"

제인이 폴짝폴짝 뛰며 최기석에게 다가갔고 최기석은 제인에게 청진기를 씌었다.

톡. 톡. 톡.

"어때?"

"우와.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려요!"

최기석이 청진판을 두드리자 제인이 놀란 토끼눈을 했다.

"이제 선생님 심장 소리를 들려줄게. 귀 쫑긋 세우고 잘 들어야 된다."

"네!"

최기석은 청진기를 옷자락 안에 넣고 심장 부위에 청친판을 댔다.

이윽고 제인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청진기와 최기석을 번갈아 응시했다.

"선생님.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려요. 아주 선명하게요."

"의사 선생님들이 왜 청진기를 사용하는지 알겠지?"

'뭐지?'

제니는 제인과 최기석을 지켜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제인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거늘, 왜 이 순간이 이렇게 불편한 걸까.

가슴에 돌덩어리가 내려앉은 기분이다.

"제인. 그만 가자."

"엄마. 선생님이랑 좀 더 놀면 안 돼요?"

"안 돼."

제니는 딱 잘라 말하고 제인의 손을 붙잡은 채 진료실을 나왔다.

기석 최라고 했지?

넌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인간이야.

의사 평가에선 네가 최저점을 받게 되겠지.

진료실을 나온 제니는 객실에서 쉬다가 다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일행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고 연회장 바깥에는 MHC 스태프들이 커다란 원을 그린 채 서 있었다.

MHC의 공식 스케줄 중 하나인 강연이 준비 중이었다.

얼마 후 연회장 한쪽 벽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고 최기석이 단상에 올랐다.

"MHC 크루즈 검진에 참여한 신사 여러분, 반갑습니다. 흉부외과 전공수련 중인 기석 최입니다."

* * *

최기석은 청중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좋은 장소에서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제 생각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화두는 단연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 말에 비춰 보면 여러분들은 참으로 현명하신 분들입니다. MHC 크루즈 검진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으니까요."

"이야. 누가 보면 강사인 줄 알겠네?"

"미스터 최가 원래 저렇게 말도 잘했어?

최기석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리드하자 몇몇 의사들이 작게 속닥거렸다.

반면 파커의 이마에 진 주름은 깊어만 갔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물론 건강에 관련된 것입니다. MHC가 흉부외과에 강점이 있는 만큼 심장 건강과 폐 건강에 대한 몇 가지 지식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최기석이 포인터기를 누르자 PPT 화면이 바뀌며 심장 이미지가 떠올랐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심장입니다. 그런데 심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그의 말에 한 남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네. 거기 멋진 콧수염을 가진 남성분. 설명해 주시겠어요?"

"심장이 움직이면서 온몸에 혈액이 공급됩니다."

"네. 맞습니다. 그럼 혹시 사람의 심장이 평생 몇 번이나 박동하는지도 아십니까?"

"평생이요? 으음……."

남자가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한 1억 번 정도?"

"기왕 인심 쓰시는 거 조금 더 쓰시죠."

최기석의 말에 청중들이 깔깔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젤리를 바르길 잘했어.'

최기석은 청중들의 반응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에 한 말은 본인이 센스를 발휘한 게 아니라 입에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사전에 젤리를 발라 놓은 게 큰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그럼 5억 번?"

"심장의 운동량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심장은 대략적으로 평생 20억 번의 박동을 합니다."

"20억 번이나요?"

"그렇습니다. 박동수는 20억 번이고 순환시키는 혈액의 량은 1억 800만 리터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심장은 인체 내에 있는 그 어떤 장기보다 역동적인 장기라고 볼 수 있죠."

최기석이 남자를 자리에 앉힌 후 말을 계속했다.

"심장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평소 심장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죠?"

"네!"

"맞습니다."

청중들이 입을 맞춰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심장 건강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귀에 딱지가 않을 정도로 들어 온 조언들이 되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됩니다.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

"가장 먼저 흡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담배를 피우냐는 원초적인 질문에 답부터 드린다면…… 바로 니코틴 때문입니다. 니코틴은 정신을 깨우며 허기를 억누릅니다. 주의력을 높이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생성하기도 하죠."

최기석은 청중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날의 검이 있기 마련입니다. 니코틴을 정기적으로 흡입할 경우 혈관이 좁아지며 나쁜 콜레스테롤이라 불리는 LDL을 증가시킵니다."

최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각종 사례를 들어 담배의 유해성을 알리고 금연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어서 음주 및 비만이 심장에 미치는 역할을 설명했다.

풍부한 감정 표현과 청중을 반응을 유도하는 강연 방식.

이로 인해 청중들은 어느새 최기석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같은 이야기라도 누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르다.

그 진리를 몸소 보여 준 것이다.

"다음 주제는 음식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놓치고 있는 부분인데 식습관만 개선해도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

"심장에 좋은 음식으로는 크게 네 가지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식물성 스테롤과 스타놀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으로 아몬드 땅콩 등의 견과류입니다. 둘째는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으로 콩이나 통곡물입니다. 식이섬유는 LDL이라는 나쁜 콜레스테롤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최기석은 심장에 좋은 음식을 추천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운동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운동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고 가볍게 조깅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일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너무 피곤합니다. 조깅하러 나가기조차 힘든데 이럴 땐 어떻게 하죠?"

한 청중이 손을 들어 물었다.

이에 최기석은 입이 움찔거리는 것을 참았다.

유머 젤리와 화술 젤리가 시키는 대로 말하면 부끄러워서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이걸 어쩐다?

하지만 고민하는 사이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럴 때는 아주 좋은 운동이 있습니다. 부부 금실까지 키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운동이죠."

"……."

"여러분. 섹스를 하세요!"

최기석이 토해 내듯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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