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끝이 없다 (4)
크루즈 스태프들을 태운 버스가 부두에 멈췄다.
최기석은 버스에서 내려 탁 트인 경치를 만끽했다. 눈앞에 넘실거리는 허드슨강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묵은 때가 싹 씻겨 내려갔다.
"저를 따라오세요."
원무과 직원이 앞장서고 그 뒤를 스태프들이 따랐다.
십여 분을 걷자 눈앞에 거대한 유람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람선 측면에는 MHC 로고와 환자 중심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진짜 환자라면 크루즈에서 관광을 즐길 수 없을 텐데……
오늘만큼은 환자 중심이라는 문구가 빛이 바래 보였다.
"와우. 유람선 진짜 좋네요."
레온이 배를 훑으며 눈을 크게 떴다.
"말이 검진이지 사실 관광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제가 알기로 크루즈 검진 비용이 3만 5천 달러(한화로 대략 3,900만 원)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맞죠?"
"네. 그쯤 될 겁니다."
최기석은 대답하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케이스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의 고급 검진은 보통 300만 원을 넘지 않는다.
미국에 비하면 열 배가량 저렴한 셈이다.
최소한 의료복지나 의료비 면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윽고 스태프들은 원무과 직원과 크루즈 구석구석을 돌았다.
크루즈는 럭셔리한 호텔 같았다.
선내 구조와 디자인 등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그렇다고 의료적인 부분에서 크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처치 도구와 약물들은 MHC의 압축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더불어 응급상황에 대비한 간이수술실까지 갖췄다.
'느낌이 안 좋은데?'
수술실을 지나친 최기석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흉통은 육감이 보내는 불길한 신호.
만약 일이 터진다면 선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기를 속으로 바랐다.
크루즈 견학이 끝나고 이른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최기석은 레온과 대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시간에 맞춰 흉부외과 진료실로 이동했다.
크루즈 검진에 첫 번째 순서는 검사 결과 확인이다.
오늘 승선하는 인원들은 사전에 MHC에서 필요한 검사를 마쳤다.
배 안에서는 단지 결과를 들을 뿐이었다.
"잘 부탁해요. 닥터 최."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최기석은 진료를 도와줄 실비아와 인사를 나눴다.
청진기를 비롯해 필요한 도구를 살피던 중 창밖을 바라보았다. 환자, 아니 고객들이 차례대로 유람선에 오르고 있었다.
크루즈 검진 시작까지 한 시간이 남은 시점.
'슬슬 준비를 해야지?'
최기석이 뚜두둑 목을 꺾었다.
지금부터 파커가 부탁한 강연을 준비해야 한다.
엿 먹으라는 식에 깜짝 제안이었지만 일부러 거절하지 않았다. 강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파커가 똥 씹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었기에.
최기석은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꿈인가? 아닌가? 몽롱한 느낌이야. 그대가 날 좋아한대. 어떡해. 정말인가 봐~뚜벅. 뚜벅. 조명 아래 우리 둘.
방긋방긋, 내 입가엔 미소 가득.
사뿐사뿐. 발걸음을 맞춰 봐.
정말인가 봐. 애인이 된 건가 봐.]
낯선 컬러링에 고개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동안 이 녀석은 컬러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상큼한 걸그룹 목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취향이 바뀌었나 싶었다.
[네, 선배.]
"오랜만이다. 통화 괜찮지?"
[당연하죠. 선배 전화라면 수술 중이라도 받아야죠.]
이영호의 너스레에 최기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너 컬러링, 뭐야? 안 어울리게."
[아…… 제가 요즘 걸그룹에 입덕했거든요. 러블리 걸즈라는 그룹인데 멤버 다 매력이 터진다니까요. 선배도 노래 들으면 깜빡 죽을 거예요.]
"……네가 치프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구나. 그래. 이해한다."
[헤헤. 그런 것도 없지 않죠. 그런데 웬일이세요?]
"부탁 좀 하려고. 혹시 일반인 대상으로 한 건강관리 PPT 자료 있어? 지금 당장 필요해."
[당연히 있죠. 얼마 전 과장님이 심질환 환자 대상으로 강연한 자료 있는데, 그거 제가 만들었어요.]
"오케이. 그럼 빨리 보내 주라."
[흠흠. 자료를 보내 드리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러블리 걸즈에 '우리, 지금'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세요.]
"너 지금 나랑 흥정하니?"
[노…… 농담이에요. 선배. 제가 선배랑 흥정할 짬밥이 아니잖아요. 노래가 워낙 좋으니까 들어 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알았다. 인마. 들어 볼게."
[감사합니다. 자료는 바로 보내 드릴게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모양인지 이영호가 총알처럼 메일을 보냈다.
얼마 후 자료를 훑는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료는 깔끔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내용만 영어로 고치고 몇 가지 멘트만 준비하면 강연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 듯싶었다.
타다다다닥.
빛의 속도로 타이핑을 마친 최기석은 곧바로 상태창을 띄웠다.
강연을 성공시키기 위한 필살의 한 수가 남았다.
이 방법이라면 카터의 콧대를 단번에 꺾어 버릴 수 있으리라.
상태창으로 사전작업을 끝내자 유람선이 서서히 움직였다.
MHC 크루즈 검진의 막이 오른 것이다.
여유를 찾은 최기석은 갑판으로 올라가 바깥바람을 쐬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유람선이 강을 가르며 들려오는 물소리들.
마치 이 세상 평화가 유람선에 다 모인 듯했다.
그런데 평화를 만끽하던 그의 입가에 문득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왜일까.
이 모든 게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건.
* * *
부두를 떠난 유람선이 시원하게 강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찾아온 본격적인 진료시간.
최기석은 가운과 옷을 매만지고 진료실에 자리 잡았다.
똑. 똑. 똑.
"선생님. 환자분 들어갑니다."
간호사의 말과 함께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반바지와 셔츠를 간단하게 걸친 모습은 동네 아저씨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크루즈 검진을 할 정도라면 재산이 넉넉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부자는 화려한 옷차림을 선호한다.
그 말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님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이크 씨. 거기 앉으세요."
"네. 안녕하세요."
제이크가 자리에 앉아 인사를 받았고 최기석은 그의 차트를 훑으며 운을 뗐다.
"심전도 검사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심장도 건강해 보이네요."
"다행이군요. 요새 가슴이 조금 뻐근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담배를 많이 피우시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아셨죠?"
제이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 기능 검사 수치가 좋지 않습니다. 호기량도 평균보다 한참 떨어지고 반대로 호흡 후 폐에 남아 있는 공기량은 많습니다. 폐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는 소리죠."
"……."
"담배는 하루에 얼마나 피우시죠?"
"한 갑 반 정도 핍니다. 담배를 피운 지는 거의 20년이 넘었고요."
"흐음…… 빨리 걷기만 해도 숨이 금방 차겠네요. 뻔한 이야기지만 담배를 끊는 게 가장 좋습니다. 혹시 그게 불가능하다면 흡연량을 줄이는 것도 도움이 될……."
"콜록. 콜록."
제이크의 기침소리에 최기석의 말이 잘렸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 요즘 마른기침이 너무 심합니다. 혹시 다른 병에 걸린 건 아닙니까?"
"폐 기능이 떨어졌지만 현재로썬 질환은 없습니다."
최기석은 제이크의 흉부 CT 검사를 살피고 히포크라테스의 눈까지 사용했다.
검사결과는 별문제 없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에도 진단명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제이크가 말한 것처럼 증상 부분에 기침이 있었다.
"마른기침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수도 있고 미세먼지나 꽃가루의 영향이 있을 수도 있죠. 그게 아니면 천식이나 역류성 식도염 같은 질환의 문제일 수도 있죠. 제이크의 경우에는……."
"저 같은 경우에는요?"
"역시 폐 기능이 떨어진 게 주된 원인으로 보입니다."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대로 담배를 줄이시고 무말랭이차를 한번 드셔 보세요."
"무말랭이차요?"
"제가 자란 한국에서 겨울 무는 인삼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가 그만큼 영양가가 많다는 뜻인데요. 무를 말릴 경우 건조되는 과정에서 영양분이 몇 십 배로 증가합니다."
"……."
"말린 무를 뜨거운 물에 우려서 먹으면 기관지 점막이 강화되고 니코틴 같은 독소를 배출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꾸준히 챙겨 드시면 분명 증상이 나을 겁니다."
"몰랐군요. 말린 무가 그렇게 효능이 좋을 줄은……. 하여간 선생님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네. 남은 검진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이크가 떠난 후 곧바로 한 쌍의 커플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손을 꼭 잡고 자리에 앉는 모습이 잉꼬처럼 다정해 보였다.
최기석은 커플과 인사를 나누고 검사 결과를 살폈다.
"두 분 다 건강에는 이상 없습니다. 심장도 폐도 건강합니다. 검사 결과 전부 정상입니다."
"휴우…… 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거 봐. 내가 별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저스틴이 린지의 볼을 꼬집으며 미소 지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이 검진을 받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최기석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저스틴과 린지는 각각 30세와 28세다.
이런 고액 종합검진을 받기에는 다소 나이가 어렸다.
"말해도 상관없지?"
저스틴의 시선을 받은 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결혼 전 서로의 건강을 체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크루즈 진료를 신청했어요."
"아…… 결혼하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 피앙세랑 꽃길만 걸어야죠."
"이 사람 봐. 선생님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어때? 내 사랑에는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아."
저스틴의 멘트로 최기석의 팔에 닭살이 돋았다.
이렇게 느끼한 멘트를 진료 중에 들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아이는 정말 하나만 낳을 거야?"
"바보같이.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는데!"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싶단 말이야. 선생님. 아이들 정서에도 그게 좋지 않을까요?"
"아…… 그게……."
최기석은 저스틴의 말에 확답을 줄 수 없었다.
곁에 있는 린지의 눈초리가 너무 매서웠다.
"자녀 계획은 두 분이서 상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껴들 영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쩝.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진료 잘 받았습니다. 수고하세요."
떠나는 저스틴과 린지를 보며 최기석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정설화와 저렇게 깨가 쏟아지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어진 진료는 무난했다.
환자들 대부분이 증상은 있지만 진단명이 없는 상태였다.
크루즈 검진을 받을 만큼 재력이 있으니 평소 건강관리도 소홀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태프의 1차 진료가 끝났다.
최기석은 그길로 진료실을 벗어나 2층에 있는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연회장에 있는 육십여 명의 고객들은 각자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스태프들이 쫙 깔렸다.
모두 최기석의 강연을 듣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최기석은 PPT 자료와 필요한 멘트를 되새김질하고 단상에 올랐다.
고객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띄운 상태창의 아이템 항목.
그곳에는 젤리를 바른 아이템들이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안경: 젤리(레어): 매력+10]
[의사가운: 젤리(유니크): 화술+15]
[바지: 젤리(레전드): 유머+20]
[구두: 젤리(레어): 화술+10]
'좋아.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
최기석은 속으로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MHC 크루즈 검진에 참여한 신사 여러분, 반갑습니다. 흉부외과 전공수련 중인 기석 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