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끝이 없다 (3)
그날 오후.
최기석은 의국 의자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야사다와 대화를 나눈 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그렇게 만만하진 않단 말이지?'
속으로 되뇌며 눈썹을 찌푸렸다.
트리플 보드.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한 밟아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먼 훗날 트리플 보드가 아닌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야사다의 말에 따르면 트리플 보드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흉부외과 역사상 트리플 보드를 딴 의사가 한 명뿐이라니…….
어쩌면 새로운 능력을 믿고 장밋빛 미래만 그렸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생각이 깊어지는 가운데 한 남자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올리버.
야사다에게 가르침을 내린, 흉부외과 분야의 트리플 보드를 최초로 따낸 유일한 인물.
만나 보고 싶었다.
만나게 된다면 트리플 보드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얻으리라.
'휴가 때 시간을 빼야겠다.'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살폈다.
의국은 텅 비었다.
동기들은 각각 수술 스크럽과 응급실 환자 진료로 자리를 비웠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가장 바쁜 시간대라서 의국을 찾을 사람도 없을 듯했다.
그는 상태창을 열고 트레이닝 룸에 접속했다. 그리고 연습 모드 동영상으로 김두진과의 레슨을 골랐다.
휘이이이잉.
광채가 뿜어지면서 변해 가는 시야.
이윽고 최기석은 김두진의 방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정설화에게 이벤트를 해 주기 위해 피아노를 배운 지 어언 이 주가 지났다.
그동안 최소 하루에 한 번은 연주 연습을 했다.
띠리리리링.
건반을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아직 젖내 나는 초보지만 피아노의 매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건반을 지그시 누를 때 전해지는 손가락의 감촉.
곡과 연주법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하고 풍부한 멜로디.
스스로를 잊고 곡과 하나 되는 몰입감.
연주는 수술과는 다른 헤어 나올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시작해볼까?'
최기석은 다 외운 악보를 허공에 그리며 건반을 두드렸다.
따라라란~
도입부는 무난했다.
음계는 평범했으며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자신감을 가지고 연주에 박차를 가하던 중 첫 번째 난코스를 만났다.
멜로디 변화가 심하며 코드 변경이 잦은 구간이다
최기석은 김두진에게 사사받은 징검다리 연주법과 양손잡이 스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난코스를 넘었다.
도중에 손가락이 미끄러졌다면 괴음이 껴들었으리라.
계속되는 연주.
그의 입술은 바짝 마르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건반을 두드리는 내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써전이 수술 중 실수를 하면 환자가 위태로운 것처럼, 연주 중에 실수를 하면 듣는 이의 감정이입이 깨진다.
한 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셈이다.
정설화가 자신의 연주에 흠뻑 빠져서 감동 받기를 원했기에.
[연주 종료되어 동영상을 종료합니다. 연주 종합 랭크는 C-입니다.]
알림이 울리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최기석은 한숨 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곡의 맛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중간에 실수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드르르르륵.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혼자 있나?"
"아…… 네. 교수님께서 웬일로 의국에……."
"왜, 난 오면 안 되나?"
벤슨이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어지는 철근 같은 침묵.
폐동맥 협착증을 앓았던 제이미 문제로 정면충돌했던 두 사람이다.
서로가 껄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했다.
"팀 CPR 활동은 잘하고 있나?"
"네. 아직까지는 별 탈 없습니다. 카타리나 교수님도 잘 지도해 주시고 팀원 간 단합도 좋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미스터 왕이 나가서 분위기가 뒤숭숭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대타로 온 미구엘은 어떤가?"
"미구엘도 잘하고 있습니다."
최기석은 속내와는 달리 미구엘을 치켜세웠다.
다른 팀 교수 앞에서 윗사람 흉보는 건 제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미구엘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함정일지 모르고.
"구체적으로 어떤 식이지?"
"환자를 대하는 태도나 그밖에 처치 등을 아주 꼼꼼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
벤슨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팀 하트비트는 어떠십니까?"
"우리 팀원들은 실력과 인성을 두루 갖춘 드문 인재지. 조금만 지나면 레지던트 팀 중에서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낼 거야."
고슴도치도 제 자식 자랑한다고 벤슨이 본인 팀원들을 띄워 주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병원에 동양인 의사가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흉부외과 전 헤드 치프가 닥터 송이었고 현재는 닥터 야사다야.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닥터 권까지 수석교수로 들어왔지. 흉부외과에 필요 이상으로 동양인 의사들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
벤슨의 눈에 도발적인 기색이 어렸다.
'넌 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건데'라는 뉘앙스가 역력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단순히 교수님의 생각 아닙니까? MHC의 여론이라고 믿기는 힘들군요."
"……."
"환자를 돌보는 데 중요한 건 인종이 아니라 실력입니다. MHC 핵심가치인 환자 중심, 이것을 가장 잘 지켜 줄 인물이 요직을 맡는 게 당연하고요. 혹시 교수님께서는 동양인이 본인보다 직위가 높아서 배가 아프십니까?"
"자네. 지금 날 능욕하는 건가? 내가 동양인 의사들을 배 아파한다고?"
벤슨이 언성을 높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며 두 팔은 부들부들 떨렸다.
"교수님께서도 저와 다른 동양인 의사들을 능욕하셨습니다. MHC에 동양인 의사가 너무 많다는 말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발언 아닙니까?"
"……."
"그리고 동양인 의사가 많다고 했지만 병원의 절대 다수는 백인입니다. 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시죠?"
최기석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쏘아붙일 때는 쏘아붙여야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모욕했다면 거기에 대한 적절한 응징이 있어야한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인생을 얻으며 생긴 가치관 중 하나였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 게 요즘 세상이다.
"재수 없는 말투는 여전하군. 하지만 말이야 자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내 밑에서 기게 될 거야. 추락하는 데는 날개가 없거든."
"전 고작 레지던트에 불과합니다. 추락한다고 한들 교수님만큼 잃을 게 많지는 않습니다."
"크크크큭. 그러니까 내 걱정이나 하란 말이지? 당돌한 녀석."
벤슨의 눈동자에 독기가 어렸다.
"좋아. 두고 보자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가 될지."
의국을 떠나는 벤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최기석은 콧방귀를 끼었다.
두고 보자는 인간치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
로켓x 같은 자식이 까불기는…….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백팩을 메고 MHC 건물을 나왔다.
"아우."
반갑게 쏟아지는 태양빛을 이기지 못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시간에 건물 밖으로 나온 게 얼마만인가.
그런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주차장으로 이동하자 MHC 로고가 새겨진 대형 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크루즈 관광 의료 스태프가 이용하는 전용 버스였다.
버스 근처에는 먼저 온 스태프들이 옹기종기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 기타 보조 인력이 합쳐진 인원은 대략 60명 가까이 되었다.
최기석은 대열에 합류해서 아는 얼굴이 있는지 살폈다.
"레온!"
"미스터 최!"
최기석과 레온이 서로를 알아보고 살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레온과는 과거 메이죠 클리닉 신경외과 수련 중 인연을 맺었다.
그는 과잉기억 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수술 중 사용된 처치도구의 숫자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레온이 MHC에는 어쩐 일이에요?"
"어제 부로 MHC 신경외과로 발령받았어요. MHC는 흉부외과 이외의 파트는 다소 약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과 강화 차원에서 특별파견 됐어요."
"그랬구나. 하여간 정말 반가워요."
"동감이에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함박웃음을 나누었다.
레온과 밀린 안부를 나누는데 저 멀리서 양복을 차려 입은 인물들이 다가왔다.
그중에는 낯익은, 그러나 보고 싶지 않은 얼굴도 껴 있었다.
"다들 모였습니까?"
한 남자가 스태프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 온 스태프들을 위해 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버스를 타고 허드슨 강에 정박한 유람선에 승선합니다. 이후에는 유람선을 둘러보고 간단하게 식사를 합니다."
"……."
"고객들이 승선하고 배가 출발하면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됩니다. 진료 스케줄은 크게 저녁 식전과 식후로 나뉩니다."
남자의 설명에 스태프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크루즈 파견이 로테이션인 만큼 대부분 크루즈 진료 초짜였다.
잠시 후 설명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닥터 최는 잠깐 이쪽으로 와주세요."
원무과 직원의 호출에 최기석과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출발 전 호출은 의외다.
"저 잠깐 가 볼게요."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무과 직원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죠?"
"그게…… 부병원장님께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파커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랬다.
아까 발견한 낯익은, 그러나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은 바로 파커였다.
"안녕하십니까? 부병원장님."
"그래. 잘 왔어. 크루즈 진료는 오늘이 처음이지?"
"네."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오늘 크루즈 진료에 부병원장님도 함께하시는 겁니까? 부병원장님이 직접 나섰던 경우는 없는 걸로 아는데……."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있거든."
파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손님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할 필요가 있지."
"VVIP급은 되는가 보군요."
"미스터 최는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그럼 이야기 끌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파커가 손을 깍지 끼며 운을 뗐다.
"오늘은 저번 크루즈와 달리 특별한 스케줄을 넣을까 해. 크루즈 검진에 격을 높인다고 할까?"
"……."
"미스터 최가 저녁 식사 후 강연을 하나 해 줬으면 좋겠군."
"강연이요?"
최기석이 놀라서 몸을 들썩였다.
"놀랄 것 없어. 심장질환이나 관상동맥 우회술 같은 전문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니까. 심장이나 폐 건강을 위해서 지켜야 하는 식습관이나 운동법 같은 걸 발표하면 돼."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는 다른 분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혹시 사전에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모르겠지만……."
"아니. 이건 자네가 해야 할 일이야."
파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누가 뭐래도 MHC의 스타라고. 알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코드 블랙 동영상은 이미 천만 조회수를 찍었어."
"……."
"강연은 스타가 하는 게 맞아."
"일찌감치 저를 낙점하셨다면 왜 미리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점은 미안하게 됐어. 요새 바쁜 일이 워낙 쌓여서 말이야."
파커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최기석은 그 모습에서 파커의 불시통보가 계획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각종 이슈를 해결하고 인지도가 올라간 자신이 강연을 망친다면 어떻게 될까.
평판이 깎일 것은 당연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미스터 최라면 잘할 거야."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저는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파커와 대화를 마친 후 버스 복도를 걸었다.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