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7)
그날 저녁 1층 카페.
최기석은 비비안과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많이 놀랐지?"
"……네."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놓인 허브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자식이 나쁜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덫을 쳤던 건데 보기 좋게 걸려들었네."
최기석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종료된 듯 보였음에도 임무가 끝나지 않은 것이 미심쩍었다.
그래서 가능한 최악의 상황들을 떠올렸다.
그러던 중 떠올린 게 바로 페인이 병실에 찾아와 난동을 피우는 일이었다. 비비안에게는 문제가 없으니 다른 식의 문제가 생길 거라 판단했는데 그것이 딱 맞아떨어졌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은 비비안에게 토끼 간호사를 사용하고 격려까지 걸어 주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것만큼 두렵고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버프와 디버프 해제 스킬이 필수다.
"비비안. 그동안 고생 많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네 삶은 달라질 거야. 널 괴롭히던 페인은 이제 없어. 마음먹기에 따라 네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감사해요. 선생님."
비비안이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전 계속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 쓰레기 자식에게 목숨을……."
"괜찮아. 힘들게 말할 필요 없어."
"서…… 선생님."
최기석은 흐느껴 우는 비비안의 옆자리로 이동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녀가 그동안 겪었던 고통과 서러움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만약 병원을 떠나도 선생님이 계속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마.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자. 이제 울음 뚝!"
최기석은 비비안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를 병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띠링!
[특별임무, 말하지 못한 것들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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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을 확인한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워낙 크고 위험한 사건을 넘겨서 그럴까.
보상을 얻은 기쁨보다 일을 잘 끝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의국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인수인계는 막 끝났고 며칠 뒤로 다가온 팀 과제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 어제 오프였잖아요."
엠마가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낮에 그린 교수님이 승모판막 치환술 집도하는 거 참관했어요."
"어땠어요? 어렵죠?"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중간에 색전증이 발생하면서 CPR까지 하던데. 돌발상황이 의외로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하긴 환자 나이도 있으니까."
찰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회의 시작할 때까지 여유 있으니까 수술 과정이나 한 번씩 확인해 보죠."
"좋아요."
"그럼 수술 설명은 집도의께서 해 주시죠."
"말은 네가 꺼내고 수습은 내가 하냐?"
"어허. 우리 팀 집도의께서 너무 까칠한데?"
찰스의 농담에 엠마가 배꼽 잡으며 웃었고 그런 그녀를 보며 최기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엠마는 메이죠에 있을 때보다 성격이 밝아졌다.
각개 약진하던 메이죠와 MHC에서는 달리 믿고 기댈 수 있는 동료들이 생겼다.
아마 그 점이 그녀를 결정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으리라.
"뭐. 다들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최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승모판막 치환술은 CABG처럼 체외순환(인공심폐기를 사용하는 상황)상태에서 시행된다.
우선 좌심방을 절개하여 승모판막을 노출시키고 승모판막의 엽을 제거한다.
사전작업이 끝나면 치환할 인공판막을 판막틀에 고정시킨 후 좌심방을 다시 봉합하면 끝이다.
과정은 단순하지만 처치 도중에는 집도의의 섬세한 솜씨와 스태프들의 보조가 필요하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안심하면 안 돼요. 수술만큼 수술 후 관리도 중요해요. 잘못하면 후유증으로 좌심실 파열이나 삼첨판 폐쇄부전증이 올 수 있어요."
"미스터 최. 너무 겁주는 거 아니에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엠마의 말에 최기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이 그날이네."
찰스가 기지개를 켜며 화제를 돌렸다.
"무슨 날?"
"평화의 날이자 네가 크루즈 관광에 파견 가는 날이지."
"아. 난 또 뭐라고."
오늘 오후 최기석은 흉부외과 대표로 크루즈 의료관광 파견에 나선다. 파견일정은 1박 2일로 검진은 오늘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내일 오전 11시에 끝난다.
"엠마. 크루즈 관광은 어때요?"
"잠깐 쉬고 온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사전에 MHC에서 시행한 심전도나 흉부 엑스레이 결과 확인하면서 건강에 대한 팁을 알려 주면 되니까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특별한 건 없네요."
"그럴 수밖에요. 유람선 위에서 할 수 있는 검사나 처치는 한계가 있으니까."
드르르륵.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미구엘이 의국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다들 좋은 아침."
인사를 받은 미구엘이 엠마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엠마는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네?"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까지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뿐인데."
미구엘의 시선이 최기석과 찰스를 향했다.
엠마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찰스. 요즘 병원 생활 어때?"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맡고 있는 환자들 경과도 다 좋은 편이고 얼마 전에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칭찬 카드도 받았습……."
"그러니까 네가 발전이 없는 거야."
미구엘이 찰스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지금 EOB 평가 기간인 거 몰라? 칭찬 카드 하나 받은 걸로 우쭐댈 게 아니라고. 여기 있는 엠마는 벌써 칭찬 카드를 다섯 개나 받았는데?"
"그건 제가 운이 좋아서……."
"엠마는 가만히 있어 봐. 찰스, 네 말이 틀려? 지금 칭찬 카드 하나 받은 걸로 시시덕거릴 때냐고?"
"……아닙니다."
"근데 왜 별것도 아닌 걸로 자랑스러워하는 거야. 모름지기 의사는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법이야. 엠마처럼 말이야."
"선생님. 자꾸 이러시면 제가……."
"어허. 엠마는 가만히 있으라니까."
미구엘이 엠마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찰스. 봉합 숙제는 다 끝냈어?"
"네. 다했습니다."
"가져와 봐."
그의 지시에 찰스가 봉합 모형을 꺼내서 건넸다.
"지금 이걸 봉합이라고 했어? 사람을 꿰맨 것도 아니고 모형을 꿰맨 거잖아. 이 실력으로 메스나 제대로 잡겠니?"
이어지는 잔소리에 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더불어 의국의 분위기는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위태로워졌다.
말은 안했지만 최기석과 엠마는 알았다. 미구엘이 찰스에게 괜히 시비를 걸고 있음을.
찰스의 모형 봉합은 흠잡을 곳이 없었기에.
"뭘 그렇게 부들부들대. 내가 너한테 못할 말이라도 했냐?"
"아닙니다."
"네 인생도 참 답답하다. 할 말이라고는
'아닙니다.'
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이윽고 미구엘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향했다.
최기석을 갈굴 만한 건덕지는 별로 없었던 걸까.
미구엘은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미스터 최. 우리 의사 맞지?"
"네. 맞습니다."
"의사의 기본은 청결 아니냐? 의국 청소도 좀 하면서 살자. 여기가 의국인지 돼지우리인지 구별을 못하겠다."
미구엘이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모니터에 먼지는 묻어 있지 않았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의국은 하루에 반드시 세 번씩 청소해. 유치하게 당번까지 정해 줄 필요는 없겠지?"
"네."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왜?"
"의사의 기본은 청결 아닙니까?"
최기석의 질문에 미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에서 시비를 거는 티가 팍팍 느껴졌다.
"방금 내가 한 말이잖아."
"맞습니다만…… 선생님은 선생님 본인의 이야기를 잘 못 지키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선생님 가운을 보십시오. 옷 곳곳이 누렇게 뜬 게 꼭 고름칠을 한 것 같습니다. 가운 세탁도 하면서 생활하는 게 어떨까요? 선생님이 의사인지, 거지인지 구별을 못하겠습니다."
최기석의 팩트 폭격에 찰스와 엠마가 손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막았다.
확실히 미구엘의 가운은 꼬질꼬질했다.
"너 돌았어? 그걸 말이라고 해?"
"다 선생님이 제게 하신 이야기입니다만…….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군요."
"이 자식이……."
미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거렸다.
당장이라도 주먹다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 갑자기 누군가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다들 뭐해?"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카타리나의 등장으로 팽팽하던 대립이 끝났다.
미구엘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팀원들과 조별 수술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하긴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하긴 할 거야. 잠깐 나 좀 볼까?"
"물론입니다."
최기석은 의국을 떠나는 미구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방금 전 불편한 가시 디버프를 사용해서 그에게 3중첩을 쌓았다.
겉으로는 태연해도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으리라.
"아. 저 인간, 진짜 짜증 나네."
찰스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트집 잡을 걸 잡아야지. 이 정도 봉합이면 잘한 거 아니야?"
"잘했어. 나도 이 이상은 못해."
최기석이 봉합 모형을 훑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욕먹은 것 같아서."
"엠마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엠마가 저보다 환자에게 상냥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괜히 비교를 당해서……."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최기석이 운을 뗐다.
"저 인간, 오늘은 새로운 수법을 썼네."
"새로운 수법?"
"원래는 환자나 태도 같은 걸로 트집을 잡았는데 오늘은 이간질을 했잖아. 너랑 엠마 사이를 서로 불편하게 만들려고 의도한 거라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찰스가 턱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우리 팀에 들어온 의도가 수상해. 뒤에 누군가 있지 않고서는……."
"배후가 있다는 소리야?"
"추측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 저 인간이 MHC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우리들 짜증 나게 하는 거랑 이간질밖에 없으니까."
최기석은 대답과 동시에 찰스에게 토끼 간호사를 사용했다.
휘이이이잉.
그의 몸에서 뿜어진 광채가 찰스를 휘감았다.
그러자 찰스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확인차 상태창을 살피니 불편한 가시 디버프 중첩이 0으로 변했다.
'엿 먹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라고.'
미구엘의 간섭이 번거롭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동료들에게 걸린 디버프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었다.
반면 자신이 미구엘에게 건 디버프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피를 보는 쪽이 어느 쪽인지는 분명했다.
결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관차처럼 변하지 않으리.
동료들과 대화를 끝낸 최기석은 오전 회의와 오전 회진에 참석하고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은 야사다와 폐암 수술을 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