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5)
"너 이 자식. 지금 나한테 개기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이걸 개긴다고 표현하시면 더 할 말이 없군요."
최기석이 쐐기를 박자 대화가 중단됐다.
휴게실에 흐르는 폭풍전야의 고요.
미구엘은 입을 다문 채 그에게 불꽃 튀는 시선을 보냈다.
주먹이 꿈틀거리는 걸 보면 당장 한 대 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최기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것도 일종의 기 싸움.
미구엘에게 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쿵!
미구엘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야. 처치 좀 한다고 설치는 모양인데. 네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으름장을 놓고 사라지는 미구엘.
최기석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휴게실에서 나눈 대화로 그에게 불편한 가시 디버프 2중첩을 선물했다. 가능하다면 본인 디 버프에 본인이 걸린 심정이 어떠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네 맘대로는 안 돼. 나도, 우리 팀원도 손끝 하나 못 건드려.'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닥터 최. 오랜만이에요."
상대방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 * *
'하아…… 저 새끼는 대체 뭐지?'
미구엘은 복도를 걷던 중 뒤돌아서 휴게실을 바라보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최기석은 자신에게 쥐 잡힌 듯 잡혀서 꼼짝도 하지 못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의 갈굼을 견뎌 낸 레지던트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기에.
더욱 기분 나쁜 것은 최기석에게 역공을 맞은 일이다.
최기석은 오히려 처치실에 있었던 자신의 행동들을 꼬집으며 화살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미구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 젠장, 기분 더럽네.'
미구엘은 씩씩거리다가 분을 이기지 못해 복도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어머! 깜짝이야!"
"서…… 선생님. 왜 그러세요?"
그와 가까이 있던 간호사들이 화들짝 몸을 들썩였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요."
"별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미구엘은 괜히 간호사들에게 화풀이하고 벤슨의 집무실을 찾았다.
벤슨은 MHC의 소아심장외과 교수로 얼마 전 페동맥 협착증 수술을 거절해서 도마 위에 올랐다.
똑. 똑. 똑.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왔나?"
"네, 교수님."
미구엘은 벤슨의 맞은편에 앉아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 더 일찍 찾아뵀어야 했는데……. 교수님 수술 스케줄도 바쁘셨던 데다가 제 일도 겹쳐서……."
"됐어. 그건 그렇고 팀 CPR 분위기는 어때?"
"다른 팀에 비해 팀원 간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팀 수술 준비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고 카타리나 교수님의 지도도 훌륭합니다."
"귀찮게 됐군."
벤슨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가 자네를 MHC로 부른 이유,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교수님의 은혜를 잊겠습니까?"
"알면 앞으로 잘하라고. 자네 역할에 충실하란 말이야."
"네!"
미구엘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본래 그는 캘리포니아 브랜치에서 말썽꾸러기 같은 존재였다.
후배들에게 지나친 군기를 내세워서, 그로 인해 많은 후배들이 병원을 떠났다.
이 일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권고퇴직을 받기 직전.
벤슨이 그를 MHC로 호출했다.
최기석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팀 CPR을 분해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방금 전 태아 풍선확장술은 어땠나?"
"중반까지는 무난했지만 끝나갈 무렵 산모에게 패혈성 쇼크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벤슨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눈을 치켜떴다.
"더 자세하게 말해 봐."
"풍선확장술과 산모 CPR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도중에 산부인과 써전들이 와서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했고요. 처치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허…… 김빠지는 소리군. 미스터 최, 그 얄미운 녀석이 된통 당했어야하는데 말이야."
"벤슨 과장님도 미스터 최를 싫어하십니까?"
"나도 싫어하고 내 위에 있는 분도 싫어하지. 그 인간은 MHC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야."
"그렇군요."
"그러니 자네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겠지? 캘리포니아 브랜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팀 CPR 인원도 들들 볶으라고. 당장이라도 가운을 벗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 봐."
벤슨의 손짓에 미구엘은 집무실을 떠났다.
그렇게 흉부외과 병동으로 복귀하는데 뱃속 깊은 곳에서 짜증이 밀려왔다. 휴게실에서 최기석과 나눴던 대화가 또다시 머릿속에 맴돌았다.
"건방진 자식. 한 번 해보자."
* * *
"오랜만이에요, 메이."
최기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메이와는 과거 코드 블랙이 터졌을 때 인연을 맺었다.
병동간호사가 힘들다고 한 그녀에게 수술실 간호사를 추천했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여전하네요. 트러블 메이커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니까요."
맞은편에 앉은 메이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뜻이죠?"
"저 다 봤어요. 선생님이 태아 풍선확장술 하는 거요. 제가 소독간호사였거든요."
"메이가요?"
"네. 소독간호사로 보직 변경한 지 거의 2주가 지났어요. 참고로 저번에 폐동맥 협착증 수술 보조한 것도 저였어요. 두건하고 마스크 쓰니까 완전 못 알아보시던데요?"
"아……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진짜 너무해요."
메이가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칫. 이렇게 예쁜 저를 어떻게 못 알아보실 수 있죠?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보던데."
"……."
그녀의 자화자찬에 최기석은 말문을 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엉뚱한 대화법은 여전했다.
"수술실 업무는 어때요?"
"네. 이제 제 적성을 찾은 느낌이에요. 병동간호사는 선배 간호사랑 환자 눈치를 봐야 하는데 수술실 간호사는 그런 게 적더라고요."
"……."
"수술 도구와 수술 과정만 잘 외우면 되니까 한결 편해요."
"그나저나 대단한 걸요?"
"뭐가요?"
"수술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됐는데 폐동맥 수술하고 태아 풍선확장술 보조로 들어갔잖아요. 제가 알기로 수술실 적응하는데 몇 개월은 필요한 걸로 아는데."
"후후후. 사실 전 평범한 간호사가 아니랍니다."
"혹시 메이는 슈퍼 너스인가요?"
"슈퍼보다 원더가 더 마음에 드네요. 앞으로 제 별명은 원더 너스로 해 주세요."
"원한다면요."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퍼즐과 같다.
각 개인에게는 잘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으며 이것을 파악하고 제 위치에서 일한다면 조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다. 반면 이것이 제대로 안 된다면 고통을 받는다.
직소 퍼즐에서 퍼즐 조각의 위치가 원래와 다르다고 생각해 보자.
조각은 제 몸에 맞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려고 애쓰다가 결국 망가지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메이는 제 위치를 찾았다.
특별한 사건이 없다면 전처럼 좋아하는 간호사 일을 포기하겠다고 하지 않으리라.
"고마워요, 닥터 최. 덕분에 제 자리를 찾았어요. 조금 더 일찍 만나서 감사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제가 뭘요. 메이가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린 덕분이죠. 보통 사람이었다면 메이처럼 다른 파트로 이동하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가진 걸 버리는 것 같아서 두려웠을 테니까요."
"헤헤. 그것도 그렇죠?"
"앞으로 수술실에서 만나면 잘 부탁해요. 원더 너스답게 척척. 무슨 뜻인지 알죠?"
"저만 믿으세요."
메이가 걱정 말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최기석은 메이와 대화를 마치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갔다.
일과 종료까지 스크럽 일정은 없었다.
처방 입력하고 몇몇 환자만 케어해 주면 끝이다.
타다다다닥.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컴퓨터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메일을 확인하는 최기석의 눈이 점점 커졌다.
드디어 왔다!
샬롯의 메일이.
샬롯은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괴짜이자 천재 의사로 의진대 심포지엄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성향이 환자 중심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스승의 신수술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다.
딸칵!
최기석은 부푼 가슴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미스터 최. 오랜만이에요. 한국에서 처음 만난 후 미스터 최가 말한 수술법에 대해 고민해 봤어요. 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
.
.
[한참동안 끙끙 앓다가 수술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수술법을 발견했어요. 미스터 최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수술법 확인하고서 미진하거나 개선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연락 주세요. 미스터 최가 심근병증과 수술비로 고통 받는 환자들의 빛이 되기를 기원하는 샬롯이 보냄.]
샬롯의 메시지를 읽고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생전 처음 본 써전이 개발하는 수술법을 같이 고민해 주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배려 깊은 배려에 신수술을 완성해야겠다는 각오가 더욱 뜨거워졌다.
딸칵!
마우스를 클릭하자 첨부파일이 열렸다.
파일에는 다양한 심장 이미지와 더불어 구체적인 수술법이 적혀 있었다.
수술법을 확인하는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확실히…….'
최기석은 샬롯이 수정한 수술법을 다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수술법이 정공법이라면 샬롯의 수술법에는 변칙적인 기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절개법이나 봉합법, 그리고 이식 방법 등에서 제법 차이를 드러냈다.
확실한 건 샬롯의 수술법이 더 간편하며 시간절약에 용이하다는 점이다.
기존 수술대로 하면 인공심폐기를 반나절 가까이 돌려야한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가 끌어안아야 하고 말이다.
최기석은 수술 과정을 달달 외우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과가 끝났다.
인수인계까지 마치면서 자유시간이 찾아왔다.
"나 먼저 일어날 게."
"네가 칼퇴근이라니…… 이게 웬일이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찰스가 최기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어. 네가 바빠서 못 본 거고. 그럼 기숙사에서 보자."
최기석은 어리둥절해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기숙사로 이동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상태창을 띄웠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셨습니다. 수술 동영상으로 송명진의 신수술을 선택하셨습니다. 보조하는 스태프들의 수준을 상으로 설정하셨습니다.]
[트레이닝 룸을 실시합니다. 트레이닝 룸 입장 가능 횟수(3/5)]
휘이이이잉.
눈부신 광채가 시야를 뒤덮었다.
이윽고 최기석은 수술복을 입은 채 수술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든든한 가상의 스태프가 자리 잡았다.
"휴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허상이지만 이 환자를 무사히 치료할 수 있다면 현실의 환자들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심장이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돈이 없어서 수술을 꿈꿀 수 없는 환자들이 새 삶을 꿈꿀 수 있었다.
환자를 위해서.
스승을 위해서.
샬롯을 위해서.
신수술은 반드시 완성되어야만 한다.
"지금부터 확장성 심근병증에 대한 신수술을 시작한다."
그의 나지막한 외침이 로젯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