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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07화 (306/407)

챌린지 (3)

"……."

최기석의 말에 비비안이 시선을 피했다.

입 밖으로 내는 거절보다 더 큰 거절, 아예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최기석은 침묵하는 비비안을 보며 더욱 확신을 가졌다.

지금 비비안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혹시 그것은 미움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미움을 산 이유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최기석이 토끼 간호사를 사용했다.

[토끼 간호사 아이템을 사용하셨습니다. 대상에게 걸린 모든 해로운 효과가 제거됩니다. 남성 혐오, 불안 및 초초, 공포가 제거되었습니다.]

그의 몸에서 뿜어진 광채가 비비안을 휘감자 비비안이 최기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좀 이야기할 생각이 드니?"

"……네. 기분이 이상해요. 지금이라면 선생님하고 이야기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 주니 선생님 마음도 한결 편하구나."

최기석이 부드러운 미소에 비비안의 굳었던 얼굴이 펴졌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저 심장에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네 심장은 아주 건강해. 심전도 결과랑 흉부엑스레이 검사에서도 특이한 점은 못 찾았어."

"그런데 왜 가슴이 아프죠?"

비비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그건 네게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

"아직 주치의 선생님께 말 안 한 게 있지?"

최기석의 지적에 비비안이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며 다리를 떨었다.

"몰라요. 그런 거."

"비비안. 몸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솔직해. 아프면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지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흉통과 불편함을 호소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마침 병실에 아무도 없구나. 지금이 고민을 털어놓은 좋은 타이밍이야."

"……안 돼요. 말 못해요. 전……."

비비안이 말을 더듬거렸다.

고민거리를 인정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진전.

최기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추궁 - 이의가 있어!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추궁 모드를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추궁 모드: 상대방의 대화를 텍스트로 나타내어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의 거짓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추궁을 사용하면서 최기석의 눈빛이 독수리처럼 날카로워졌다.

"비비안. 혼자서 끙끙 앓고 있으면 너만 더 괴로워져."

[선생님. 가슴이 아픈 건 그냥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 것 같아요. 잘 쉬면 나아질 것 같아요.]

"잠깐!"

최기석의 지적에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냥 신경을 곤두세워서 가슴이 아프다고?"

[네. 스트레스가 만병에 근원이라는 이야기가 있잖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요?]

비비안의 텍스트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최기석은 텍스트를 유심히 살피다가 두 번째 추궁에 나섰다.

"말 한번 잘했다. 선생님은 네가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가 궁금한 거야. 그걸 들려 달라고."

[…….]

비비안의 입이 자물쇠처럼 닫혔다.

"비비안. 선생님에게 그 이유를 들려줘."

[…….]

최기석이 재차 물었음에도 비비안은 묵묵부답이었다.

문득 답답함에 가슴에 창을 내고 싶어졌다.

그동안 추궁 스킬을 사용하면 텍스트 지적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새로운 전개를 맞이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케이스는 예전과 달랐다.

커다란 벽을 마주한 듯 더 이상한 전진할 수가 없었다.

띠링!

[상대방이 마음의 벽을 생성하였습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추론이 필요합니다. 결정적인 추론에 3회 실패할 경우 상대방과 일주일간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알림창을 확인한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결정적인 추론이라…….

잠들었던 뇌세포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뇌세포들은 그동안 비비안을 보고 만나며 느낀 정보들을 샅샅이 분석하고 조립하고 재생성했다.

맞아. 지금까지 왜 그걸 잊었을까.

방황하던 최기석의 눈에 총명함이 깃들었다.

"비비안."

[네.]

"선생님 생각에는 네가 남자친구나 다른 남자들에게 크게 상처를 받은 것 같다."

[…….]

그의 말에 비비안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쩌저적하고 마음의 벽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었다.

"처음 선생님이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내가 만지는 것조차 극도로 꺼려했어. 보통은 그렇게 심한 반응을 보이지 않거든."

[…….]

"대체 네가 왜 그랬을까? 선생님은 네가 어떤 남자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

최기석은 답답하게 할 말을 하고 비비안을 응시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비비안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이윽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띠링!

[결정적인 추론에 성공하셨습니다. 이제 상대방의 속마음을 완전하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서……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

최기석은 비비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열다섯 소녀가 흘리는 눈물이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리도 서럽게 운단 말인가.

"죄…… 죄송해요. 괜히 바보처럼 굴어서."

"다른 사람에게 속마음을 드러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주 용감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지."

"그럼 저도 이제 용감해질 수 있나요?"

"암. 그렇고말고."

비비안은 최기석에 받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후 사연을 털어놓았다.

지금으로부터 삼 개월 전.

비비안은 학교에서 한 남자를 사귀었다.

남자의 이름은 페인으로 그녀보다 두 살 위였다. 연애 초반에는 다정하고 매너 좋은 페인이었지만 교재가 깊어질수록 본성이 드러났다.

페인은 비비안에게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했으며 비비안이 이를 따르지 않자 결국 성폭행을 저질렀다.

"경찰에 신고하면 죽여 버릴 거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어요. 거기다 가족들이나 친구들한테 알려지는 것도 싫었고……."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최기석의 위로에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 다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최기석은 착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우선 널 성폭행 녀석을 신고해야지."

"그럼 절 죽여 버리겠다고 했는데요?"

"그건 경찰에 보호 신청을 요청하면 해결할 수 있어. 이제부터 선생님이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기왕 입원했으니까 신경정신과 치료도 같이 받았으면 하는데 어떠니?"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그래. 고맙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네 주치의인 엘리나에게 말할게. 그건 괜찮지?"

비비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석은 비비안에게 격려를 걸어준 후 산부인과 의국을 찾았다.

마침 엘리나는 차트를 입력하는 중이었다.

"미스터 최. 검사 결과가 나왔나보죠?"

"네. 나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정보도 얻었고요."

최기석은 엘리나에게 비비안과 나눴던 대화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저도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대단한 걸요? 주치의인 저도 몰랐던 걸 미스터 최가 밝혀내다니…….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뭐. 얻어걸린 거죠."

최기석이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엘리나와의 대화를 끝낸 최기석은 그길로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상태창을 확인했다.

[특별 임무, '말하지 못한 것들' 임무가 생성되었습니다. 비비안이 가진 고민을 해결할 경우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단, 임무는 현 시점으로 하루 안에 해결해야 합니다.]

[임무 타이머, 05:10:00 경과 / 남은 시간 18시간 50분]

최기석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비비안은 자신에게 속내를 모두 털어놓았다. 더불어 경찰에 신고만 하면 페인이라는 쓰레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임무가 완수되지 않은 것일까.

비비안이 아직까지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문제라도 생긴다는 뜻일까.

의문이 짙어져만 갔다.

최기석은 부풀어 오르는 생각들을 잠시 접고 병실을 돌았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라훌의 병실.

보호자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라훌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산제이가 최기석의 표정이 변하는 걸 발견하고 이를 딱딱 부딪쳤다.

"라훌의 호흡이 어제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

"이 정도 수준이라면 호흡기를 달아야겠어요."

"산소호흡기요? 그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것 겁니까?"

"네."

최기석은 착잡한 얼굴로 라훌에게 산소 호흡기를 달아주었다.

호흡이 편해져서 그럴까, 라훌의 이마에 졌던 주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선생님. 심장 공여자는 아직 없는 거죠?"

"……네. 지금으로써는 연락이 오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더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최기석의 말에 부부는 대답 없이 라훌을 응시했고 최기석은 부부를 바라봤다.

이미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그다.

부부가 하루하루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살고 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에 피 말리는 기다림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건지.

신이 있다면 제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병실을 나온 최기석이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어 샤워를 끝내고 격리실로 들어가자 곤히 잠들어 있는 케빈이 보였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너스바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상태 역시 양호했고 말이다.

이렇게 케빈을 보고 있자니 문득 너스바를 제거하고 마음 편히 수영하는 그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처방 입력을 마치고 심초음파실로 향했다.

잠시 후 카타리나의 지휘하에 태아의 풍선확장술이 예정되었으며 그는 제2보조를 맡았다.

처음 경험하는 케이스인 만큼 처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궁금했다.

'이상하네, 이거.'

심초음파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최기석은 상태창을 띄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시간 전쯤 비비안을 성폭행했던 페인을 경찰에 신고했다는 엘리나의 전화를 받았다.

비비안에 관련된 모든 문제가 해결된 셈이다.

그럼에도 임무 타이머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먼저 와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카타리나와 미구엘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네, 교수님.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세상 곤란한 일인가 봐? 표정이 아주 심각하던데?"

"심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기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무슨 걱정인지 몰라도 오늘 처치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해. 누가 뭐래도 의사는 눈앞에 있는 환자에게 집중해야 해. 자칫 딴생각을 했다간 대형사고가 터진다고."

"명심하겠습니다."

"이번 환자, 레지던트 일 년 차가 겪기엔 희귀 케이스 아닙니까? 미스터 최가 얼어 있더라도 교수님께서 이해해 주세요."

미구엘이 최기석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다정한 선임자 코스프레 오지구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최기석은 간신히 참았다.

벅. 벅. 벅. 벅.

스크럽을 끝낸 세 사람이 처치실로 들어갔다.

수술대 위로 배가 남산만 한 임산부가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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