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2)
[토끼 간호사 아이템을 사용하셨습니다. 대상에게 걸린 해로운 효과가 사라집니다.]
휘이이이잉.
알림과 함께 최기석의 몸에서 뿜어진 녹색빛이 제레미를 감쌌다.
서서히 펴지는 제레미의 얼굴.
난폭한 키보드 소리와 짜증 섞인 혼잣말이 감촉같이 자취를 감췄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제레미의 불편한 가시 디버프도 온데간데없었다.
토끼 간호사는 효과만점이다.
아이템에 쪽쪽 입을 맞춰 주고 싶을 정도로.
"미스터 최."
처방을 입력하던 제레미의 시선이 최기석을 향했다.
"왜?"
"괜히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 기분 나쁜 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너무 내 기분만 내세운 것 같아서."
"괜찮아. 그 인간의 헛소리를 듣고 맨 정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 걸?"
"하긴……."
최기석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그건 그렇고 찰스랑 엠마를 만나서 이 문제를 이야기해 봐야겠어. 이대로라면 우린 수련하는 내내 미구엘에게 당해. 교수님께 알랑방귀 떠는 거 봤지?"
"맞아. 대책이 필요하지."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전화기가 울렸다.
"흉부외과 레지던트 기석 최입니다."
[…….]
"네. 지금 가겠습니다."
"응급실 전화?"
"아니. 산부인과에서 협진 의뢰 왔어. 내가 갔다 올게."
최기석은 의국을 벗어나 산부인과 병동을 찾았다.
복도 끝 병실에 들어가자 산부인과 의사가 손들며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미스터 최."
"반갑습니다. 엘리나."
"협진 요청한 환자는 여기 있는 비비안이에요. 골반염이 심해서 입원했는데 경과는 호전 중인데 이상하게 요 며칠 사이에 흉통을 호소해서요."
엘리나가 비비안을 내려다보았다.
비비안은 올해 열다섯 살로 또래의 아이들보다 외모가 앳됐다.
체구가 작았으며 젖살도 채 빠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안녕, 비비안."
"아, 네. 안녕하세요."
비비안이 몸을 움츠린 채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잔뜩 얼어 있었으며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가슴이 어떻게 불편하니?"
"그게……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요.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내내요."
"혹시 숨 쉬는 것도 불편해?"
"네. 그냥…… 답답해요."
"혹시 심장질환을 앓은 적은 있고?"
"아니요."
비비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이 청진기로 심장음과 폐음을 들어야 하는데 옷을 잠깐 올려볼래?"
"안 돼요!"
비비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퍼졌고 이에 놀란 몇몇 환자들이 몸을 들썩거렸다.
반항이 의외로 거셌다.
"비비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닥터 최는 진료 보려는 거야."
"그래도 안 돼요! 절대! 엘리나 선생님이 봐주세요."
"흉통에 대한 부분은 선생님보다 닥터 최가 훨씬 더 잘 봐. 고집 그만 피워."
엘리나가 설득에 나섰지만 비비안은 한사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소심한 줄 알았던 비비안이 보이는 뜻밖의 불같은 모습.
최기석은 직감적으로 그녀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미안해요, 미스터 최. 비비안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하늘을 두 쪽 내 가면서까지 심음을 들을 필요는 없거든요. 대신 심전도 검사하고 혈압만 확인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최기석은 테이블에 놓인 혈압기로 비비안의 혈압을 재려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탁!
최기석의 손이 비비안 팔에 닿는 순간 비비안이 경기를 일으키며 그의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요!"
날 서린 언사에 병실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최기석과 엘리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비비안. 네 진료를 봐 주려고 온 선생님께 무슨 짓이니!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죄…… 죄송합니다."
엘리나의 지적에 비비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띠링!
[특별 임무, '말하지 못한 것들'이 생성되었습니다. 비비안이 가진 고민을 해결할 경우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단, 임무는 현 시점으로 하루 안에 해결해야 합니다.]
[임무 타이머, 00:01:00 경과 /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하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처음 받아 보는 타임어택 미션이 난감했다.
"계속 미안한 일만 생기네요. 혈압은 제가 확인해도 괜찮죠?"
"물론입니다."
엘리나가 비비안의 혈압을 확인하여 최기석에게 알려 주었다.
물론 비비안은 최기석에게 했던 것처럼 난폭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축기 110mmHg, 이완기 70mmHg이에요."
"정상 중에 정상이네요. 그럼 심전도 결과 확인하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최기석은 비비안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병실을 나왔다.
흉통을 느낀다고 했지만 그녀에게 심혈관질환은 없었다.
즉 그 이외의 다른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또 한판 붙어야겠군.'
흉부외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그날 오후.
일과를 끝낸 CPR팀이 회의실에 모였다.
팀원들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며 카타리나와 미구엘이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다들 인사 나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미스터 왕을 대신해서 너희들의 수련을 도와줄 미구엘."
"캘리포니아 브랜치에서 온 미구엘이야. 환자 관리나 처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좋아. 다들 잘 부탁한다."
짝. 짝. 짝. 짝.
소개가 끝나자 의례적인 박수가 터졌고 미구엘은 자리로 돌아갔다.
"자.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
카타리나가 팀원들을 훑으며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그동안은 제대로 된 팀 활동이 없었어. 케이스 발표와 봉합 연습 정도가 다였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거야. 너희들도 병원 생활에 익숙해졌으니까 진짜 팀 활동을 시작해 볼까 해."
"본격적이 팀 활동이라면……."
"너희 넷이서 환자를 맡아 집도하는 거야."
"집도요?"
찰스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오직 팀 CPR의 힘으로만 한 가지 수술을 완성시키는 거지. 그게 진짜 팀 활동 아니겠어?"
카타리나가 리모컨을 누르자 스크린에 한 환자의 차트가 떠올랐다.
"환자의 이름은 걸리버. 올해 60세로 MHC 외래 진료에서 실시한 검사로 승모판 협착증 진단을 받았어. 현재 환자의 승모판은 많이 두꺼워진 상태로 석회화가 진행 중이고 혈전까지 발견 됐어."
"그럼 PCI(경피적인 심혈관 풍선확장술)나 재건술도 불가능하겠네요."
"그건 너희들이 판단해야지?"
카타리나가 애매하게 대답하며 화면을 넘겼다.
스크린에 심도자 및 심초음파, 심혈관 조영술 영상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영상을 유심히 살피던 최기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능하면 판막 성형술을 하고 싶었다.
판막 성형술을 할 경우 환자 심장에 부담이 덜 가며 항응고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에.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스승 송명진이 나선다 해도 성형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판막이 망가졌다.
"다들 눈이 반짝반짝 거리는 게 보기 좋은 걸?"
카타리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걸리버가 팀 CPR이 맡은 첫 번째 환자야. 역할 분담은 네 사람이 알아서 하고 수술에 필요한 정보나 기타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나나 미구엘에게 물어 봐."
"……."
"참고로 수술 날짜는 넉넉하게 이 주일 뒤로 잡았어. 다른 팀에 비하면 어려운 케이스지만 너희들이라면 잘할 수 있겠지?"
"네!"
"문제없습니다."
네 사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카타리나가 떠난 후 CPR 팀의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었다.
"환자 케이스를 좀 더 살펴봐요. 내가 제일 궁금한 건 치환술에 관한 부분인데."
엠마가 운을 뗐다.
"역시 성형술은 불가능할까요?"
"와우.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엠마의 말에 찰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제레미도 같은 생각이라면 의견을 더했다.
팀 CPR 스태프의 성향은 전부 환자 중심.
그에 따라 치환술보다 성형술을 고려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다들 미쳤어? 이 환자는 성형술 안 돼."
잠자코 있던 미구엘이 찬물을 끼얹었다.
"판막이 완전 개차반이잖아. 무리하게 성형술을 했다간 금방 재수술을 해야 된다고."
"그래도 다 같이 최선의 방법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엠마. 얼굴은 예쁘면서 왜 그렇게 답답한 소리를 하니."
미구엘이 혀를 찼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형술은 불가능해. 펠로우 일 년 차인 내 판단을 믿으라고."
"나도 미구엘 선생님과 의견이 같아."
"……미스터 최, 너마저?"
제레미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MVA(Mitral Valve Area, 승모판막 입구 넓이)가 1.5제곱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판막륜과 판막엽 상태도 좋지 않고 건삭은 탄력이 없어."
"……."
"지금은 성형술이 아니라 치환술이 환자에게 최선인 것 같아."
"어쭈. 미스터 최, 환자 좀 볼 줄 아는데?"
미구엘의 칭찬에도 최기석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바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칭찬하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미구엘의 칭찬은 최하급이다.
"무리해서 성형술을 고집할 필요도 없는 것 같긴 하네. 환자 나이도 있고."
"좋아요. 이번 수술은 치환술로 진행해요."
"찬성."
찰스와 엠마, 제레미가 입을 모았다.
"인공판막은 조직판막으로 할 거죠?"
엠마의 말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판막의 종류에는 기계판막과 조직판막이 있다.
기계판막은 내구성이 뛰어나서 평생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항응고제를 평생 복용해야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조직판막은 상대적으로 항응고제 복용기간이 짧으며 수술 후 부작용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단 조직판막은 수명이 짧아서 10년 정도가 지난 후 재수술을 받아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판막 종류까지 결정했으니까 이제 역할만 나누면 되겠네. 집도는 우리 팀 고유명사인 미스터 최가 하는 게 좋겠지?"
"저도 찬성이에요."
"나도."
찰스가 최기석 쪽으로 분위기를 몰자 다들 이를 따랐다.
"좋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이어지는 최기석의 호쾌한 대답.
이로써 팀 수술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이 완성되었다.
띠링!
[팀 임무, '승모판막 치환술을 성공시켜라'가 생성되었습니다. 해당 수술에 성공할 경우 모든 팀 스탯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상태창을 확인한 최기석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요즘 처리해야 할 임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스승 송명진의 신수술 임무, 야사다의 12과업 임무, 거기에 권일수가 내준 임무, 오늘 받은 새로운 두 가지 임무까지.
임무복이 터졌다고 할까.
하지만 이 과정을 잘 이겨 내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세부적인 사항을 정리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산부인과 병동.
드르르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비안이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비안. 선생님하고 이야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