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 (6)
터벅터벅.
최기석은 의국에 들른 후 한 병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권일수에게 받은 선물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다.
'교수님답네.'
권일수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환자를 선물로 표현했다는 것에서 성격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봉급날만 기다리는 의사에게 환자는 골칫거리지만 의술을 향상시키려는 의사에게 환자란 선물이다.
모름지기 의사는 다양한 케이스를 경험할수록 성장하기 마련이기에.
복도를 걷는 최기석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복귀한 권일수의 선물은 특별했다. 당장 포장을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드르르륵.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운 신생아와 보호자가 보였다.
환자의 이름은 켈리.
보호자의 이름은 마릴린이다.
"켈리에 주치의 기석 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마릴린이 어눌한 목소리로 답했다.
인사하며 마릴린과 눈을 마주쳤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풀려 있었다.
생계 때문에 피곤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보호자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단정적인 판단이고 선입견이라는 건 알지만 눈동자가 풀린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본 기억이 드물었다.
"놀라셨겠습니다. 초진에 덜컥 입원을 하셨으니."
"어떻게 보면 잘된 걸 수도 있죠. 입원했으니까 아이는 어머니께 맡기고…… 아니.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마릴린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진료 좀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청진기로 켈리의 폐음과 심장음을 청취하고 체온과 맥박을 재차 확인했다.
예상대로 바이탈은 정상이다.
아이가 감염증을 앓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켈리가 앓고 있는 질환은 쥰 증후군.
다른 말로는 선천성 제한적 흉곽성장장애라고 불린다.
신생아 10만 명 중 1명이 걸리는 희귀질환으로 이 질환에 걸린 아이는 흉곽이 성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심장과 폐가 흉곽에 눌린 채 자라지 못해 사망에 이른다.
물론 최기석은 처음 접하는 질환이었다.
"켈리는 어떤가요? 외래진료 교수님은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던데."
"현재 상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그럼 그 교수님이 거짓말을 한 건가요?"
마릴린의 눈썹이 산처럼 솟았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현재 상태는 양호하지만, 수술이 꼭 필요한 상태입니다. 켈리를 이대로 두면 심장과 폐가 갈비뼈에 눌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술비는 얼마나 나와요?"
"아직 수술법이 결정되지 않아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희귀질환인 만큼 금액이 적지는 않을 겁니다."
"칫. 술 마실 돈도 모자란 데……."
마릴린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방금 술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술이요. 사람이 힘든 일이 있으면 술 마실 수도 있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은어를 쓰시는군요."
최기석은 마릴린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이에 마릴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 은어라니요. 술이 말 그대로 술이지. 다른 술이 있어요?"
"MHC에 입원한 분이 술 마실 돈이 모자란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렇다면 보호자분이 말한 술은 평범한 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기석이 주사 놓는 시늉을 하자 마릴린이 입을 쩍 벌렸다.
"마약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
"말하기 싫다면 듣고만 계세요. 지겨운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마약은 끊어야 합니다. 켈리의 미래와 마릴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마릴린이 고개를 쳐들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흐리멍덩했던 눈에서 활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 나오고, 편하게만 살아온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지껄여.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모릅니다."
"뭐라고요?"
"모른다고요. 난 마릴린의 속사정 따위는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언젠가 파멸할 거라는 건 확실히 알죠."
최기석과 마릴린의 시선이 팽팽하게 충돌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 병실을 휘감았다.
"으아아아앙!"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켈리.
이에 마릴린이 켈리를 품에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나가요. 당신 얼굴 더 이상 보기 싫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최기석은 병실을 나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마릴린과 날 서린 말다툼을 했지만, 유감은 없었다.
그녀 역시 치료가 필요한 환자였으니까.
오늘은 그녀 마음에 고인 고름을 짠 것으로 만족하고 후속 처치를 준비하리라.
"오랜만이야."
의국으로 돌아가는데 맞은편에서 야사다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헤드 치프."
"의진대에서 진행한 심포지엄, 카타리나가 훌륭했다고 하더군. 모국에서 진행한 심포지엄이 잘 끝나니 뿌듯하지?"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최기석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헤드 치프, 괜찮으시다면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좋을 대로."
두 사람은 야사다의 집무실로 이동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오목가슴을 앓는 케빈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낙상으로 갈비뼈 골절과 횡격막 손상을 입으면서 수술 일자가 밀렸는데 지금은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너스바 수술을 하고 싶다는 거군."
야사다가 한 박자 빠르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일반적인 너스바 수술이라면 망설이지 않았겠지. 하지만 케빈에게는 더블 너스바 수술이 필요하지 않나?"
"맞습니다."
"흐음…… 레지던트 1년 차에게 더블 너스바 수술이라……."
야사다가 턱을 쓸어내렸다.
수술명이 말해주듯 더블 너스바 수술은, 너스바 수술에 비해 난이도가 두 배가량 높다.
신경 써야 할 처치가 늘어나며 도중에 대동맥 파열 등의 합병증이 일어난 가능성이 컸다.
"잘할 자신 있습니다. 이미 다른 팀에서 진행한 너스바 수술을 참관했고 관련 논문도 많이 읽었습니다. 보호자만 허락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수술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성격이 급하군."
"케빈의 입원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수술이 더 이상 미뤄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뭐. 정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해봐. 자네가 미끄러지지 않고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하군."
"감사합니다, 헤드 치프."
"감사는 닥터 송에게 하라고. 레지던트 집도 시스템을 만든 건 닥터 송이니까."
"그래도 허락은 헤드 치프께서 해 주시지 않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
야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기왕 이렇게 만난 김에 나도 숙제를 내줄까 하네."
"숙제라면……."
"나흘 뒤에 VIP환자의 폐암 수술이 있어. 자네가 제1보조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띠링!
[열두 가지 과업 중 세 번째 과업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첫 번째 과업: 성공적인 VATS 보조/성공!]
[두 번째 과업: 식도이완불능증 환자에 대한 풍선확장술/성공!]
[세 번째 과업: 중증 폐암 수술의 수술 보조]
알림창을 확인하자 세 번째 임무가 눈에 들어왔다.
기승전결로 따지면 열두 가지 과업은 아직 '기' 단계.
벌써 폐암 수술 보조에 들어간다면 남은 아홉 개의 난이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과 설렘이 동시에 가슴을 흔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일과 잘 보내고."
최기석은 후련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휴게실에 앉아 잠시 후 펼칠 너스바 수술 과정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트레이닝 룸에서 수련하고, 기존 수술 동영상을 질리도록 돌려 보고, PVP 모드까지 활용하며 오늘을 준비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이윽고 생각을 가다듬은 그가 케빈의 병실로 이동했다.
"닥터 최.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케빈과 보호자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 역시 미소 띤 얼굴로 인사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온종일 케빈과 붙어 있는 것 같던데."
"당연히 그래야죠. 케빈이 다친 건 제 불찰이니까요."
보호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케빈이 혼자서 물을 마시려고 침대 바를 내렸다가 낙상사고를 당한 것에 대해 보호자는 그 일은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케빈과 찰떡같이 붙어 있었다.
"케빈. 기분은 좀 어때?"
"벼…… 별로예요."
케빈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그냥 수술 안 받을래요."
"이제 와서? 왜?"
"무서워서요. 눈 감으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아요. 어제 뉴스에서 수술 중에 죽은 사람 기사도 났고……."
"케빈."
최기석은 케빈에게 다가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예전에 선생님께 그랬지. 다른 친구들처럼 편하게 놀고 수영하는 게 소원이라고."
"네."
"그 소원을 이루려면 케빈의 용기가 필요해. 그리고 씩씩한 케빈이라면 무서운 수술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말을 마친 최기석이 케빈에게 격려를 사용했다.
휘이이이잉.
그의 몸에서 뿜어진 광채가 케빈을 휘감으면서 케빈의 표정이 밝아졌다.
"……해 볼게요. 선생님."
"그래. 선생님이 책임지고 네가 건강하도록 도와줄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왔다.
오늘 수술의 제3보조를 맡은 인턴이다.
"여기 계셨네요. 스태프들 전부 수술실에 모여 있습니다. 환자랑 미스터 최만 오면 돼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케빈도 준비됐지?"
"네!"
최기석은 인턴과 함께 침상을 끌고 수술실로 이동했다.
지이이잉.
수술 브리핑이 끝나고 로젯에 자리를 잡는 스태프들.
최기석의 두 눈이 자연스럽게 수술 준비하는 스태프들을 훑었다.
오늘 수술의 제1보조는 치프 레지던트 로버트.
제2보조는 제레미고 제3보조는 인턴이다.
"폐동맥 협착증 수술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일을 벌였네?"
그를 바라보는 로버트의 눈이 웃고 있었다.
로버트는 이미 너스바 수술 집도 경험이 있으며 최기석의 수술을 지켜보기 위해 특별히 참석하게 되었다.
"하하하. 제가 원래 트러블 메이커잖아요."
"트러블 메이커도 보통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지. 암으로 따지면 4스테이지급 아니야?"
"치프. 너무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암과 비교를 하다니."
"미안. 내가 너무 많이 나갔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긴장감이 흐르던 로젯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수술 도구 준비 끝났습니다."
그의 등 뒤에 자리 잡은 소독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아서 말을 걸려는 찰나, 마취의가 전신마취가 끝났음을 알렸다.
개인적인 호기심보다는 당연히 수술이 먼저.
정신을 날카롭게 벼린 최기석이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오목가슴증에 대한 더블 너스바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소독 들어갑니다."
제레미가 케빈의 가슴 양쪽 면을 소독하고 방포를 씌웠다.
이에 최기석이 소독간호사에게 메스를 받아 절개에 나섰다.
부우우욱.
메스를 타고 손에 전달되는 피부 갈라지는 감촉.
오늘은 왠지 감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