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 (5)
"뭐야? 뜬금없이."
"왜 갑자기 숟가락을 달라는 거지?"
현장에 남아 있는 승무원과 몇몇 승객들이 최기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겐 응당 심폐소생술이나 기타 다른 처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최기석의 부탁은 뜻밖이었다.
"하아…… 하아…… 여, 여기 있어요."
지시를 받은 승무원이 달려와서 수건과 숟가락을 내밀자 모두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쏠렸다.
최기석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건으로 숟가락을 감싼 후에 환자의 기도를 확보했다.
환자는 간질 발작으로 인해 질식한 상태.
지금 가장 중요한 처치는 막혀 있는 기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병원이라면 기관삽관을 했겠지만, 기내에서 그런 처치 도구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숟가락을 떠올렸다.
[반드시 살린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각성 CPR 버프를 사용하셨습니다. 인공호흡, 흉부 압박, 제세동기 사용 시 특수한 효과가 추가됩니다.]
최기석은 스킬을 사용하고 인공호흡에 나섰다.
서서히 제빛을 띠는 환자의 얼굴.
이윽고 환자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아으으윽.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환자분은 발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응급처치를 했고요."
"아. 또 발작이…… 감사합니다."
환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고 최기석은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왔다.
짝. 짝. 짝. 짝.
삐이이이익~
처치가 끝나자 승객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잘했어요. 미스터 최."
"역시 너답다."
처치를 멀찌감치 지켜보고 있던 카타리나와 찰스가 한마디씩 했다.
"내 생각에 넌 어디 외딴 섬에 가둬 둬야 할 것 같아."
"왜?"
"네가 가는 곳마다 환자가 생기잖아. 설마 기내에서 환자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찰스의 농담에 최기석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환타 칭호의 악명과 위력을 너무 잘 알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만약 교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녀석한테 맡기세요."
"무슨 뜻?"
"미스터 최는 의사면서 동시에 암살자거든요. 미스터 최랑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병에 걸릴 겁니다."
"그거 대단한 능력인걸?"
카타리나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찰스. 너 내 얼굴 매일 보는 거 알지? 너도 조심해라."
"안 그래도 항상 긴장하고 있거든요?"
웃고 떠드는 사이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입국 수속을 마치고 MHC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역시 고향이 좋네."
택시에서 내린 최기석이 MHC 건물을 응시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수련한 시간보다 미국에서 수련한 시간이 더 길었다. 그래서 그런지 의진대에 있을 때보다 미국 병원에 도착했을 때 더 편안함을 느꼈다.
"자. 그럼 가 볼까?"
"네."
카타리나가 앞장서고 찰스와 최기석이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카타리나는 연구실에서 짐을 풀었고, 두 사람은 기숙사에서 짐을 푼 후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때마침 복도 맞은편에서 엠마가 다가왔다.
"두 사람 다 반가워요. 심포지엄은 잘 다녀왔어요?"
"좋은 시간 보냈어요. 배운 것도 많았고 세이버 수술도 라이브로 참관했죠."
"세이버 수술이요? 좋았겠다."
최기석의 말에 엠마가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 없어서 바빴죠?"
"괜찮아요. 다른 팀 레지던트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환자도 가져갔고요."
"그나마 다행이었네요. 고생 많았어요."
세 사람은 의국으로 이동해서 대화를 계속했다.
고작 나흘 동안 자리를 비웠지만 그사이 병원에서는 제법 스펙터클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EOB 평가 지침의 변화였다.
본래 파커는 EOB(흉부외과 평가)를 위해서 환자를 적당히 가려 받으라는 지침을 내렸다.
메이죠 클리닉 흉부외과와 MHC가 분리된 상황.
EOB 평가가 따로 이뤄지면서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파커는 메이죠 클리닉 흉부외과를 꺾기 위해서 그와 같은 지침을 만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야사다가 폐동맥 협착증 케이스의 불합리함을 상부에 알리면서 지침이 바뀌었다.
메이죠 클리닉 흉부외과와 MHC가 같은 지침을 쓰게 된 것이다.
'고소하다, 고소해.'
최기석은 똥 씹은 표정의 파커와 벤슨을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제이미의 수술을 미루고 풍선확장술로 대신하려고 한 죄.
그것은 앞으로 천천히 갚아 주리라.
"엠마랑 제레미는 CAP(의사 일 인당 수용 가능한 환자의 최대치) 안 찼어요?"
"둘 다 꽉 찼어요. 오늘부터 들어오는 환자들은 두 사람이 받아야 해요."
"그거야 당연하죠."
찰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대화를 마친 후 병실을 돌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제이미의 병실.
제이미는 바로 어제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고 중환자실에서 받은 수술 후 관리도 좋아서 조만간 퇴원해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드르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이미와 사무엘이 동시에 그를 응시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닥터 최. 오랜만입니다."
"제이미 안녕. 사무엘도 반갑습니다."
최기석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침상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심포지엄 일정이 잡혀서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선생님에게 다 들었어요."
"선생님. 심포지엄이 뭐에요?"
잠자고 있던 제이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제이미에게는 조금 어려운 단어지? 쉽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거야."
"그럼 우리도 지금 심포지엄을 하는 거예요?"
"뭐.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헤헤. 심포지엄 별거 아니네요."
제이미의 말에 최기석과 사무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이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정곡을 찔렀기에.
"오기 전에 차트를 살폈습니다. 심초음파와 CT 결과가 무척 좋더군요. 이번 주 안으로 퇴원 계획 잡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나 제이미나 병원 생활이 지루하던 참이었거든요."
"오래 있을 곳이 못 되죠. 병원은."
"하하하. 선생님이 그런 말씀 하셔도 되는 겁니까?"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최기석의 농담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번 수술, 닥터 최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산됐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헤드 치프가 이야기했나요?"
"네."
"그렇군요. 하지만……."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더욱 중요했던 건 사무엘의 결정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저를 믿어 주지 않았다면 결국 수술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닥터 최를 믿지 않을 보호자가 있을까 싶은데."
"네?"
"사실 수술을 승낙하기 전 닥터 최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 봤습니다. 전적이 화려하시더군요. 예전에 샴쌍둥이 수술을 하신 적이 있고 얼마 전에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분류하는 모습이 뉴튜브에 올라왔더군요. 그 영상을 보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닥터 최라면 제이미를 살려 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제이미도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려야지."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이미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선물이야?"
"네. 제가 제일 아끼는 거예요."
최기석은 제이미가 건넨 토끼 간호사 인형을 받았다.
띠링!
[신규 아이템, 토끼 간호사를 획득하셨습니다.]
[토끼 간호사]
- 토끼 간호사, 따라라따라, 귀여운 따라라따라, 병원 속 따라라따라, 토끼 간호사- 효과: 환자 및 의료인에게 걸린 디버프 및 해로운 효과를 전부 제거합니다. 심각한 정신적인 트라우마의 경우 일시적인 해소만 가능합니다. 하루 최대 사용횟수는 2회며 지속시간은 이틀입니다.
[신규 칭호: 믿음의 징표]
- 치료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 처음 보는 환자와 보호자일지라도 자동적으로 라포 2단계를 형성합니다. 의료인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나 의료인이 환자의 지위까지 갖출 경우 효과는 발동됩니다.
최기석 상태창을 확인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환자에게 아이템을 받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더불어 만약 이 아이템이 전부터 있었다면 의진대 시절 정명운의 약자멸시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디버프를 말끔하게 없앴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토끼가 싫으세요?"
제이미가 최기석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 너무 좋아서 그래. 이 친구, 제이미가 했던 것처럼 선생님이 잘 돌봐 줄게."
"네!"
"그래. 선물 정말 고맙다."
최기석은 부녀와 대화를 마친 후 병실을 나왔다.
이어서 인도에서 온 심장이식 대기자 라훌과 오목가슴을 앓고 있는 케빈을 살폈다.
라훌의 상태가 제자리인 반면 케빈의 상태는 많이 좋았다.
조만간 너스바 수술 스케줄을 잡아도 문제가 없었다.
라운딩을 끝낸 최기석은 휴게실에 숨을 골랐다.
캔 커피를 마시며 할 일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휴게실 문이 열렸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상대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군. 심포지엄은 잘 다녀왔나?"
"네. 잘 다녀왔습니다."
"얼굴색이 훤한 걸 보니 빈말은 아닌 것 같군."
권일수가 미소를 띤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권일수와 독대를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니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나?"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권 교수님이 MHC에 오셨다는 사실이."
"나도 마찬가지야."
권일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장혁필에게 밀린 후 의사 생활은 이대로 끝인가 싶었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실력이 좋아도 세상은 날 알아주지 않는가 싶었지."
"……."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의사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더군."
"제가 교수님 입장이어도 회의가 들었을 것 같습니다."
"위로해 주니 고맙군."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외래진료가 없으십니까?"
"오전 진료만 보고 올라왔지. 어제 야사다 치프가 그러더군. 당분간은 환자를 보는 데 집중하지 말고 이곳 생활에 적응하라고. 그 사람 인상은 염라대왕 같은데 속은 의외로 따뜻하단 말이야."
"동감입니다. 하지만 화를 낼 때는 진짜 염라대왕 같습니다."
"……."
"교수님이 보시기에 MHC는 어떻습니까?"
"두말할 필요 있나? 아주 훌륭한 병원이야. 장비도 좋고 시스템적인 부분도 흠잡을 데가 없어. 스태프들의 평균적인 실력도 의진대보다 뛰어나고. 웬만하면 여기서 뼈를 묻은 생각이야."
"그럼 한국에 돌아갈 생각은 완전히 접으신 겁니까?"
"뭐. 지금으로써는……."
권일수가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최 선생을 봤는데 선물도 못 주고 참 미안하더군. 최 선생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텐데."
"아닙니다. 선물 같은 필요 없습니다."
"그거야 최 선생 생각이지. 마침 조금 전 선물 준비가 끝났으니까 확인해 봐. 선물 이름은 44445555일세. 그럼 나는 송 부원장과 약속이 있어서 이만."
권일수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최기석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선물 번호 44445555.
뒤늦게 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