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 (3)
대망의 심포지엄 개최 날이 밝았다.
최기석은 새벽 일찍 일어나 트레이닝 룸에 입장해서 피아노 연습에 매진했다.
연습은 쉽지 않았다.
봄바람이 아무리 편한 곡이라고 해도 생초보가 연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양손잡이 스킬은 만능이 아니었다.
양손으로 쓰는 일에 숙련도와 성장을 돕는 것일 뿐.
처음 하는 일을 숙련가 수준으로 펼칠 수는 없었다.
최기석은 트레이닝 연습을 3회 마치고 김두진과 PVP 모드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참패.
김두진이 S랭크를 받은 반면 최기석은 아예 랭크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애초에 자극받기 위해 PVP를 했던 만큼 패배에 아쉬움은 없었다.
'할 일은 다 끝났구나.'
연습을 끝내고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저녁에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부모님과 남동생은 건강했으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불어 기회가 왔다 싶어 미국에서 슈퍼볼 당첨됐다는 것을 소식을 알렸다.
"기…… 기석아. 슈퍼볼이라고 했니?"
"형. 거짓말이지?"
지금도 눈 감으면 가족들의 경악한 표정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슈퍼볼의 당첨금액은 로또와는 비교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깜짝 발표를 끝낸 최기석은 부모님에게는 은퇴 후 여행을 권했고 동생에게는 레스토랑을 차려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가족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조금 더 고민해보자는 뜻을 전했다.
"하아아암. 일찍 일어났네?"
잠에서 깬 찰스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윽고 멍했던 그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너 나한테 사기 쳤지. 사우런 타워는 무슨 사우런 타워야. 그거 인터넷상에 떠도는 장난 같은 거라며."
"아…… 사실을 말해 준다는 걸 깜빡했네."
"우이쒸. 슈퍼월드 타워에 가서 목걸이 이벤트 참여하러 왔다니까 다들 자지러졌어. 완전 놀림거리가 됐다고!"
"진짜 미안. 대신 나중에 네 부탁 하나 들어줄게."
"됐거든요?"
찰스가 토라진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최기석은 찰스와 대화를 나누다가 카타리나와 합류하여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의진대를 찾았다.
의진대에서 진행하는 세계흉부외과 심포지엄.
이번 심포지엄은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규모로 진행되며 각지의 내로라하는 써전들이 참여한다.
그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도 왔으면 좋겠는데…….'
최기석이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답답함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의진대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심포지엄이 개최되는 별관 대강당을 찾았다.
가는 도중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각국의 써전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각 대륙에 있는 써전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그것도 대단한 장관이었다.
"반갑습니다."
일행이 명찰을 받고 지나가는데 한 중년 남성이 강당 입구에서 인사를 건넸다.
"의진대 흉부외과 과장 김영철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카타리나예요."
카타리나가 대표로 김영철과 악수를 나눴다.
"MHC에 훌륭한 써전들이 와 주시니 이 자리가 더 빛날 것 같습니다."
"우리야말로 초대받아서 영광이에요. 한국은 실력 있는 흉부외과 써전들이 많잖아요. 당장 MHC에서 근무 중인 진료부원장님도 있고 여기 기석 최도 있고."
"하하하. 공교롭게 다 의진대 출신이군요."
말을 마친 김영철이 최기석을 응시했다.
곁에 있는 카타리나와 찰스를 의식했는지 그는 계속해서 영어를 사용했다.
"반가워요. 날 보는 건 처음이죠?"
"네. 제가 수련 중일 때는 장혁필 부원장님이 흉부외과 과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장혁필 부원장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실력도 좋으시고 수완도 좋으시고. 나도 부원장님의 반만 따라갔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김영철이 화제를 돌렸다.
"이틀 전 우리 과를 방문했다고 들었어요. 마침 T.
A 환자가 와서 영호가 집도하는 걸 도왔다면서요?"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영호가 잘했죠."
"하하하. 듣던 대로 겸손하군요. 혹시 MHC 수련이 끝나면 의진대로 복귀할 생각은 있습니까?"
김영철의 질문에 카타리나와 찰스가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배울 게 많아서요. 펠로우 수련이 끝난 후에 천천히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
"과장님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혹시 프랑스의 샬롯이 심포지엄 초대를 받았나요?"
"프랑스에 천재적인 내과의이자 수술 연구가를 말하는 거죠? 초청은 했는데 답변은 못 받았어요. 혹시나 해서 자리는 마련해 놨지만 올지는 의문이네요."
"알겠습니다."
잠깐의 대화가 끝나고 일행이 대강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식순이 적힌 팸플릿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심포지엄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었는데 오전에는 대동맥 질환과 마르팡 증후군, 로봇 수술, 무수혈 수술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오후에는 세이버 수술 시연과 기타 소아심장 파트에 대한 토론이 마련되었다.
"오랜만이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장혁필이 웃고 있었다.
"과장님…… 아니 진료부원장님. 이게 몇백 년 만에 뵙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너스레는 여전하구나.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네. 금방 나가겠습니다."
"휴게실에 있을 테니까 그쪽으로 와."
최기석은 카타리나와 찰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장혁필이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2년 만에 보는 장혁필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겉모습도, 짧은 대화에서 느낀 이미지도 말이다.
오직 달라진 것은 최근 진료부원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영호에게 네 이야기 들었다. 기왕 왔으면 내 얼굴도 보고 가지 그랬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셨고 심포지엄 준비로 바쁘실 것 같아서요. 뒤늦게라도 부원장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장혁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MHC 수련은 할 만해?"
"얼마 전에 외과 로테이션 끝내고 흉부외과에 들어왔습니다. 진짜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죠."
"뭐. 너라면 잘하겠지. 워낙 괴물 같은 녀석이니까 걱정도 안 된다만."
"그래도 걱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조그만 관심과 사랑이 고픈 상황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는 잘할 거라면서 마음을 놓고 있어서요."
그의 농담에 장혁필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기석이가 원한다면 해 줘야지. 옜다. 걱정."
"감사합니다. 오늘 오후에 세이버 수술 시연이 있는 거로 아는데……. 집도는 부원장님이 하시는 겁니까?"
"아니. 태식이가 해. 나도 슬슬 수술을 줄일 때가 됐지. 가끔 VIP 환자만 건드리고 나머지는 전부 태식이 몫이야."
김태식.
그는 최기석이 정해진으로 살았을 때 수련을 도왔던 선배다. 우연히 의진대에서 재회했는데 당시에는 같이 세이버 팀 활동을 했다.
"태식 선생님이 세이버 수술 집도를 한다니……. 꼭 보고 싶네요."
"지금 나 디스하는 거니?"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태식 선생님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다는 소리에요."
최기석의 말에 장혁필이 열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지금의 태식이라면 국내 심장외과 파트에서 톱 텐에 들어갈 거야. 그 녀석도 천재야. 물론 너랑 비교는 할 수 없겠지만."
"절 너무 띄워 주시는 거 아닙니까?"
"단지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넌 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 스스로를 낮추고 있는 것뿐이고."
장혁필의 말에 최기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과연 수완가다운 날카로운 분석이다.
"그건 그렇고 요새 조지환 병원장님이 심상치 않다."
"병원장님이요?"
"네가 예전에 술자리에서 말한 적 있잖아. 어쩌면 병원장님이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병원장이 되면서 행동이 많이 바뀌었거든."
장혁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병원장님 속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이러다가 금방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건 악한 사람과 의도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송한 말이군."
"병원장님을 조금 더 지켜보면 부원장님도 제 말뜻을 알게 될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심포지엄 시간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장혁필과 대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 * *
한국에서 열리는 최초의 세계 흉부외과 심포지엄.
그 진행은 깔끔하고 흠잡을 데가 없었다. 오랜시간 준비를 한 덕분인지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들었으며 참석한 써전들의 참여도 역시 열광적이었다.
그렇게 오전 일정이 끝나고 점심 및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어라? 저 사람은?'
그의 시선이 로비를 걷는 한 여성에게 고정되었다.
허리까지 닿은 짙은 금발.
아름다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뿔테 안경.
여성을 확인한 순간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짜릿해졌다.
"교수님. 저분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왜? 교제라도 하려고? 한국에 애인 있다면서."
"저 지금 장난 아닙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최기석은 허겁지겁 여성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눈에서 멀어지기 전에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실례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MHC 써전 기석 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샬롯이라고 해요."
초면임에도 샬롯이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혹시 괜찮다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안 될 이유가 없죠."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최기석은 샬롯과 함께 2층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성향: 환자 중심]
체력: 5/10
진단력: 8/10
외과적 처치: 3/10
내과적 처치: 9/10
평판: 8/10
정치력: 1/10
카리스마: 1/10
연구력: 9/10
샬롯은 다른 의사와 달리 연구력 스탯을 소유했다.
그녀는 뛰어난 내과의이면서 동시에 각종 수술 및 의공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별종이라고 해야 할까.
또한, 별종답게 각종 스탯이 정상급이었다.
"분명 기석 최라고 했죠? 혹시 몇 년 전에 있었던 샴쌍둥이 수술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샬롯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넷에서 생중계하는 걸 봤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지는 못했지만, 완전 감동이었어요. 쌍둥이 머리가 떨어진 채로 수술실에 나왔을 때는 소리까지 질렀다니까요."
샬롯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달아오른 표정을 보면 속내가 쉽게 밖으로 표현되는 타입인 듯 보였다.
"좋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샬롯처럼 응원해 주신 분들 덕분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죠. 쌍둥이들도 지금 건강하게 지내고 있고요."
"다행이네요."
"사실 제가 샬롯을 보자고 한 건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성향이 환자 중심인 그녀라면 이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상의요?
"네. 새로운 심장 수술을 개발 중인데 샬롯의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최기석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