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 (2)
똑. 똑. 똑.
노크를 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교수님. 교수님."
최기석은 카타리나를 부르며 문을 조금 더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산발의 카타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눈은 살짝 풀려 있었으며 몸을 가누기 힘들어보였다.
그녀 역시 소맥의 희생자였다.
"미스터 최?"
"방에 계셨네요.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돼서 찾아왔습니다."
"미안. 방금 깼거든."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같이 먹자."
"그럼 씻고 식당으로 오세요. 그 전에 이것 좀 드시고요."
카타리나는 최기석이 내민 음료수를 받아들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찰스와 데칼코마니였다.
"숙취해소 음료입니다. 마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땡큐."
잠시 후 세 사람이 호텔 식당에 모였다.
최기석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
"심포지엄이 내일이니까 오늘까지는 쉬어도 되겠네. 일정은 생각해 봤어?"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드리려고 했습니다."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만나 볼 사람들이 있는데…… 오늘은 개별행동을 해도 될까요?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편할 대로 해. 대신 내일 심포지엄 참석에 피해 가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호텔에서 논문 정리할 생각인데, 찰스는?"
"저는…… 한국 관광을 조금 더 해보려고 합니다. 사우런 타워를 비롯해서 몇 군데 들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래. 찰스도 휴가 왔다 생각하고 잘 쉬고."
아침식사와 함께 스케줄 조율이 끝났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한 후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삼십 분 가까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오류동의 주택가.
휴대폰에 적어 둔 주소를 더듬거리며 한 집 앞에 멈췄다.
띵동!
"누구세요?"
"저 최기석입니다."
"어? 선생님이다. 들어오세요!"
상대방의 우렁찬 목소리에 귀가 따가웠지만 웃어 넘겼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가 현관에 서자 김두진과 임진희가 반갑게 그를 맞아 주었다. 특히 김두진은 성큼성큼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기기까지 했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이야! 우리 두진이 못 본 사이에 키가 훌쩍 컸는걸? 조만간 선생님 따라 잡겠는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잠시 학회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셨고 두진이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로 하셨다면서요?"
잠자코 있던 임진희가 대화에 껴들었다.
"아, 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최 선생님은 누가 뭐래도 저희 가족의 은인이세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방으로 가요."
김두진이 손을 잡아끌자 최기석은 그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김두진의 방은 소박했지만 피아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 한편에 커다란 피아노가 놓였으며 주변에는 온통 피아노에 관련된 책뿐이었다.
또래 아이들의 놀이거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최기석과 김두진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선생님. 피아노 쳐 본 적 있어요?"
"아니. 전혀."
"하긴 의사가 되려면 공부만 했을 것 같긴 해요."
김두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선생님은 여자친구 때문에 피아노를 배우는 거잖아요. 비교적 연주하기 쉽고 멜로디가 감미로운 곡을 준비해 봤어요."
"선곡을 잘해 주면 고맙지. 잠깐만."
[용의 눈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자동으로 최적의 수술 시야를 제공합니다.]
[동영상 모드 촬영을 시작합니다. 필요에 따라 줌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 입체화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기석은 스킬 사용 후 피아노를 응시했다.
병원에서 수련하며 연주 연습을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할지 몰랐기에.
무엇보다 큰 문제는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편법이 바로 이것.
이 방법이 먹힌다면 적어도 올해 안에는 정설화에게 멋진 이벤트를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왜요? 피아노 앞에 서니까 긴장돼요?"
"그런 것 같네."
"에이.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매일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잖아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죠."
"우리 두진이 많이 컸네. 선생님 위로도 해 주고."
"원래 음악 하는 사람은 마음이 넓어요."
김두진이 방긋 웃으며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두두두두둥. 띠리리리링.
무질서한 손 풀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연주의 막이 올랐다.
이윽고 김두진의 아이 같은 모습이 사라지고 천재 피아니스트로서의 면모가 드러났다.
그의 손가락은 건반 위에서 날뛰었고 여린 몸은 멜로디의 흐름에 휩쓸려 춤을 추었다.
예전 연주회에서 봤던 것처럼 김두진은 온 몸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따라라라. 딴딴딴.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하니 꽃들이 화사하게 핀 정원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최기석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설화가 이 연주를 듣는다면 눈에서 하트가 쏟아질 것이라고.
"어때요?"
연주를 끝낸 김두진이 최기석을 바라봤다.
"끝내주는데? 내가 연주만 할 수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
"선생님 마음에 든다니 저도 좋네요. 이 곡의 제목은 봄바람이에요. 후렴구 연주가 어렵지 않아서 많이 도전하는 곡이죠. 선생님이 정기적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으면 후딱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괜찮아. 나머지는 선생님이 알아서 할 게."
최기석이 김두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선생님이 건반을 쳐 보세요. 우선 학교종이 땡땡땡 한 번 쳐 보실래요? 계이름은 아시죠?"
"당연하지."
최기석은 한 손으로 학교종이 땡땡땡을 쳐 보았다.
몇 십 년 만에 두드리는 건반이지만 손이 의외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더듬더듬 건반을 두드린 게 아니라 음이 연결되도록 친 것이다.
"잘하시네요."
"흠흠……. 칭찬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선생님이 고래니?"
최기석의 농담에 김두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은 마치 출생의 비밀을 알아 버린 드라마 속 주인공 같았다.
이 개그가 그렇게 형편없었단 말인가.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고 양손 연주로 가자."
"네. 피아노 배운 사람들한테는 아주 기초적인 곡인데 선생님한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어요. 악보 볼 줄은 아세요?"
"알아."
"그럼 천천히 시작해 보세요. 우선 처음부터 빨리 하려고 하지 마세요. 왼손으로는 추임새를 넣는다는 느낌을 가지면 조금씩 익숙해질 거예요."
"시작한다."
최기석이 마침내 양손 연주에 나섰고 김두진은 팔짱을 낀 채 최기석을 지켜보았다.
'이건 뭐지?'
김두진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으로 변해 갔다.
피아노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는 최기석이다. 그런데 양손 연주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왼손을 거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왼손 연주가 깔끔했다.
사실 오른손과 왼손의 움직임을 다르게 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뇌에서 정보를 처리하는데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기석은 자유자재로 양손을 사용 중이다.
혹시 그동안 연주 재능을 숨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휴우…… 생각보다 힘드네. 악보 보면서 치니까 힘이 두 배로 든다."
연주를 끝낸 최기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하세요."
"뭘?"
"정말 피아노 처음 쳐 보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선생님이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니?"
"……이상하다. 양손 연주를 처음 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선생님 피아노 천재예요?"
"배우는 게 꽤 빠르지?"
최기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피아노 초보인 그가 비교적 손쉽게 연주를 끝마친 이유.
그것은 양손잡이 스킬 덕분이다.
집도와 봉합 연습으로 다져진 양손잡이 스킬은 일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과거 의진대 인턴 시절 저글링에 성공해서 경품을 타지 않았던가.
"난이도를 조금 올려 볼게요."
"좋아."
그의 두 번째 양손 연주가 시작되었다.
최기석은 이번에도 김두진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우와. 저 정말 귀신에 홀린 기분이에요. 악보 외우고 몇 가지 테크닉만 배우면 실력이 금방 늘겠어요."
"……."
"선생님. 혹시 의사 관두고 피아노 치실 건 아니죠?"
"왜? 그래 볼까?"
"안 돼요. 라이벌이 늘어나는 건 사양이에요."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로 두 시간 가량의 연습이 이어졌다.
김두진은 몇 가지 연주기법을 알려 주면서 안 좋은 버릇들을 잡아 주었으며 최기석은 집중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정설화에게 받기만 했던 사랑을 이제는 돌려주고 싶었다.
연주를 듣고 감동할 그녀를 생각하자 전투력이 갈수록 커졌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진아. 잘 가르쳐 줘서 고맙다."
최기석은 현관에 서서 김두진과 임진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네.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습니다. 언제든지 찾아 주세요."
"막히는 부분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집을 나온 그는 오는 길에 봐둔 놀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네에 앉아 서둘러 상태창을 띄웠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확인해 보고 싶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셨습니다(입장횟수1/8)]
[집도 수술로 김두진의 피아노 레슨을 선택하셨습니다. 촬영 동영상이 수술이 아니더라도 특수효과 실전이 적용됩니다.]
[PVP 모드 전환이 가능합니다.]
휘이이이잉.
눈부신 빛이 뿜어지고 그가 앉아 있는 공간이 변했다.
그곳은 바로 방금 전까지 있었던 김두진의 방이다.
혹시나 했던 상상이 역시나가 되는 순간, 최기석은 기쁨에 겨워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렇게 된다면 병원에서도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다.
정설화에게 이벤트 해 줄 수 있는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셈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최기석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바로 그 시각.
놀이터를 지나가던 한 모녀가 있었으니…….
"엄마. 저 아저씨 왜 저래?"
엄마 손을 붙잡고 있던 여자아이가 최기석을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
"눈 감고 허공에 막 손을 허우적거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미친 사람인가 봐."
"미친 사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말하는 거야. 저런 사람들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해야 돼."
엄마가 관자놀이 근처에서 검지를 빙빙 돌리자 아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엄마. 저 아저씨는 왜 미쳤어?"
"자세한 건 엄마도 모르지만 아마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쯧쯧즛. 젊은 나이에 왜 저렇게 됐을까? 부모님이 저 꼴을 봤으면 속이 찢어졌을 텐데……."
"엄마. 난 저 아저씨처럼 안 될 거야. 그리고 나중에 꼭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될게."
"그래. 우리 혜진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의사 선생님이 되면 저렇게 아픈 사람들을 잘 치료해 줘야 한다?"
"응!"
모녀는 불쌍하다는 듯 최기석을 한 번 더 바라보고 갈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