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 (1)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최기석은 정설화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는 내내 두 사람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보통 커플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평범한 행동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기에 함께 있는 사소한 순간순간들이 소중하기만 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다."
정설화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게. 천국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야. 설화 너랑 있는 곳이 천국이지."
"꺅. 뭐야. 느끼해."
"느끼해도 참아. 진심이란 말이야."
"그럼 봐줄게."
잠깐에 대화가 끝나고 정설화가 운을 뗐다.
"한국에는 얼마 동안 있어?"
"나흘 뒤에 떠나. 내일까지 쉬고 모레 심포지엄 참석하고 그다음에 출국하지 않을까 싶어."
"빡빡하네. 그런데 괜히 나 만난다고 다른 스태프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그럴 것 같지?"
최기석이 빙긋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럴 줄 알고 낮에 소맥으로 재워 놨어. 아직도 숙취 때문에 죽을 맛일걸?"
"스태프한테 소맥을 먹였어?"
"어차피 심포지엄 반, 휴가 개념 반으로 온 거라 적당히 놀아도 돼. 중요한 건 너를 만나는 게 문제 될 일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다행이고."
"아버님은 건강하시지?"
"응. 치료받고 나서 은퇴도 하셨고 건강관리도 잘하고 계시니까."
최기석은 두 달에 한 번씩 정진명과 화상 통화하며 건강을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적신호가 온 적은 없었다.
본인의 관리, 그리고 그의 관리가 더해진다면 암이 재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메뉴를 주문하고 서로의 손을 매만졌다.
커플링이 천장 등에서 흐르는 빛을 반사하며 세상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기석아. 혹시 채연이 알아?"
"당연하지. 너랑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이잖아."
"채연이 저번 달에 결혼했다?"
"진짜?"
"식장에서 드레스 입은 걸 보니까 정말 예쁘더라. 신랑하고 있는 것도 행복해 보이고."
"하긴 앞으로 결혼하는 동기가 점점 많아지겠다."
최기석은 정설화의 표정을 살피며 답했다.
예전이라면 눈치 없이 이 타이밍에 대화를 끊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치력이 올라간 덕분에 정설화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잡아낼 수 있었다.
"설화야."
최기석은 정설화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러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도 결혼할 거잖아."
그의 돌직구에 정설화의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앗빛을 띠었다.
"그…… 그건 그렇지만……."
"MHC에서 수련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면 그때 프러포즈할게. 가족끼리 인사도 하고."
"그렇게 빨리? 너한테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한국에서 일할 병원도 알아봐야 하고 적응도 해야 되고……."
"너를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하루라도 빨리 널 내 여자란 만들고 싶기도 하고."
"……."
정설화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행복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항상 원해 왔던 것이 이런 확신이었기에.
"그러니까 수련 끝날 때까지만 조금 더 날 지켜봐 줘. 마지막으로 부탁해도 되지?"
"응. 괜찮아."
"참고로 나 빼고 다른 남자는 다 늑대라는 거 명심하고."
"내가 봤을 땐 기석이 네가 제일 늑대 같은걸?"
정설화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음식과 와인을 곁들이며 대화가 이어졌다. 근 육 개월 만의 만남이었던 만큼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어떤 환자들을 만났는지, 동료 스태프들의 성격은 어떤지 등등.
시시하면서 사소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서로를 그리워했던 마음의 공백이 서서히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자정 무렵 레스토랑을 나왔다.
오늘은 밤늦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설화야. 너무 과음한 거 아니야?"
"괘, 않아."
정설화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를 내며 비틀거렸고 최기석은 그녀를 부축해서 택시를 탔다.
이윽고 도착한 호텔.
최기석은 만취한 정설화를 침대에 눕히고 찬물을 마셨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욕실에서 샤워한 후 그녀의 곁에 누웠다.
정설화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는데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잘 자."
정설화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온갖 잡생각이 들고 마음이 싱숭생숭하게 들떴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담장 넘어가는 양을 세는 최기석.
"나 사실…… 안 자는데."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정설화가 뒤돌아 누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벌써 술 깼어?"
"아니? 처음부터 안 취했어."
뜻밖의 말이 뒤통수를 때렸다.
최기석은 몸을 돌려 놀란 토끼 눈으로 정설화를 응시했다.
"안 취했는데 취한 척을 한 거라고? 왜?"
"헤헤.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그때라니?"
"너 심장이식 수술받고 태호랑 술 약속 잡은 거 기억해?"
"못할 리가 없지. 강남에서 술 마시다가 너랑 한의사 선생님 CPR로 구했잖아. 그다음에 너 자취방에서 잤고."
"잘 기억하네. 나 아까 와인 마시던 중에 그때 기억이 나서 한 번 따라 해 봤어. 너 날 옆에 두고 코까지 골면서 세상 편하게 잤잖아."
"으윽…… 그럼 이건 복수?"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해 봤어."
정설화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먼저 씻었지? 나도 씻고 올 게."
"알았어."
이윽고 샤워를 마친 정설화가 속옷 차림으로 다가왔다.
평소와는 달리 속옷이 화끈했다.
속옷은 연 보랏빛이었으며 속이 다 비치는 망사였다.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에 최기석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내가 그냥 잤으면 우리 기석이 섭섭해서 울었겠네?"
"칫. 도착하자마자 깡 생수 마시면서 계속 울고 있었거든?"
최기석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고 그의 곁에 정설화가 앉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상황.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꽃잎처럼 보드라운 정설화의 입술과 인중을 간질이는 뜨거운 숨결.
키스가 깊어질수록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최기석은 정설화와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몸을 매만졌다.
스킨십이 강해질수록 정설화의 숨소리는 거칠어졌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옅은 신음이 흘렀다.
그는 키스와 애무를 이어가다가 정설화를 침대에 눕혔다.
은은하게 흐르는 천장 빛.
그 아래로 망사 속옷 차림의 정설화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 매력적인 모습에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최기석은 들 끓어오르는 욕정에 몸을 맡긴 채 그녀와 몸을 포갰다.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애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 *
"으음……."
정설화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중 최기석이 곁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아니면 급한 일로 자리를 비웠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 오전 6시 30분,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어제는 너무했나?'
지난밤을 떠올리는 그녀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최기석과 열정에 넘치는 밤을 보내면서 평소보다 신음이 컸다. 호텔 방음이 좋다는 건 알지만 괜히 옆방 사람이 신음을 들었을까 봐 부끄러웠다.
"일어났어?"
"응. 방금.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이것저것."
최기석이 대충 얼버무리며 곁에 앉아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설화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어깨에 몸을 기댔다.
연애를 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최기석이 너무 좋았다.
연애 초반의 설렘과 풋풋함도 여전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피곤하지?"
"괜찮아. 레지 때처럼 당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어제 속옷 진짜 끝내주던데? 네가 그런 걸 입을 줄 몰랐어."
"바…… 바보!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너무 섹시하고 잘 어울렸다고 칭찬하는 건데……."
금방 시무룩해 하는 최기석을 보며 정설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또 기죽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이리 와."
정설화는 두 손으로 최기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자신의 품에 안았다.
"오늘은 정말 출근하기 싫다. 너랑 더 같이 있고 싶어."
"나도 그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씻고 나와. 방금 조식 주문했으니까 금방 올 거야."
"응."
잠시 후 두 사람이 식탁에 앉아 서로를 마주 봤다.
식탁을 훑는 정설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뭐야?"
"북엇국. 아까 일어나서 편의점에서 사 왔어. 저번에 네가 미국에 와서 미역국 끓여 준 적 있잖아. 나도 뭐라도 대접해 주고 싶어서."
"고마워."
정설화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이 정도로 감동하면 안 돼. 그러면 나중에 프러포즈할 때는 네 눈물로 서울이 잠길지 몰라."
"그럴까?"
"암, 나만 믿으라고."
정설화는 호텔 조식과 최기석이 차려 준 북엇국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따뜻한 국을 먹어서 그런지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곧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의진대까지 같이 가자."
"밤새 나랑 있었는데 이제 스태프들 얼굴도 봐야지. 혼자 갈 수 있어."
"그래도……."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오늘 하루 푹 쉬고 여유 나면 가족들도 보고 그래."
"알았어."
"사랑해."
정설화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택시에 탔다.
최기석은 멀어지는 택시를 지켜보다가 걷기 시작했다.
정설화와 묵었던 호텔과 MHC 스태프들이 있는 호텔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의진대 심포지엄은 내일이라 오늘까지는 여유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 남았다.
최기석은 편의점에 들러서 찰스가 있는 호텔 룸에 들어갔다.
"왔어?"
침대에 걸터앉은 찰스가 최기석을 응시했다.
숙취 때문인지 그는 하루 만에 폭삭 늙은 느낌이다.
"소우 맥. 이거 장난 아닌데? 멋모르고 마셨다가 저승사자랑 인사할 뻔했어."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고 했잖아."
"그럴 순 없지. 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술을 퍼마시겠어?"
"어련하실까? 됐고 이거 받아."
"뭔데?"
찰스는 최기석이 건넨 캔 음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캔은 보통 음료와 달리 겉면이 투박했으며 한 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방긋 웃고 있었다. 남성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음료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어명 007이라고 한국에 대표적인 숙취해소 음료야."
"사람을 보고 있으면 술이 안 깰 수가 없겠네."
찰스는 용기를 내서 음료를 마셨다. 달곰한 게 맛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교수님께 연락은 해 봤어?"
"아직. 나도 이제 막 정신 차렸거든."
"내가 연락해 볼게."
최기석은 카타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애타는 신호음만 흐를 뿐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문제라도 생긴 걸까?
최기석은 곧장 카타리나가 묵는 방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