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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97화 (296/407)

강행돌파 (5)

그날 오후.

최기석과 카타리나, 찰스는 명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심포지엄은 이틀 뒤에 열리는데 그때까지는 온전히 자유시간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스태프들을 위해 야사다가 출국기간을 길게 잡아 주었던 덕분이다.

"여기는 외국 사람들이 많네?"

카타리나가 거리를 훑으며 한마디 했다.

"원래 명동은 외국인 관광지로 유명해요. 주로 아시아계 사람들이 찾아오죠. 저기 있는 것들만 보셔도 이해가 갈 겁니다."

최기석이 검지로 간판들을 가리켰다.

간판에는 중국어와 일본어 등이 적혀 있었다.

"그나저나 지금 가는 곳은 어디?"

"남산타워."

"쩝. 난 남산타워보다 사우런 타워에 가보고 싶은데."

아쉬움을 삼키는 찰스를 보며 최기석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명동 거리를 살피던 일행은 곧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올랐다.

분홍빛으로 물든 산자락.

최기석은 고국에서 봄을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도시 한복판에 산이 있을 수 있지?"

"외국 사람들은 다 그걸 신기하게 생각하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은 일상이라 별 감흥이 없는데."

"부러워. 삭막한 도시에 산이 있다는 게."

카타리나는 케이블카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남산타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데이트를 즐기는 청년층이었다.

"우와! 죽이는데?"

찰스가 풍경을 훑으며 입을 쩍 벌렸다.

"서울이 한눈에 보인다. 경치도 환상적이야."

"바람도 적당히 선선하고 벚꽃도 보기 좋아. 오길 잘한 것 같아."

"두 사람이 좋아하니까 저도 뿌듯하네요."

"미스터 최. 서울은 축복받은 도시야.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여기만 오면 뻥 뚫릴 것 같아."

"글쎄요.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걸요?"

카타리나의 말에 최기석이 고개를 저었다.

"왜?"

"교수님은 서울의 좋은 것만 보고 있어서 그래요. 서울의 인구밀도는 세계 6위예요. 아침에는 교통체증이 말도 못하죠. 출근 시간에 지옥철을 타 보면 그런 말 못하실 걸요?"

"지옥철?"

"지하철이 너무 붐벼서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에요. 하여간 제가 너무 많이 나갔네요. 우리는 놀러 온 거니까 충분히 즐기다 가죠."

최기석은 동료들과 남산타워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중에 소원을 적은 자물쇠를 쇠창살에 걸어 보기도 했다.

남산 투어를 끝내고 명동으로 돌아오자 오후 두시가 되었다.

꾸르르륵.

"계속 걸어 다녀서 그런가? 배가 고프네?"

찰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그럴 만도 하지. 교수님도 배고프시죠?"

"응."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점심이라도 먹죠."

최기석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음식점을 살폈다. 간장게장과 청국장을 비롯해서 먹고 싶은 음식이 넘쳤지만 오늘은 미국 사람인 카타리나와 찰스가 동행했다.

그들의 입맛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찾았다!'

최기석의 시선이 한 음식점에 고정되었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음식은 외국인에게 대접해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저기로 가죠."

최기석이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주문을 끝내자 종업원이 밑반찬을 세팅해 주었고 카타리나와 찰스는 밑반찬을 보며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우리가 이런 것도 시켰어?"

"한국에서는 음식을 시키면 이렇게 반찬이라는 걸 내줘. 그러고 보니 둘 다 다 한국에 온 건 처음이죠?"

"맞아."

"아시아 쪽은 일본만 한 번 가 봤어. 솔직히 한국은 북한 이야기도 있고 해서 조금 꺼려지더라고."

카타리나가 말을 마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외국인들은 북한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항상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 듯싶었다.

"그런데 미스터 최. 우리 뭐 먹어?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은데……. 혹시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이 나올까 걱정된다."

"걱정 마. 이 음식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믿어도 되는 거지? 사실 내 혓바닥은 미슐링 쓰리 스타급이라고. 맛없으면 그냥 아웃이야."

"장담하건대 아웃이 아니라 스트라이크가 될걸?"

최기석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찰스의 걱정을 잠재웠다.

잠시 후 불판이 달궈지고 종업원이 음식을 불판 위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그랬다.

최기석이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스페셜 메뉴.

그것은 바로 삼겹살이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익으면서 하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퍼졌고 맛있는 냄새가 코끝에서 살랑거렸다. 찰스와 카타리나가 군침을 흘리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신기하죠? 이렇게 직접 불판에 고기 구워 먹는 거?"

"당연하지. 고기구이라고 하면 보통 스테이크나 야외에서 바비큐 구워 먹는 걸 생각하니까."

"일단 냄새는 합격!"

카타리나와 찰스가 한마디씩 했다.

"이제 다 익은 것 같은데 일단 고기만 먼저 먹어봐요."

최기석의 말에 두 사람이 어설픈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집도에 능한 카타리나조차 젓가락 사용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손에서 자꾸 미끄러져."

"이상하다. 분명 배운 대로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갖은 고생 끝에 고기를 한 점씩 입에 넣었고 최기석은 둘의 표정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삼겹살의 매직은 통할 것인가.

"와우! 죽이는데!"

"맛있어!"

찰스와 카타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식감이 적당하고 육즙도 풍부한 게 너무 맛있다."

"스테이크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쌈장에 찍어서 먹어 봐요. 쌈장은 일종에 소스라고 생각하면 돼요."

최기석의 제안을 따르는 두 사람.

이번에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맛있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최기석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랑해요. 삼겹살.

* * *

최기석은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왔다.

"나 먼저 누울게. 소우맥? 그거 너무 쌔."

찰스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여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삼겹살 파티를 하던 중 우연치 않게 술도 같이 마시게 되었다.

항상 응급대기 중인 흉부외과의다.

마음 놓고 술 마실 기회가 없었기에 찰스와 카타리나는 죽자고 술을 퍼마셨다. 심장 이식을 받은 최기석은 소주 한 잔 정도만 비웠지만 말이다.

최기석은 외출하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호텔을 떠났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의진대.

심포지엄이 있어서 어차피 찾게 되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옛 동료들과 편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선 일정에 쫓길게 뻔했다.

사적인 자리를 만드는 것 또한 동행한 카타리나와 찰스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최기석은 익숙한 흉부외과 복도를 걸으며 옛 추억에 잠겼다.

픽스턴을 결정하고, 최미순을 만나고, 100일 당직을 지새우고, 세이버 팀 소속으로 활동했던 게 엊그제 같건만 벌써 그로부터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나온 순간들을 돌이키자 야릇한 감정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영호가 휴게실에 있을 거라고 했지?'

사전에 통화한대로 휴게실로 향하는데 휴게실 앞에서 그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야! 미쳤어! 대체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투약 오더 내릴 때 한 번 더 생각하라고 했지. 네가 꼴리는 대로 처방만 내리면 끝이야? 환자 생각 안 해?"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오늘이 두 번째다. 한 번 더 똑같은 실수해 봐. 잘못 처방한 약, 너한테 먹여 버릴 테니까."

살벌한 대화가 끝나고 벌컥 문이 열렸다.

"어? 선배?"

"영호야. 오랜만이다. 그나저나 후배 너무 빡세게 잡는 거 아니야?"

"얘가 한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꾸지람은 솜방망이예요."

이영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이영호.

최기석의 제안으로 흉부외과 전공을 선택했으며 세이버 팀 활동 중 그와 사제 관계를 맺기도 했던 인물이다.

비록 미국에서 수련 중이지만 최기석은 이영호에게 논문을 보내 주고 그의 봉합 솜씨를 점검해 주었다.

스승 송명진이 해 준 것처럼 말이다.

"오자마자 안 좋은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하네요. 하여간 선배 너무 반가워요."

"동감이다."

"헤헤. 일단 1층 카페로 가실래요?"

이영호의 제안으로 카페를 찾았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의젓해진 것 같다."

"당연히 그래야죠. 저도 엄연히 4년 차 치프 레지던트라고요."

"세월 참 빠르네. 우리 영호, 나랑 같이 있었을 때만해도 파릇파릇한 인턴이었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는데."

이영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는 미국에서도 완전 날아다니시던데요. 총기 사건도 있었고, 사망진단서 사건도 있었고, 전 세계에 라이브 샴쌈둥이 수술도 했잖아요."

"……."

"미국에 넘어가면서 스케일이 더 커진 것 같아요."

"병원이 크고 환자가 많으니까 자연히 그렇게 되더라."

"글쎄요. 그게 정말 병원과 환자 탓일까요? 문제는 선배의 환타 본능이 아닐까요?"

"어쭈! 요놈 봐라!"

"때리실 건가요? 가뜩이나 흉부외과 스태프 부족한데 손찌검까지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이영호의 농담에 최기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그는 이영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6/10

진단력: 3/10

외과적 처치: 4/10

내과적 처치: 3/10

평판: 6

정치력: 3

카리스마: 3

이영호의 스탯은 준수했다.

우선 처치에 관련된 스탯이 동기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으며 정치력이나 카리스마도 고른 성장을 보였다. 더불어 봉합에 관련된 스킬을 두 개나 가졌다.

그동안 수련을 지켜봐 준 보람이 있었다.

"의진대는 요즘 어때?"

"흉부외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요. 장혁필 과장님이 얼마 전 진료부원장님으로 승진해서 새 과장님이 왔지만 그분도 나쁘지 않고요."

"장 과장님이 또 승진하셨어?"

"네. 흉부외과 클리닉을 성공적으로 키웠으니까요. 지금 의진대 흉부외과는 흉부외과 빅 파이브 중 한 곳이에요."

"용 됐네."

"그렇죠? 그래도 선배가 있었으면 넘버원이 됐을 텐데……."

"뭐.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그리고 또 변한 점이……."

이영호가 말끝을 흐리며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왜?"

[…….]

"하아…… 금방 갈게. 선배 죄송한데 응급환자가 생겨서요. 대화는 나중에 해야겠는데요."

"어쩔 수 없지. 같이 가자. 구경하는 건 상관없잖아."

"저야 그러면 든든하죠."

두 사람이 허겁지겁 응급실로 향했다.

"치프! 이 환자입니다."

아까 전 혼쭐이 났던 인턴이 다급한 목소리로 환자를 가리켰다.

"T.

A(교통사고) 환자인데 호흡과 맥박이 바닥입니다. 흉부 엑스레이와 CT 촬영 결과 갈비뼈 골절, 심낭압전, 횡격막 파열이 의심됩니다."

"횡격막 파열? 영상 띄워 봐."

"네!"

"하필…… 이 타이밍에……."

이영호가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수술실 잡고 수술 가능한 써전 있는지 알아봐. 나는 처치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인턴이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도와줄까?"

"이 정도는 혼자 처리할 수 있어요."

이영호는 기관을 삽관하고 산소를 투여했다. 그리고 승압제를 정맥으로 주입한 후 흉강천자를 통해 심장을 압박하고 있는 피를 뽑아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처치.

과거의 어리바리했던 인턴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최기석 앞에 있는 이영호는 한 명의 듬직한 흉부외과 레지던트였다.

"치프! 일단 수술실 예약은 잡았는데 수술 가능한 써전이 없습니다. 다들 심포지엄 준비로 바빠서 자리에 없어요."

할 일을 끝낸 인턴이 다가와 울상을 지었다.

'씨발.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이영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외상성 횡격막 파열은 응급증상이다. 파열된 횡격막을 복원하지 못하면 탈장과 함께 각종 후유증이 찾아올 수 있다.

"수술이라면 내가 도와줄까?"

"선배 말은 고맙지만 그건 안 돼요. 장혁필 과장님이 계셨을 때라면 모를까, 새로운 과장님은 선배를 모르잖아요. 절대 선배의 집도를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어떻게 하죠? 치프."

인턴이 발을 동동 굴렀고 이영호는 참담한 얼굴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에 동요가 없는 이는 오로지 최기석뿐이었다.

"영호야. 간단한 해결책이 하나 있다."

"그게 뭔데요?"

"집도, 네가 해."

"제가요?"

이영호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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