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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96화 (295/407)

강행돌파 (4)

그날 오후, 파커의 집무실.

파커는 소파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빛이 불안정하게 움직이다가 이내 테이블에 놓인 커피 잔으로 옮겨졌다.

"하아……."

한숨과 함께 절레절레 움직이는 고개.

파커는 최기석의 집도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흉부외과 전공을 선택한 애송이가 소아심장 수술을 해내다니…….

그동안 실력 있다는 써전을 수없이 만나 봤지만 최기석은 그중에서도 발군이다. 그에게 이만한 충격을 줄 써전은 아마 앞으로도 없으리라.

"피곤하게 됐군."

파커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벤슨이 수술을 거부하고 최기석이 집도에 나선 것까지는 계획대로였다.

문제는 수술 결과다.

최기석이 수술을 실패해야 차후의 계획이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계획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박살 내 버렸다.

"우리 편으로 끌어오기 전에 제대로 짓밟았……."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서 혼잣말이 끊겼다.

집무실로 들어오는 벤슨의 표정이 어두웠다.

"환자 상태는?"

"바이탈은 안정적이고 수술 후 검사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꼬투리 잡을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작전은 명백히 실패군.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미스터 최가 훨씬 더 큰 물고기인 모양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설마 중증의 폐동맥 협착증 수술을 성공시킬 거라고는……."

"동감이네. 집도를 허락한 야사다마저 벌벌 떨면서 수술을 지켜보기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어. 결국 이런 결과가 나왔지만 말이야."

"차라리 레지던트 집도 시스템을 뜯어 고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시도해 봤어."

파커가 혀를 차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사장님이 반대하더군.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사장님이 송 부원장을 좋아해. 송 부원장이 만든 시스템이라고 하니 유지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했어."

파커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다.

최기석이 수술에 실패했다면 자연스럽게 레지던트 집도 시스템까지 무너트릴 수 있었다.

"이번 일로 저도 완전히 붕 떠 버렸습니다."

벤슨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왜 수술 스케줄까지 잡아놓고 취소시켰냐고. 레지던트가 위험한 집도를 하게 만들었냐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

"언제 소문이 퍼졌는지 다른 과 의사들까지 저를 보고 손가락질까지 합니다. 후우……."

"신경 쓰지 마. 자네 뒤에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띠리리리링.

갑작스레 울리는 휴대폰.

파커는 번호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네, 이사장님. 파커입니다."

[…….]

"그게…… 제 생각에는 EOB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서……."

[…….]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탁!

통화를 끝낸 파커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탁자에 던졌다.

"이사장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내린 EOB 지침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라고 하셨어. 평가 실적을 중요시하는 건 MHC와 메이죠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하시더군."

"야사다 치프가 손을 쓴 걸 까요?"

"아마도…… 야사다는 송 부원장처럼 말랑말랑하지 않거든."

파커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직 시간은 많아. 플랜 B나 플랜 C까지 생각해 봐야겠어."

"꼬……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내 성격 알잖아. 당한 건 배로 갚아줘야지."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집무실에 퍼졌다.

* * *

흉부외과 헤드 치프 집무실.

최기석과 야사다, 송명진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송명진이 야사다의 사정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동맥 협착증 환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의 사건을 그는 까맣게 몰랐다.

진료부원장은 모든 진료과를 전반적으로 관리하기에 흉부외과만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야사다가 별일 없다고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믿었기에 이번 사건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너그럽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자네는 이미 은퇴를 선언했지 않나. 나도 그렇고 미스터 최도 그렇고 자네를 다시 수술실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어."

"……."

"만약 우리가 간절하게 부탁했다면 자네는 수술을 했을 거야. 안 그런가?"

"솔직히 부정은 못하겠군."

송명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은 위험했어. 만약 수술이 실패라도 했으면 셋 다 구정물을 뒤집어썼을 거라고."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벤슨 교수가 수술을 거부하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려서……."

"됐어. 자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이번 사건을 통해서 느낀 게 있나?"

"네. 확실히 있습니다."

최기석의 목소리에 기합이 들어갔다.

"써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실력을 키우는 일이라는 겁니다. 실력만 있다면 다른 써전의 행패에 굴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이미 건처럼 말입니다."

"……."

"하루라도 빨리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환자로 장난치는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이번 사건이 오히려 약이 됐군요."

송명진이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번 일은 용케 넘겼지만 앞으로가 걱정이군. MHC에 소아심장 파트가 약점이라는 건 여전하니까 말이야."

"그건 앞으로 걱정 안 해도 돼."

"무슨 뜻이지?"

송명진의 호언장담에 야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비밀병기가 도착했거든.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똑. 똑. 똑.

송명진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한 중년 남성이 집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성을 보며 야사다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최기석은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어서 와요, 권 교수. MHC에 온 걸 환영합니다. 이쪽은 흉부외과에 야사다 치프이고, 최 선생은 따로 소개 안 해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권일수가 차례대로 야사다와 최기석과 악수를 나눴다.

"최 선생. 귀신이라도 만난 표정인데?"

최기석의 표정을 살핀 권일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최기석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다.

"교수님이 MHC에 오실 줄 몰랐습니다."

"송 교수가 하도 와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 거머리보다 더했다니까."

권일수가 통성명과 인사를 끝내고 송명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권일수.

그는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소아흉부외과 수술의 대가다. 다만 소아심장 파트뿐 아니라 소아폐 파트까지 마스터한 이는 권일수밖에 없었다.

최기석은 의진대 수련 시절 그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권일수는 장혁필과의 권력싸움에서 패배한 후 요양병원을 전전했으며 최기석의 러브콜을 번번이 거절해 왔다.

"권 교수가 왔으니 소아 파트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걸세. 벤슨도 같은 수법을 못 쓰겠지."

송명진이 권일수의 약력을 설명하자 야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송 교수가 추천한 분이니 훌륭한 분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초면에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꼭 하고 싶군요."

"말씀하세요. 알아서 잘 가려들을 테니."

권일수의 농담에 야사다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야사다가 폐동맥 협착증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집무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미국에서라면 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의사 일은 결국 거기서 거기더군요. 미국은 그나마 이런 케이스가 빈번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수술을 최 선생이 집도했다고요?"

권일수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고정되었다.

"네. 제가 집도했습니다."

"케이스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

"원한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환자는 윌리엄 증후군과 폐동맥 협착증 및 우심실 비대 소견을 가졌는데……."

설명을 듣는 내내 권일수는 표정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반응조차 없어서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미쳤군."

권일수의 짧고 굵은 한마디.

"제가 보기에 집도를 허락한 야사다 치프도 미쳤고 최 선생도 미쳤습니다."

"……."

"하지만 반대로 그 점이 더 좋습니다. 환자에 미친 써전들을 얼마 만에 보는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MHC가 더욱 마음에 드는군요."

권일수가 말을 덧붙이면서 팽팽하던 집무실 분위기가 다시 풀렸다.

"권 교수, 이왕 일하게 된 김에 최 선생을 빡세게 굴려줘요. 본인도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최 선생."

권일수가 최기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제자라 생각하고 가르칠 테니 각오 단단히 해. 이번 수술은 무사히 끝냈지만 사실 소아흉부외과 파트 수련은 만만치 않아."

"최선을 하겠습니다."

띠링!

[권일수와 사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라포가 4단계 신뢰로 상승합니다.]

[대가의 제자 버프를 획득하셨습니다.]

[대가의 제자: 권일수의 가르침을 받는 경우 습득력이 3배 빨라집니다. 사제 관계가 끊기면 버프가 사라집니다.]

과거 송명진과 받았던 버프를 권일수에게도 받았다.

버프의 도움을 받으면 소아흉부외과 수련에 큰 도움이 되리라.

"이렇게 한 자리 모였으니까 저녁식사라도 할까요? 즐거운 날이니 오늘은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좋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죠."

송명진의 제안에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쿵쿵쿵.

흉부외과 거장 써전들의 뒤를 쫓는 최기석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송명진, 야사다, 권일수.

이 세 사람의 실력을 흡수할 수 있다면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도 그저 꿈만은 아니다.

최기석은 훗날의 자신을 상상하며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 * *

다음 날 오전.

드르르르르륵.

최기석은 소형 캐리어를 끌며 MHC 건물을 나왔다.

시원한 아침공기와 눈부신 햇살이 낯설기만 했다. 평소 이 시간대라면 오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스케줄이 있었다.

의진대에서 개최한 세계 흉부외과 심포지엄이 이틀 뒤로 다가왔다.

그래서 몇몇 스태프들과 함께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주차장을 서성거리는데 맞은편에서 카타리나와 찰스가 다가왔다.

"짐은 다 챙겼어?"

"어젯밤에 다 챙겼습니다."

"모국으로 가는 길이라 기분이 남다르겠네. 게다가 의진대는 예전에 수련병원이었다며?"

"맞아."

찰스의 말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설화와 이영호를 통해 의진대 소식은 꾸준히 들었지만 의진대를 방문하는 건 거의 일 년 만이다. 그것도 이번에는 정식으로 심포지엄 초청을 받아서 가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슬슬 출발하자."

"네."

카타리나의 차에 짐을 실은 후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한국으로 가는 길은 지루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기도 꺼려졌고 책이나 논문을 보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최기석은 하는 수 없이 기내식을 먹은 후 잠을 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무료하게 흐르는 가운데 도착한 인천공항.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사전에 잡아 둔 호텔로 들어갔다. 카타리나는 독방을, 최기석과 찰스는 같은 방을 썼는데 한 시간 휴식 후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이야. 경치 죽인다."

찰스가 감탄한 빛으로 창밖의 풍경을 훑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곳인지 몰랐는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이 정도로 놀라?"

"말하면 네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안 할래. 근데 저건 뭐야?"

찰스의 검지 끝이 슈퍼월드 타워를 가리켰다.

"저건 사우런의 타워야."

"사우런의 타워?"

"목걸이의 제왕 봤어? 거기에 모티브를 받아서 세운 타워라고."

"듣고 보니 정말 비슷하네?"

순순히 수긍하는 찰스의 모습에 최기석은 그저 웃고 말았다.

"있다가 같이 가 보자. 한 달에 한 번씩 목걸이 봉인하는 이벤트가 있거든. 좋은 구경이 될 거야."

최기석의 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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