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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94화 (293/407)

강행돌파 (2)

"방금 전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왜요?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미스터 최는 환자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요?"

"저는 제 나름에 방법을 찾아볼 겁니다. 그런 비열한 제안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비열한 제안이라……."

클라라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MHC에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면 받아줄 곳은 제임스 홉킨스뿐이에요. 더군다나 지금은 EOB 기간 아닌가요? 과연 다른 병원이 그 환자를 받아 줄까요?"

"……."

"비열하게 느낄지 몰라도 내 제안이 최선이에요."

"그건 헤드 치프의 생각입니다. 오늘 수술 잘 봤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수술실을 떠났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환자를 핑계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났다.

'역시 스승님 말씀이 맞아.'

최기석은 과거 송명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실력이다.

실력만 있다면 주변의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승은 말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실력만 있다면 누구에게 굽힐 필요도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만약 자신이 정말 능력 있는 써전이라면 이렇게 제임스 홉킨스까지 와서 수술 참관을 하고 클라라의 헛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최고가 돼야 해.'

MHC로 복귀하는 그의 눈빛에 독기가 어렸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일과를 끝낸 후 야사다의 집무실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폐동맥 협착증을 앓는 제이미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하아…… 안 그래도 자네를 부르려던 참이었어."

야사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까 전에 벤슨하고 이야기해 봤는데 끝까지 수술을 거부하더군. 부병원장의 EOB 지침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야. 아무래도 부병원장이 벤슨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 같아."

"……."

"제이미의 상태는 어때?"

"바이탈이 불안정합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손쓰지 못할 수준까지 갈 것 같습니다."

"피곤하게 됐군."

야사다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일과 내내 제이미의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봤지만 전부 실패했다는 것, 심지어 메이죠 흉부외과조차 수술 스케줄이 가득 차서 환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등등.

전부 암울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수술 제가 해 보겠습니다."

"뭐? 자네가 직접 수술하겠다고?"

야사다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안 돼! 그건 허락할 수 없어."

"헤드 치프, 저를 믿어 주십시오. 기회만 주시면 잘할 자신 있습니다. 풍선확장술 가이드 제거도 하고 오목가슴 환자가 낙상했을 때 VATS 횡격막 복원도 해냈습니다. 이번 수술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폐동맥 협착증은 그런 차원이 아니야!"

야사다가 호통을 쳤다.

"아무리 재능 있는 의사라도 본인 수준에서 서너 단계 위에 있는 처치를 할 순 없어."

"……."

"더 중요한 건 뭔지 아나?"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만약 자네가 수술하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내가 장담하건데 결코 페인을 면치 못할 거야.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게 전부 물거품이 된다고. 난 자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이런 패턴을 지켜봐 왔어. 환자를 위해서 본인의 한계를 넘으려는 의사들, 그런 의사들은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질 못해!"

야사다가 말을 마치고 분을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

집무실에 감도는 숨 막히는 침묵.

"미스터 최. 난 자네를 잃고 싶지 않아. 진심이네."

"저를 생각해 주시는 헤드 치프의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이번 수술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

"수술 중 환자가 죽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게 의사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합니다."

최기석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수술에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벅찬 수술이라는 건 알지만 이번 수술에 성공하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자네가 방금 말한 성장 말이야. 거기서 발을 조금만 삐끗해도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어."

"……."

"그리고 자네가 집도에 실패한 순간 내 처치까지 위태로워질 거야. 레지던트에게 집도를 맡긴다는 MHC의 교육방침마저 백지화될지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집도는 잃는 게 너무 많아."

야사다가 턱을 쓸어내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뜻을 굽힌 생각은 없나?"

"물론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CABG도 해 봤습니다. 당시 경험을 살린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최기석의 애타는 시선이 야사다에게 고정되었다.

야사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고집 부려도 소용없었다.

부디 그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바랄 수밖에…….

"아까 제이미를 직접 만나 봤어. 아픈 데도 밝게 웃으려고 하는 모습이 예쁘더군."

야사다가 화제를 돌렸다.

"의사라는 게 언제부터 이것저것 따지는 직업이 됐는지 모르겠어. 사실 우리에 가장 큰 즐거움은 환자가 건강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데 말이야."

"……."

"자네가 그 아이의 미소를 되찾아 주게."

"……헤드 치프. 수술을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야사다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고 최기석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대신 환자도 자네도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와야 해. 약속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최기석은 야사다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집무실을 나왔다.

이제 남은 건 실전뿐.

* * *

그날 오전.

침대에 누워 있던 최기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트레이닝이 끝나면서 피로가 몰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그리고 샤워하는 도중 펫 하티를 소환해 체력을 회복했다.

어젯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고작 반나절 남짓한 시간에 그는 다른 사람이 몇 개월 동안 할 일을 끝내 버렸다.

우선 폐동맥 협착증 수술을 스무 번 넘게 돌려서 보았다.

트레이닝 룸에서 폐동맥 협착증 수술을 10회 완료했으며 클라라와 PVP 모드까지 치렀다.

제이미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순간들은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최기석은 샤워를 끝내고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병동은 조용했다. 복도는 텅 비었으며 환자들은 대부분 자고 있었다.

최기석은 제이미가 자고 있는 병실 앞에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경과는 여전히 응급.

한시라도 빨리 수술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그의 진심 어린 설득과 사정설명에 사무엘이 수술에 동의했다는 점이다.

야사다를 설득했다고 한들 정작 사무엘이 수술을 거부했으면 말짱 도루묵이 됐을 테니까.

이윽고 시간이 흘러 오전 회의와 회진이 끝났다.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됐지만 최기석의 마음은 붕 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몇 시간 뒤에 있을 제이미 수술만 생각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카타리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스터 최. 혼자 있어?"

"네. 찰스는 응급실에 내려갔고 엠마는 라운딩 중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따가 폐동맥 협착증 수술한다면서?"

카타리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네. 어젯밤에 간신히 야사다 치프를 설득했습니다."

"나랑 미리 상의했으면 좋았을 텐데……. 뭐. 그런다고 해도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카타리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죄송합니다. 벤슨 교수님이 수술을 거절한 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판단들이 나왔습니다."

"이해해. 나도 벤슨 교수님을 좋게 보진 않으니까. 내가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게 몸 사리는 의사거든."

"……."

"이번 기회에 미스터 최가 시원하게 한 방 먹여 줘. 솔직히 걱정이 더 크지만 미스터 최라면 어떻게든 해 줄 것 같은 기대감도 들어."

"분명 믿어 주신 만큼의 결과가 나올 겁니다."

"뭐야? 내 믿음이 부족하면 수술 결과도 안 좋을 거란 말이야? 이거 수술 결과를 완전히 내 탓으로 몰고 가는데?"

"아주 조금은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최기석이 웃으며 말했다.

수술대기 중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지만 카타리나와 대화하면서 여유를 되찾았다.

"그럼 있다가 참관할 때 봐."

"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최기석은 보조 스태프들과 함께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 수술에 집도의는 최기석, 제1보조는 심장외과 펠로우 로버트, 제2보조는 칼, 제3보조는 엠마다.

"미스터 최.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로버트가 최기석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중증 폐동맥 협착증 수술이야. 우심실 비대를 비롯해서 각종 심장질환이 겹쳤다고. 벤슨 교수님이 집도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끼리 수술하는 건 자살행위랑 다를 바 없어."

"그렇다고 환자를 마냥 방치할 순 없습니다. 설마 로버트도 풍선확장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뭐. 그건…… 아니지만……."

로버트가 말끝을 흐렸다.

제이미에게 풍선확장술이 의미 없다는 건 흉부외과 스태프라면 다 알았다.

"진심을 다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미스터 최, 말대로 잘해 봐요. 저도 더 이상 제이미가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엠마가 한마디 거들었다.

벅. 벅. 벅. 벅.

수술실에 들어온 스태프들이 스크럽을 마치고 로젯으로 들어갔다.

타임아웃을 비롯한 환자 감시 장치 연결, 전신마취 등이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반드시 살린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응급환자, 난이도가 높은 환자를 처치하는 경우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매서운 칼날 효과가 적용중입니다.]

[매서운 칼날: 모든 처치의 정확도와 속도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처치로 환자를 회복시킬 경우 환자의 회복속도가 세 배 상승합니다. 매서운 칼날의 지속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용의 눈을 사용합니다. 자동으로 최적화된 수술시야를 제공합니다. 필요에 따라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 입체화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얼어붙은 심장을 사용하셨습니다.]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냉철하게 환자와 병을 분석합니다. 응급상황이나 돌발 상황에서도 능력치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혹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혹한: 자신뿐 아니라 함께 처치하는 동료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능력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최기석은 스킬을 사용한 후 제이미를 내려다보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제이미는 수술을 제때 받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이제 그 아픔을 끝내 줄 때가 왔다.

수술 준비가 막바지로 접어드는 시점.

문득 올려다 본 참관실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파커, 벤슨, 야사다, 카타리나…….

'관객들이 전부 모였군. 그렇다면…….'

최기석이 각오를 다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고의 무대를 보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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