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돌파 (1)
MHC 헤드 치프 집무실.
벤슨과 야사다가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은 한 차례 설전이 끝난 직후로 날카로운 눈빛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말귀가 안 통하는 군. 자네가 이렇게 꽉 막힌 인간인 줄 몰랐는데……."
"……."
"그러니까 수술은 끝까지 안 하고 버티시겠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EOB 평가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파커 부병원장님의 지시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단지 그 지침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환자보다 EOB 평가가 우선이라는 말인가? 자네 판단이 환자를 중시하는 MHC 정신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나?"
야사다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벤슨을 노려보았다.
"저도 환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술 시기를 EOB 평가 이후로 늦추자는 것뿐이죠. 덧붙여 풍선확장술을 막은 것은 헤드 치프의 월권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벤슨이 지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폐동맥 협착증의 치료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풍선확장술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수술이다.
그런데 야사다는 그의 풍선확장술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풍선확장술이 의미 없는 처치였기 때문이지. 그건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미스터 최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수술 스케줄을 잡은 것도 자네라며?"
"치료방침은 환자 상태에 따라 바뀔 수 있습……."
쾅!
"젠장!"
야사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고 벤슨은 놀라서 몸을 들썩거렸다.
"나랑 지금 정면으로 붙어 보자는 건가? 내가 허수아비처럼 보여?"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기존 치료방침을 바꿨을 뿐입니다. 야사다 치프와 대적하는 게 아님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잔말 말고 꺼져!"
야사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헤드 치프."
"빨리 꺼지라고!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두고 보자고."
"……알겠습니다."
벤슨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휴우……."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사다와 독대했던 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살기 넘치는 눈빛과 공격적인 말투를 받아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분명 수술을 허락했을 것이다.
벤슨은 뒤돌아서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분노에 차 있을 야사다를 상상하자 불안감이 스멀스멀 샘솟았다.
흉부외과 일인자인 야사다 눈 밖에 났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터벅. 터벅.
벤슨은 불길함을 달래기 위해 부병원장실을 찾았다. 부병원장 파커는 자리에서 서류업무를 보고 있었다.
"부병원장님. 저 왔습니다."
"오랜만이야, 벤슨. 얼굴이 시뻘건 걸 보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야사다 치프와 대화를 나누고 오는 길입니다."
"폐동맥 협착증 환자 때문인가?"
"네. 야사다 치프가 길길이 날뛰어서 진땀 뺐습니다."
"우선 거기 앉아. 편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파커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를 가리켰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대화를 시작했다.
벤슨이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들려주었고 파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러다가 제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자네 뒤에는 내가 있으니까. 설마 부병원장이 한낱 헤드 치프보다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저는 그저 야사다 치프가 보복한다고 겁을 주길래……."
"신경 쓸 필요 없어. 자네는 내 말만 들으면 돼."
"네!"
"그런데 부병원장님, 그 폐동맥 협착증 환자 말입니다. 송명진 진료부원장이 수술하면 말짱 헛것이 되는 것 아닙니까?"
벤슨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일 없어. 송 부원장은 절대 자기 결정을 무를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이번 일을 아직까지 모를 가능성도 커."
"모른다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송 부원장의 최측근은 야사다와 미스터 최야. 두 사람은 송 부원장의 은퇴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수술을 부탁하지 않을 거거든."
"아! 역시 부병원장님이십니다. 저는 혹시 송 부원장이 수술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여기까지 못 왔지."
파커가 씨익 웃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최는 어때?"
"동기를 대신해서 제임스 홉킨스 병원에 이송 갔다고 합니다. 아직 복귀는 하지 않았고요."
"예상대로의 전개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벤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커와 대화하면 늘 아이처럼 되묻게 된다.
캄캄한 속내는 알 수 없으며 의미심장할 말을 자주 던지기에.
"기대해도 좋아. 조만간 재미있는 일이 터질 테니까."
* * *
제임스 홉킨스 심장클리닉 헤드 치프 집무실.
최기석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달콤한 꽃향기였다.
숨을 쉴 때마다 콧속으로 꽃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같은 패턴이군.'
최기석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과거 카터를 찾았을 때 고급스러운 커피 향기를 맡았고 이번에는 꽃향기다. 정치력이 높은 인물들은 방문자의 마음을 풀기 위해 이런 작전을 많이 사용하는 듯 했다.
"미스터 최. 반가워요."
클라라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최기석은 그녀와 악수를 나눈 후 소파에 앉았다.
한편 왕진평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환자 이송만 한 것뿐인데요. 뭐."
"그게 고생이죠."
클라라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최가 보기엔 제임스 홉킨스, 어떤 것 같아요?"
"겉보기에는 좋아 보입니다. 제가 환자라면 건물만 봐도 신뢰감이 팍팍 오를 것 같군요."
"흐음…… 어쩐지 말에 가시가 박혀 있는데?"
"제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제임스 홉킨스에서 MHC 의사를 빼 가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얼마 전에는 심근병증을 앓고 있는 인도 환자를 우리 쪽으로 떠넘겼고요."
"……."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홉킨스를 예쁘게 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와우. 신랄하네요."
클라라가 다리를 꼬며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다른 병원 헤드 치프에게 이런 돌직구를 던질 줄은 몰랐어요."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바보 취급 당하지 않거든요."
"갈수록 미스터 최가 마음에 드네요. 그건 그렇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 가볼까요?"
"본론이요?"
"왜 그래요. 선수끼리. 단순히 이송 때문에 온 거 아니잖아요."
클라라의 눈웃음에 최기석은 한순간 돌이 되었다.
설마 여기까지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이야.
"예상하고 계셨다면 말 돌리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오늘 오후 폐동맥 협착증 수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온 김에 수술 참관을 하고 싶습니다."
"참관이라……."
클라라가 말끝을 흐리며 턱을 쓸어내렸고 최기석은 최대한 담담한 척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오늘 반드시 수술 참관을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트레이닝 룸에서 수련하고 내일 제이미의 수술 스케줄을 잡을 생각이었다.
더럽고 치사한 꼴 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수술을 부탁하지 말자.
스스로 제이미를 고쳐 주자.
이것이 최종 계획이었다.
"라이브 수술도 하는데 참관 정도야 어렵지 않죠."
"그럼 참관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에요."
"감사합니다."
"대신 앞으로 저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전 미스터 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랍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기쁨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제이미 치료를 위한 초석은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오로지 자신의 역량에 달렸다. 하지만 환자를 위하는 마음 하나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MHC는 소아심장 파트가 약점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 슬슬 그 문제가 드러나고 있나 봐요?"
클라라가 화제를 돌렸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굳이 여기까지 와서 참관한다는 건 MHC 쪽에서 수술 못할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요. 내 말 틀려요?"
그녀의 질문에 최기석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미스터 최.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네요."
"……."
"뭐. 지금은 입 다무는 게 최선이겠죠. 미스터 왕이 밖에서 대기 중이니까 같이 수술실로 가 봐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이 떠난 후 클라라가 콜폰을 손에 들었다.
"졸리. 삼십 분 후에 폐동맥 협착증 수술 있잖아."
[네. 헤드 치프.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 수술, 내가 집도할게."
[진심이십니까? 헤드 치프께서 직접 집도할 수준은 아닙니다만…….]
"손님이 찾아왔거든. 선물을 줘야 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수술 스케줄 돌리겠습니다.]
클라라는 통화를 끊은 후 의사 가운을 걸쳤다.
집무실을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 * *
D 로젯 참관실.
최기석은 왕진평에게 환자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환자 이름은 저스틴.
생후 5개월로 폐동맥 분지에 협착이 있었는데 제이미와 비교했을 때 상태가 조금 더 양호한 편이다.
오늘 예정된 수술은 폐동맥 판막절개 수술과 우심실 근육제거술, Blalock-Taussig shunt 수술로 총 세 가지다.
이 고난도의 수술을 제임스 홉킨스는 어떻게 해결할까.
최기석은 어느 순간부터 왕진평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수술에 대한 나래를 펼쳤다.
지이이이잉.
얼마 후 스태프들이 로젯으로 들어왔다.
최기석은 용의 눈 동영상 모드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으며 무릎 위에 올라간 손은 꽉 말려 있었다. 수술을 기다리고 있을 제이미를 떠올리자 절박함이 더욱 커졌다.
"미스터 최. 그러니까 나랑 같이 제임스 홉킨스에서 수련하자. 응?"
"미안한데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수술 참관을 위해서입니다."
그의 따끔한 지적에 왕진평이 입을 다물었다.
최기석은 방해꾼을 처리한 후 온전히 수술에 집중했다.
환자의 바이탈 체크 및 인공심폐기 작동이 끝난 후 본격적인 수술의 막이 올랐다.
집도의 클라라는 놀라운 솜씨로 처치를 이끌었다.
판막과 우심실을 잘라 내는 손끝은 살아 있었으며, 봉합 솜씨 역시 흠잡을 때가 없었다.
야사다에 집도를 처음 봤을 때의 전율.
그 전율을 오랜만에 생생하게 느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 대한 악녀 이미지까지 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홉킨스 흉부외과 최초의 여성 치프.
성인심장과 소아심장외과 두 분야를 아우르는 실력자.
그녀를 수식하는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이 환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지만 경과와 상태 모두 양호했다.
"참관 소감은 어때요?"
수술실에서 마주친 클라라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헤드 치프의 멋진 솜씨, 잘 봤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네요."
"……."
"미스터 최. MHC에 있는 폐동맥 협착증 환자, 우리한테 넘겨도 돼요. 그쪽 환자 상태가 어떤지 몰라도 나라면 무사히 수술할 수 있으니까."
"진심입니까?"
"물론이에요. 대신 거기에 조건이 하나 붙겠지만요. 그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미스터 최가 제임스 홉킨스에서 수련하는 거고요."
클라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환자를 인질 삼아 이직을 추진하다니…….
악녀는 악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