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도전 (6)
"구원투수라면……."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스승이 자신감을 내비치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흉부외과는 EOB(최고의 흉부외과 평가) 때문에 바쁘죠?"
송명진이 화제를 돌렸다.
"EOB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바쁜 것은 없습니다. MHC는 환자 중심이 핵심 가치고 항상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평소대로만 해도 별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최 선생 말이 맞네요."
송명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출출한데 야식이라도 시켜 먹죠. 낮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속이 쓰립니다."
"메뉴는 뭐로 할까요?"
"예전에 의진대에서 먹었던 삼계탕이 제일 끌리지만 여기서 기대할 순 없겠죠?"
"네. 저도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자라도 먹읍시다."
최기석은 스승과 야식 먹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루라도 빨리 신 수술을 완성시키는 것이 스승을 향한 도리라고 생각하면서…….
* * *
다음 날.
오전 회의와 회진이 끝난 후 최기석은 한 병실을 찾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셨습니까?"
윌리엄 증후군을 앓고 있는 제이미와 사무엘이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제이미, 오늘 기분은 좀 어때?"
"별로예요. 가슴이 아프고 숨쉬기도 힘들어요."
제이미의 대답이 평소와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괜찮다며 웃어넘겼을 텐데 말이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제이미를 살피자 상태가 응급으로 바뀌었다.
수술대기가 길어지면서 병이 악화된 것이다.
이틀 전에만 수술을 받았어도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최기석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오늘이 수술받는 날인 거 알지?"
"네."
"무섭거나 떨리진 않고?"
"괜찮아요. 한숨 자고 나면 끝날 거 같아요."
"기특하기도 해라. 우리 제이미가 아빠보다 더 용감하네?"
사무엘이 제이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마디 했다.
"닥터 최. 오늘 수술은 별일 없겠죠?"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제이미, 잘 좀 부탁드립니다. 요즘 들어 부쩍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여서요. 빨리 수술받고 완치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이 최기석의 손을 잡았고 최기석은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오늘을 기다린 것은 비단 사무엘과 제이미뿐만이 아니다.
최기석 역시 두 사람의 아픔을 빨리 해결해 주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모녀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보고팠다.
모녀와 대화를 마친 후 찾은 옆 병실.
확장성 심근병증을 앓고 있는 라훌과 그의 부모 산제이와 라이가 있는 병실이다.
라훌은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었고 부부는 두 손 모아 기도 중이다.
최기석은 부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라훌을 내려다보았다.
평화롭게 잠든 모습만 보면 누구도 이 아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리라.
"어제 라훌을 이식센터에 정식으로 등록했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그럼 심장이식은 언제 받을 수 있나요?"
"라훌이 위중해서 대기 순번이 높지만…… 그렇다고 단시간에 공여자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힘들겠지만 차분하게 기다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닥터 최만 믿겠습니다."
부부의 간절한 눈빛이 가슴을 짓눌렀다.
최기석은 간신히 한마디를 더하고 병실을 나왔다.
"미스터 최. 벤슨 교수님이 보자고 하십니다. 지금 휴게실에 계세요."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인턴이 손을 흔들었다.
"바로 갈게요."
휴게실에 도착하자 벤슨이 팀 하트비트의 팀원과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교수님."
"너희들은 그만 가 봐."
팀 하트비트 스태프들이 빠지면서 휴게실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벤슨은 말없이 최기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늘이 제이미 수술 날인 건 알고 있겠지?"
"네. 공부는 충분히 마쳤고 교수님을 잘 도울 자신도 있습니다."
"대답은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말이야."
벤슨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수술은 없었던 걸로 하지."
그의 한마디가 묵직하게 뒤통수를 때렸다.
최기석은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빡거렸다.
수술 당일에 수술을 취소하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교수님. 제이미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합니다. 오늘 꼭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러면 어째서……."
"내 말은 수술 대신 풍선확장술을 하자는 말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수술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좋아 보여."
"죄송하지만 저는 교수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기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풍선확장술은 폐동맥판막이 좁은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제이미는 폐동맥분지와 폐동맥판막륜, 판막 상하부가 전체적으로 좁습니다. 심장비대 소견도 함께 있고요. 근본적인 치료법은 수술뿐입니다."
"……."
"더군다나 수술을 결정하신 것은 교수님의 뜻 아니었습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벤슨이 가라앉은 어투로 말을 계속했다.
"풍선확장술을 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게 더 낫겠어."
"갑자기 왜 진료 방향이 바뀐 거죠?"
"자네도 알다시피 EOB가 진행 중이야. 수술을 했다가 아이가 죽기라도 한다면 병원 평가에 악영향을 끼치지. 그래서 사망 위험률이 높은 수술은 당분간 자제하라는 파커 부병원장님의 지침이 있었어."
"환자의 목숨보다 병원 평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그거야……."
벤슨이 최기석의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더 따지고 들지 마. 자네는 오늘 수술이 취소됐다는 것만 알면 돼."
"……."
"풍선확장술로 환자 경과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킨 후 EOB가 끝나면 수술에 들어가자고. 어때? 만족하지?"
"죄송하지만 손톱만큼도 만족 못 하겠습니다. 만약 교수님이 환자를 직접 봤다면 절대로 이런 말씀 못 하실 겁니다."
"말싸움하기 싫으니까 그만 나가."
"교수님!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십시오."
"나가,"
벤슨의 단호한 거절에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휴게실을 떠났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용암처럼 끓었다.
* * *
몇 시간 후.
최기석은 MHC 건물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발견한 순간 갑자기 흡연 욕구가 밀려왔다. 독한 담배연기라도 들이마시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
방금 막 야사다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문제는 야사다조차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야사다가 벤슨을 불러 설득했다지만 벤슨은 끝내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MHC에서 소아 심장 수술이 가능한 건 벤슨뿐.
그가 배짱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게 슬플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야사다가 벤슨의 풍선확장술은 막았다는 정도랄까.
'가능한 한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는 한데…….'
최기석은 스승 송명진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스승은 일 년 전에 메스를 놓았고 그 후 단 한 번도 집도에 나서지 않았다.
애매한 은퇴가 아니라 완벽하게 은퇴한 것이다.
더군다나 부원장 일로 바쁜 스승에게 짐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남은 방법은 딱 한 가지뿐.
MHC로 복귀하는 도중 1층 로비에서 제레미를 마주쳤다.
"여긴 웬 일이야?"
"긴급 이송환자가 있어서. 처치는 끝났는데 환자가 입원은 다른 병원에서 하고 싶대."
"특이한 케이스네?"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에 지인이 있다고 하더라."
제레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제임스 홉킨스? 괜찮으면 내가 이송 가도 돼?"
"상관은 없는데. 왜?"
"거기서 볼일이 있거든. 폐동맥 협착증 수술 취소돼서 내가 나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야."
"좋을 대로 해."
"땡큐!"
최기석은 제레미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응급실로 향했다. 그리고 이동 도중 왕진평에게 전화를 걸어 폐동맥 협착증 수술 스케줄이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예스.
순간 광명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통화를 끊은 후 환자와 함께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구급차가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 응급실 앞에 멈췄다.
최기석은 조수석에서 내려 제임스 홉킨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세련된 디자인과 분위기는 MHC에 비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결국, 왔구나.'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온 셈.
정신 차리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물어 뜯길지 모른다.
찰싹!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구급차 스태프와 함께 환자가 누운 스트레쳐카를 응급실로 끌고 갔다.
"미스터 최. 왔어?"
대기 중이던 왕진평이 반색하며 다가와 스트레쳐카를 밀었다.
"제임스 홉킨스에서 보니까 더 반갑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에이. 너무 차갑게 굴지 마.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대화를 나누며 도착한 흉부외과 병동.
왕진평이 입원수속을 밟는 사이 최기석은 스태프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먼저 MHC로 돌려보냈다.
제임스 홉킨스에서 짧지 않은 시간 머물러야 한다.
다른 스태프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입원 끝났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얘기나 좀 할까?"
"그러세요."
최기석은 왕진평과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어제 통화는 그렇게 야박하게 끝내더니……. 내심 제임스 홉킨스에 미련이 있었나 봐?"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그럼 왜 스태프를 먼저 돌려보냈어?"
왕진평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여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네. 하긴 제아무리 MHC라고 해도 트러블은 생기기 마련이지. 뭐. 결국은 전부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
"미스터 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제임스 홉킨스에 도움 받을 일이 있다는 걸 바꿔 말하면 제임스 홉킨스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이직, 진지하게 고민해 봐."
"어제부터 말했지만 전 MHC에서 계속 수련할 겁니다. 아무리 유혹해도 소용없어요."
최기석이 칼 같은 거절에 왕진평이 얼굴을 찌푸렸다.
"고집은 여전하구나."
"지켜서 좋은 고집이 있고 나쁜 고집이 있습니다. 이건 좋은 고집이에요."
"아이고, 그래. 내가 졌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그럼 이제 내 볼일은 끝? 사라져 줄까?"
"그 전에 한 가지만 부탁할게요."
"뭔데?"
"클라라 헤드 치프를 보고 싶습니다. 제임스 홉킨스에 온 건 그분을 뵙기 위해서예요."
"그래? 그런 거라면 진작 이야기하지. 따라 와."
왕진평이 실실 웃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후 긴 복도를 지나 복도 끝에 있는 클라라의 집무실이 보였다.
똑. 똑. 똑.
"교수님. MHC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왕진평의 말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기석은 크게 심호흡하고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