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91화 (290/407)

끝나지 않은 도전 (5)

통화를 끝낸 최기석이 물끄러미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왕진평의 사정은 딱하지만 자업자득이다.

카타리나 교수가 이직을 붙잡았고 자신은 그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지 않았던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닥터 최!"

반가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여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나세요?"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응급실 간호사 메이예요. 코드 블랙 때 음료수 건네 드렸는데…… 기억하시려나요?"

"메이 씨였군요. 죄송합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는데……. 퇴근 중인가 봐요?"

"네. 방금 나이트랑 교대했어요."

메이가 씽긋 웃었다.

한국 간호사가 아침 근무, 낮 근무, 밤 근무 형식의 3교대를 하는 반면 미국 간호사는 아침 근무와 낮 근무의 2교대로 이루어진다.

"혹시 바쁜 게 아니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안 될 이유가 없죠."

두 사람은 응급실과 조금 떨어진 음료수 자판기 앞에 자리 잡았다.

"닥터 최는 당직인가요?"

"아니요. 저도 막 일과 끝났습니다. 병동이 바쁘다고 해서 잠깐 응급실 환자 봐주러 내려왔어요."

"어쩐지, 근무시간이 아닌 것 같더라."

메이가 말을 마치고 캔 커피를 뽑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너무 얻어먹는 그림인데요?"

"대단한 걸 대접한 것도 아닌데요. 뭐."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운을 뗐다.

"메이는 MHC에서 근무한 지 얼마나 됐죠?"

"한 달이 조금 안 됐어요."

"저랑 똑같네요."

"닥터 최랑 저랑 비슷한 건 그것밖에 없어요."

메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무룩한 그녀의 모습에서 최기석은 불길한 징조가 읽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직업 및 전공: 간호사/액팅

체력: 5/10

진단력: 2(-1)/10

외과적 처치: 5(-1)/10

내과적 처치: 2(-1)/10

평판: 2

[헤매는 발걸음 디버프에 걸려 있습니다.]

[헤매는 발걸음: 진로에 대한 고뇌로 모든 처치능력이 한 단계 감소합니다. 지속시간은 세 달입니다.]

"무슨 뜻이죠?"

최기석은 상태창으로 파악한 정보를 모른 척하며 되물었다.

"닥터 최는 근무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잖아요. 게다가 얼마 전 코드블랙 사건으로 완전 영웅이 됐고요."

"……."

"그런데 뉴튜브 동영상 봤어요. 닥터 최 진짜 멋있게 나왔던데."

우울해 있던 메이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네? 저요?"

최기석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그럼 여기 닥터 최 말고 누가 있어요. 사실 현장에서 봤을 때보다 동영상 속의 닥터 최가 훨씬 멋있었어요. 영상 앵글이 완전 닥터 최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거든요. 완전히 드라마 같았다니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메이, 우리 화제가 이쪽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다! 내 정신 좀 봐."

메이가 손으로 본인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혀를 내밀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메이 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요. 메이가 저와 같은 건 근무시간밖에 없다고 했고 저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질문을 하고 있었죠."

"오케이! 이제 알겠어요."

말을 마친 메이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이 간호사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았다.

한국에서 아재 개그를 남발하던 강하나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게…… 저는 닥터 최랑 다르게 주변에서 욕을 많이 먹거든요."

"신규 간호사잖아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해요."

"저 신규가 아니라 경력으로 들어왔는데요?"

메이의 말에 최기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치력이 높아졌음에도 할 말이 바로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흠흠. 경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MHC에서 일한 지는 얼마 안 됐잖아요. 병원 시스템이 다르니 그걸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한 건 똑같아요."

"저도 그렇게 위로하는 중인데요."

메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간호사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혹시 왜 간호사가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메이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셨거든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요. 어렸을 때 병원에서 간호 중인 어머니를 봤는데 어머니가 정말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어머니 같은 간호사가 되자고 마음먹었죠."

"그 마음은 변함이 없나요?"

"네. 그런데 전 간호사 체질이 아닌가 봐요. 첫 근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욕만 먹고 있는 걸요. 그래서 진지하게 다른 직업을 생각 중이에요."

"멋진 간호사가 되는 게 꿈이라면 포기하지 말아요."

최기석의 단호한 말에 메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솔직히 이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민한 후에 알아서 잘 판단하라는 조언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기석은 대놓고 계속 간호사를 하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봤을 때 메이는 처치는 잘하는데 투약 실수를 많이 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닥터 최, 혹시 족집게?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우연히 들었습니다."

최기석이 대충 둘러댔다.

사실 그녀의 성향을 파악한 데는 히포크라테스의 눈 영향이 컸다. 메이는 내과적 처치가 낮지만 외과적 처치 능력이 뛰어났다.

경력이 많지 않은 액팅 간호사가 어떻게 외과적 처치 5단계를 성취했을까.

그건 순전히 재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아. 그랬구나. 사실 처치는 응급실에서 제가 제일 잘해요. 다른 간호사들이 소변 줄 못 꽂고 헤맬 때 저는 한 방에 끝내거든요. 아이들 정맥혈관 잡는 것도요."

"……."

"EMR 정리나 다른 잡무를 못해서 그렇지."

속이 탄 메이가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제 생각에 메이는 병동이나 응급실 근무보다는 수술실 근무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수술실이요?"

"네."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병동간호사를 했다고 해서 메이까지 병동간호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메이에게는 메이의 재능이 있으니까요."

"……."

"메이는 단지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이에요. 메이가 못난 게 아니라고요."

"……처음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 들은 거. 동료들 대부분이 적성에 안 맞으면 관두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고 했거든요."

"조언은 여러 사람에게 듣는 게 좋은 법이죠."

최기석은 남은 음료를 마시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참고로 제 말이라고 100퍼센트 맞는 건 아니에요. 최종적인 결정과 판단은 메이가……."

"할게요! 저 수술실 간호사 할게요!"

최기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메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벌써?

진로 고민을 이렇게 빨리 끝내도 되는 건가?

고작 오 분 정도 이야기했을 뿐인데?

"닥터 최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는 수술실 간호사가 될 운명이었던 거죠. 그리고 수술실 근무를 하면 닥터 최를 자주……."

메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하여간 좋은 이야기 고마워요. 지금 수선생님이 나이트 근무니까 바로 이야기해 볼게요. 정말 고마워요."

메이가 손을 흔들며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고 최기석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띠링!

[일반 업적, '동료의 디버프를 제거하라 1'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500 A.

P를 제공합니다.]

[메이와 라포를 형성하셨습니다.]

NEW [메이(의료인): 라포 4단계 - 신뢰]

최기석은 상태창을 살핀 후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오 분 만에 라포 4단계라…….

라포 스탯이 생긴 역사 이래로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트레이닝 룸 수련을 마치고 진료부원장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최 선생."

송명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반대편 소파를 가리켰다.

"이틀간 출장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피곤할 수밖에요."

송명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개발 중인 4세대 인공심장에 문제가 생겼어요. 혈류 실험 중인데 주요 분지에서 계속 혈전이 생기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군요."

"문제는 해결되셨습니까?"

"아직 이에요. 그래서 조만간 한 번 더 연구실에 다녀와야 해요. 거기다 얼마 전 간담췌외과와 비뇨기과에 의료소송이 들어왔는데 그거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해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최기석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송명진이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하루에 수술을 서너 건씩 집도하던 때도 한숨조차 쉬지 않았거늘, 오히려 진료부원장이 되고서야 일에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요즘은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복귀하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웃자고 해 본 말이에요. 내 은퇴 타이밍은 아주 적절했으니까요.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수술은 열심히 연습 중입니다."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다만 죄송하게도 연습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관상동맥 우회술까지는 무난한데 심근 절제와 세포 및 혈관이식에 들어가면 집도 속도가 확 꺾여 버립니다. 정확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고요."

"괜찮아요. 사실 최 선생에게만 맡길 일은 아닌데……. 내 욕심이 너무 컸죠.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스태프를 붙여 줄까요?"

"아닙니다. 꼭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빈말은 아니니까 힘에 부치면 언제든지 도움을 청해요."

"명심하겠습니다."

대화가 한 차례 오간 후 침묵이 찾아왔다.

이윽고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최기석이다.

"교수님. 흉부외과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고 싶은데요."

"안 될 이유가 없죠."

"제 생각에 현재 MHC 흉부외과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송명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요?"

"……."

"소아 파트가 부실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역시 교수님이십니다."

무결점으로 보이는 MHC의 유일한 약점.

그것은 소아 파트의 걸출한 스태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소아 파트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교수는 총 두 명이다. 그들은 각각 소아 심장과 소아 폐 파트를 맡고 있는데 이들 외에는 고난도 수술을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야사다를 비롯한 몇몇 스태프들이 송명진의 복귀를 바라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송명진은 성인과 소아 환자를 전부 감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써전이었기에.

"제 환자 중 폐동맥 협착증과 윌리엄 증후군을 함께 앓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밀려서 수술 날짜가 많이 늦춰졌습니다."

"답답할 거라는 건 압니다. 야사다도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 썩는 중이고요."

송명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조만간 구원투수가 짠하고 나타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