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도전 (4)
"너희도 같은 케이스를 경험할 수 있으니까 잘 들어."
카타리나가 태아 폐동맥판막 협착증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찰스와 엠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태아에 문제가 있으면…… 출산 후에 처치하는 게 맞지 않나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았다.
"그게 일반적인 판단이지. 하지만 출생 후 치료하면 중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 한마디로 증상이 깊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는 뜻이지.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합니다."
"내가 미스터 최를 너무 애태웠나?"
"네. 교수님의 처치법이 궁금해서 온몸이 바짝 타들어 가겠습니다."
최기석의 너스레에 카타리나가 피식거렸다.
"이번 케이스의 해결방법은 풍선확장술이야."
"풍선확장술이요?"
세 사람이 동시에 되물었다.
"출산일이 안 된 산모의 배를 가를 순 없잖아? 우선 초음파로 태아의 심장을 살필 거야. 이후 카테터로 산모 복부를 관통해서 태아의 심장에 도달시키지. 그다음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풍선확장술."
"카테터를 심장판막까지 위치시키는 게 관건이겠네요."
"맞아. 카테터 유도 경로가 비정상적이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아."
설명이 끝나고 의국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케이스와 그만큼 다양한 처치법이 있다.
그 진리를 세 사람 모두 뼛속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카타리나와의 대화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환자에 대한, 처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화가 깊어갔다.
"수다 떨다 보니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카타리나가 벽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난 먼저 일어나 볼 게. 인수인계 잘하고 여유 날 때 푹 쉬어."
"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떠나는 카타리나.
그런데 엠마의 시선이 유독 그녀에게 오래 머물렀다.
"왜 그래요? 교수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게 아니라…… 우리 교수님, 너무 멋있는 것 같아요. 수술 실력은 물론이고 박식하신 데다가 환자랑 스태프들까지 잘 챙겨 주시잖아요. 나도 교수님처럼 되고 싶어요."
찰스의 물음에 엠마가 눈을 빛내며 답했다.
카타리나.
넌 너무 멋져.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란 말인가?
"카타리나 교수님이라면 엠마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앞으로 교수님의 반이라도 따라 같으면 좋겠어요."
엠마의 말에 최기석이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처음 송명진을 동경하게 됐을 때 자신의 모습과 꼭 닮았다.
엠마는 어쩜 목표와 행동까지 자신과 이리 비슷한지…….
"글쎄요. 엠마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교수님을 뛰어넘을 수도 있을 걸요?"
"에이. 설마요."
"내가 보기엔 이미 뛰어넘은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찰스가 슬쩍 대화에 껴들며 엠마의 가슴을 슬쩍 바라봤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최기석은 찰스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야. 미쳤어?"
"내 말이 틀렸어? 솔직히 엠마는 그 부분에서는 여자 스태프 중 최고라고."
"왜 두 사람만 속닥거려요. 사람 앞에 두고 따돌리기에요?"
엠마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하하하. 별거 아니에요. 오늘따라 엠마가 너무 예쁘다는 소리였어요. 그 목걸이 잘 어울리는데요? 못 보던 것 같은데."
"MHC에 온 이후로 계속 차고 있었는데요?"
"……."
엠마의 지적에 찰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드르르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다른 팀 스태프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절묘하게 인수인계 시간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인수인계를 끝낸 후 혼자서 휴게실을 찾았다.
지이이이잉.
전화를 걸기 무섭게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두진아.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네. 잘 지내요? 혹시 피아노 레슨받고 싶어서 전화하셨어요?]
"눈치가 빠른데.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니?"
[죄송한데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아요. 주말에 콩쿠르가 있는 데다가 다음 주에 한국에 가거든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다음 주에 한국에 간다고? 다음 주 언제?"
[금요일 저녁이요.]
"잘 됐네! 나도 심포지엄이 있어서 한국으로 출국하거든."
[정말요? 대박이다!]
김두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는 아빠 만나러 한국에 가요.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까 선생님만 괜찮으면 한국에서 가르쳐 드릴게요.]
"나야 좋지."
[근데 선생님. 저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뭔데?"
[그게…… 지금 선생님 있는 병원에서 드라마 촬영 중이잖아요. 그 라빈 아저씨하고 에단 아저씨하고 닥터 마우스 아저씨 싸인 좀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선생님 자랑하다가 드라마 이야기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사인을 받고 싶다고 해서…….]
띠링!
[일반 임무, '사인이 뭐길래'를 획득하셨습니다. 임무를 완수할 경우 적당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김두진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알림이 울렸다.
의료와는 관계가 없는 임무라도 김두진을 위해서라면 완수할 가치가 있었다.
"안 될 이유가 없지. 선생님이 사인받아서 다음 주에 챙겨 줄게."
[우와!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김두진과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대로 드라마 촬영현장을 찾았다.
"닥터 최 아닙니까? 반갑습니다."
드라마 감독이 그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에단이 닥터 최와 동행하며 연기를 배우고 있다던데. 요즘도 계속하고 있습니까?"
"네. 촬영이 없을 때는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에단의 연기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어서요. 표정이나 대사 톤은 발연기를 뛰어넘은 지 오래됐습니다. 가끔 에단에게 몰입해서 씬을 놓치기도 한다니까요."
"희소식이네요. 안 그래도 에단이 이번 작품을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했거든요."
"다행히 이번 부담은 약으로 작용한 모양입니다."
드라마 감독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고정되었다.
문득 최기석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에단의 모티브가 됐다는 말은 최기석이 그만큼 환자를 위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단의 연기가 그리 감칠맛이 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에단이나 라빈을 보러 오셨습니까? 두 사람은 오늘 촬영이 없는데요?"
"그래서 안 보였군요."
최기석이 한숨 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아는 동생이 배우분들 사인을 받고 싶다고 부탁해서요. 두 사람이 없으니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굳이 미룰 필요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최기석이 일부러 놀란 척 되물었다.
용건을 미리 흘린 것 자체가 작전이었기에.
"내일 촬영장을 다시 찾으면 주요 배우들의 사인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일은 제가 책임지고 해결해 드리지요."
"이러려고 촬영장에 온 게 아닌데."
"닥터 최 덕분에 에단의 연기가 늘었고 드라마 시청률도 고공행진 중입니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드라마 감독이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고…… 괜찮으면 카메오 출연이라도 해보겠습니까? 인턴 역할인데 대사도 한 줄밖에 없어요."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최기석은 드라마 감독과 악수를 한 후 현장을 벗어났다.
지이이이잉.
콜폰을 확인하니 흉부외과 번호가 찍혀 있었다.
"기석 최입니다."
[미스터 최. 나 당직 중인 앨런이야. 정말 미안한데 응급실 한 번 내려가 줄 수 있어? 존이 막 응급수술에 들어갔고 나는 지금 병동에 일이 터져서…….]
"알았어. 지금 내려갈게."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응급실을 찾았다.
"선생님. 여기에요!"
응급의학과 인턴이 최기석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T.
A(교통사고) 환자인데요. 엑스레이 촬영을 해보니까 7, 8번 늑골에 골절이 있습니다."
"선생님. 저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요."
환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금방 처치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최기석은 우선 환자가 호흡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특이하게도 숨을 들이마실 때 가슴이 들어가고, 숨을 내쉴 때 가슴이 올라왔다.
일반적인 가슴의 움직임과 정반대.
"청진기 좀 줄래요?"
"아. 네."
인턴에게 청진기를 받아 환자의 가슴에 올렸다.
뿌드드득. 뿌드드득.
숨을 쉴 때마다 들리는 뼈 비벼지는 소리, 전형적인 동요 가슴의 증상이다.
"선생님. 이 환자 동요 가슴 맞죠?"
"맞아요."
"그럼 모래주머니 챙겨 올까요? 가슴에 모순운동이 생기면 모래주머니를 올리면 좋다고 하던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모래주머니를 올리면 흉곽팽창에 방해가 되고 폐가 쭈그러진 상태를 유지해요."
"아…… 제가 잘못 알았네요."
인턴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죠. 오더 확인하고 처치해 주세요.
환자에게 진통제와 산소투여 처방을 내리고 돌아가려는 찰나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또 병동 전화인가 싶었지만, 뜻밖의 인물이 전화를 걸었다.
바로 왕진평이다.
"여보세요?"
[미스터 최.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저야 별일 없죠. 왕이야말로 어때요? 제임스 홉킨스에서 잘해 주나요?"
[그…… 그게 말이야…….]
왕진평의 목소리가 개미만큼 작아졌다.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 그리고 저번에 미스터 최가 말한 것처럼 MHC 레지던트들을 빨리 빼 오라고 닦달해. 내가 영업사원인 줄 아나 봐.]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병원 옮기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지. 젠장! 나도 나름 잔뼈 굵은 레지던트인데.]
"혹시 얼마 전에 소아 인도 환자 받은 적 있죠?"
[그걸 어떻게 알아?]
"그 환자 MHC에 입원했어요. 듣자 하니 제임스 홉킨스에서 내쳤다고 하던데요?"
[EOB(흉부외과 평가) 시작하면서 클라라 헤드 치프가 지침을 내렸어. 환자 가려 가면서 받으라고. 소아 심장이식 환자가 내쳐지는 건 당연하지.]
"제임스 홉킨스 정도 되는 병원에서 그런 졸렬한 행동을 할 줄 몰랐네요."
최기석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난 힘없어.]
왕진평이 변명하듯 한마디 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엄청 웃긴다는 거 아는데…… 혹시 여기 올 생각 없어?]
"제임스 홉킨스요?"
[그래. 헤드 치프가 미스터 최를 눈독 들이고 있어. 연봉은 MHC에 두 배 이상 챙겨 줄 거고 수련 환경은 펠로우급으로 맞춰 준다고 하더라. 어때? 이만하면 구미가 당기지 않아?]
"전혀 안 당기는데요?"
최기석의 말투가 차가웠다.
"무엇보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
"지금 이 제안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왕을 위한 거라는 사실이죠. 그쪽에서 MHC 의사를 데려오라고 들볶아서 스카우트 제안하는 거 아닙니까? 저를 위한다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군요."
[……부정하진 않을게.]
왕진평이 말을 계속했다.
[다 까놓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라. 미스터 최가 제임스 홉킨스에 오면 나도 좋고 미스터 최도 좋아지지 않겠어?]
"그건 왕의 생각이죠."
[미스터 최. 전화로 이야기해서 그런 거야? 내가 찾아갈까?]
"찾아와서 무릎을 꿇어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제발! 한 번만 더 생각을…….]
"전 더 할 말 없습니다. 그럼 이만."
최기석은 왕진평의 말을 자르며 통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