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도전 (1)
최기석이 내려온 후 응급실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난장판이던 응급실이 의료기관다운 모습을 찾았다고 할까.
'대단해. 정말.'
안젤라의 시선은 최기석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여전히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분류하며 의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의사들을 사로잡은 카리스마.
신속한 환자 분류 및 의사들의 역할 배분 등등.
그를 갓 MHC에 발령받은 레지던트라고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후아. 수선생님. 이제야 살 것 같아요."
처치를 막 끝내고 온 메이가 입을 열었다.
"보호자들을 한군데 모아 놓으니까 신경이 좀 덜 쓰이더라고요. 빈둥거리던 의사들이 같이 처치해서 일손도 늘었고요. 진작 이렇게 했으면 어디 덧나나?"
"내 말이 그 말이야."
"근데 저 동양인 선생님은 누구예요? 오늘 처음 보는데 완전 멋있어요. 저분이 흉부외과의 야사다 치프인가요?"
"야사다 치프가 저렇게 젊겠니?"
"치프급도 아닌데 저렇게 나설 수가 있어요?"
메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저 선생님이 흉부외과 레지던트 일 년 차 기석 최야. 메이죠에서부터 아주 유명했지. 아 참. 넌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네."
"네. 오늘 처음 봐요."
메이의 시석 역시 최기석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의사가 진짜 멋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느꼈어요. 제가 있었던 병원 의사들은 취미랑 특기가 하품이랑 간호사 갈구는 거였거든요."
"……."
"애인은 있을까요? 한 번 대시해 볼까?"
"오버하지 마. 너랑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수선생님! 제가 어디가 어때서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도 얼굴, 몸 어디에서 안 빠진단 말이에요."
메이가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들은 미스터 최는 환자랑 의료밖에 모르는 외골수라고. 네가 들이대 봤자 꿈쩍도 안 할 거란 말이지."
"칫!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남자예요. 수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오기가 생기네."
"그만 떠들고 저쪽 환자나 봐."
"……네."
안젤라는 시끄러운 메이를 보내고 응급실을 살폈다.
최기석이 지휘를 시작한 지 삼십 분이 지난 시점
어느새 환자 처리속도가 환자 유입속도를 따라잡았다.
* * *
"안정. 안정. 처치. 이 환자는 와파린(항응고제) 투여 중이니까 차트에 주의사항 기입해 주세요."
최기석은 환자 분류를 한 차례 끝낸 후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자와 보호자, 호출된 의사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지옥을 만들었던 응급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초반의 혼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뭐. 이만하면…….'
응급실을 훑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이미 검사를 마치고 수술실로 떠났으며 나머지 환자들은 응급실에서 적절한 처치를 받은 후 휴식 중이다.
더 이상 아비규환은 없었다.
미친 듯이 환자를 퍼 나르던 응급차의 방문도 뜸해졌다.
처음 경험한 코드 블랙을 별 탈 없이 넘긴 스스로가 대견했다.
"선생님. 피곤하시죠? 이거라도 드세요."
한 간호사가 다가와서 에너지 음료를 건넸다.
목에 걸린 명찰을 통해 그녀의 이름이 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메이."
"헤헤. 이 정도 가지고 뭘요."
메이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닥터 최는 특별한 능력이라도 가졌나 봐요."
"능력이요?"
"아까 환자 분류하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환자를 보자마자 수술이 필요한지, 처치가 필요한지 딱딱 알아맞힐 수 있어요? 그것도 완전히 족집게던데."
메이의 질문에 근처에 있던 의사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저 묻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신출귀몰한 진단력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한국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응급의료 권위자가 있거든요. 흉부외과의 야사다 치프나 송명진 진료부원장님 같은 분인데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았어요."
"아…… 그런 훌륭한 분이 한국에 또 있었구나. 그런데 혹시 그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
메이의 깜짝 질문에 최기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정도면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건만 구체적으로 파고들 줄이야.
"저…… 정만 최 선생님이요."
"그렇구나. 고생하셨는데 음료수 드시고 바깥바람 좀 쐬고 오세요."
"괜찮습니다. 환자 분류가 끝났으니 처치를 도와야죠."
"정말 환자밖에 모르시네요. 근데요. 저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남자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메이가 알 듯 말 듯한 한마디를 던지고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최기석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응급의료계의 권위자로 만들었다.
친할아버지의 이름이 최정만이었기에.
띠링!
[돌발 임무, '코드 블랙을 탈출하라'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일부 스탯이 상승합니다.]
[평판: 4----> 6]
[카리스마: 8 ----> 9]
[새로운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지휘의 진리]
- 최기석, 넌 너무 멋져. 남자가 봐도 반하겠어.
-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릴 경우 스태프들의 행동력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상대가 당신을 적대하지 않을 경우 호감 및 매력지수가 대폭 상승합니다.
딸칵!
상태창을 확인한 그는 에너지 음료를 들이키고 처치 중인 흉부외과의들에게 다가갔다.
엠마는 병동에서 대기 중이고 기숙사에 쉬던 찰스와 제레미가 처치 중이다.
푸우우욱!
찰스가 능숙한 솜씨로 환자에게 흉관을 삽입했고 제레미가 이를 도왔다.
이후 진행된 마무리까지 완벽.
조금이나마 걱정하고 지켜보던 스스로가 무안할 정도다.
"환자 분류는 끝났어?"
"방금 막. 이제 응급차도 안 오더라."
"고생 많았다. 너 아니었으면 환자 꽤 죽어 나갔을 거야."
찰스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 코드 블랙 해결에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최기석이었다.
MHC에서 처음 발생한 코드 블랙이 아닌가.
의료진의 영혼이 모두 가출한 상황에서 최기석의 현명한 판단이 빛을 발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지. 짜식. 같은 흉부외과 동기라는 게 자랑스럽다."
"고마워."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위이이이잉.
급박하게 터지는 사이렌 소리.
얼마 후 구급대원들이 스트레쳐카를 끌고 응급실로 들어왔다.
"태풍 피해 환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흉통이 너무 심해서 움직일 수도 없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으으으으윽! 선생님. 가슴이 너무 아파요. 찢어지는 것 같아요!"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틀었다.
최기석은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응급이다.
응급 중에서도 초응급이다.
"제레미는 환자 정맥라인 잡고 베타차단제랑 니트로 프러사이드 투여해 줘. 처치 끝나면 흉부 CT 잊지 마. 찰스는 당장 수술실 잡고 카타리나 교수님께 연락해 줘."
최기석은 재빨리 지시하고 환자에게 감시 장치를 연결했다.
"이 환자가 뭐라고?"
처치 도구를 챙겨 온 제레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형적인 대동맥 박리야."
"대동맥 박리?"
제레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대동맥 박리.
대동맥은 심장에서 몸 전체로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다. 그런데 급성 또는 만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대동맥이 찢어져 출혈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대동맥 박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망률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기에 빨리 수술하는 것이 최선이다.
"선생님. 크으으윽! 살려 주세요."
"최선을 다할 테니 조금만 참아 주세요."
최기석이 환자에게 폐인킬러를 사용했다.
[페인킬러]
- 환자의 육체적 통증을 70퍼센트 감소시킵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닌 단순 통증 경감이기에 증상을 가릴 수 있습니다. 지속효과는 일주일입니다.
- 사용횟수: (2/5)
"주사제 투입 끝났어. CT 찍고 올게."
"부탁해. 찰스, 수술실은?"
"K 로젯 잡았고 교수님께 전화 거는 중."
얼마 후 찰스가 카타리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최기석인 이를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딱. 딱. 딱. 딱.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딪쳤다.
문득 바라본 벽시계 분침이 질주하는 것처럼 빨리 움직이는 듯 했다.
"선생님. 우리 남편은 어떻게 되는 거죠?"
진료 수속을 마친 환자 보호자가 최기석에게 다가왔다.
최기석은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준비는 모두 끝난 상황.
카타리나만 오면 제 시간에 수술할 수 있다.
"교수님 지금 병원에 안 계신데. 오려면 삼십 분은 걸린다고 하시는데."
"내가 통화해 볼게."
최기석이 콜폰을 넘겨받았다.
"교수님. 기석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 환자에게 대동맥 박리가 의심된다며?]
"지금은 의심이 아니라 확진입니다. 방금 검사 결과 확인했는데 상행대동맥 박리입니다."
[하아…… 야단났네.]
카타리나의 한숨이 생생하게 들렸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너희 셋이 수술하고 있어. 지금 출발하면 출혈 부위 잡을 때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콜폰이 울렸다.
검사 후 수술실로 향하고 있다는 제레미의 보고다.
"가자!"
최기석이 가운을 휘날리며 앞장섰고 그 뒤를 찰스가 따랐다.
"대동맥 박리 환자를 우리끼리 수술하고 있으라니…… 정말 이래도 되나?"
"해야지. 환자를 살리려면."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아. 중요한 건……."
"찰스. 이번 수술이 우리 수준에서 벅차고 힘든 일인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이런 순간을 이겨 내야 진짜 의사가 된다고 생각해."
"……."
"그러니까 같이 이겨 내자. 나는 아니지만 우리라면 할 수 있어."
"졌다, 졌어. 세상에 누가 널 말리겠니?"
찰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이 수술실에 도착했다.
제레미와 흉부외과 인턴이 로젯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환자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스크럽하고 바로 들어가자고."
벅. 벅. 벅. 벅.
소독을 끝낸 스태프들이 일제히 로젯에 들어갔다.
상행대동맥 박리 수술의 집도의는 최기석, 제1보조는 찰스, 제2보조는 제레미, 제3보조는 인턴이 맡게 되었다.
"환자 감시 장치 연결 완료."
"전 처치 이상 없습니다."
"전신마취 끝났습니다."
스태프들의 보고가 속속들이 이어졌다.
이에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거려 답하고 두 주먹을 힘차게 쥐었다.
처음 하는 대동맥 박리 집도지만 자신감은 충분했다.
본인이 본인을 믿지 못하면 대체 누가 믿어 준단 말인가.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지 못하면 항상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상행대동맥 박리에 대한 벤탈 수술과 인조혈관 치환술을 시작합니다."
그의 말에 제레미가 수술 부위를 소독하고 방포를 덮었다.
"메스."
최기석은 소독간호사에게 메스를 건네받아 환자의 우측 겨드랑이 동맥과 넓적다리 동맥을 박리하여 노출시켰다.
"인공심폐기 연결해 주세요."
"네!"
드르르르르륵.
카테터 삽입이 끝나자 기계음이 로젯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