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절반 (7)
EOB(Evaluation Of Best heart clinic).
이것은 미국흉부외과 협회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최고의 흉부외과 기관을 뽑는 행사다. 한국에서 진행하는 의료기관평가의 흉부외과 버전이랄까.
작년 일등은 메이죠 클리닉 흉부외과.
재작년에 이어 2관왕을 달성했으며 2위인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을 여유롭게 따돌렸다.
'EOB 때문에 클라라가 더 날뛰는 걸지도…….'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사다의 중대 발표 이후 회의는 예전과 같이 진행되었다.
이어진 회진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다.
잠깐 여유가 생긴 최기석은 드라마 촬영장소로 이동했다.
때마침 에단이 병실에서 씬을 찍고 있었다.
"안 됩니다. 이 환자는 당장 수술실에 들어가야 해요!"
"헛소리하지 마. 신입으로 들어온 네가 뭘 안다고 나서. 그리고 이 환자 주치의는 나야."
"선생님. 환자와 대화는 나눠 보셨습니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에단이 상대 배우를 쳐다보았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절실함이 눈빛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대동맥 박리가 의심되는 환자입니다. CT 촬영하고 곧바로 수술해야 합니다."
"너 미쳤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맞습니다. 저 미쳤습니다. 아파하는 환자를 보는 것도 미치겠고 선생님이 계속 고집 부려서 미치겠습니다."
에단이 침상을 끌고 가려 하는 부분에서 씬이 끝났다.
"잘했어. 에단. 요즘 완전 물이 올랐는데?"
"감사합니다."
드라마 감독의 말에 에단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그건 애드리브지? 침상 끌고 가려고 하는 행동은 없는 걸로 아는데 말이야."
"아. 네. 주인공이 열혈의사잖아요. 대사만 하는 것보다 행동이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캐릭터 해석까지 끝냈을 줄이야.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라고."
"열심하겠…… 아. 닥터 최."
에단이 최기석을 발견하고 거리를 좁혔다.
"하하하. 이것 참 쑥스럽게 보고 계셨군요."
"방금 진짜 멋있었어요. 완전 의사에 빙의한 줄 알았다니까요."
최기석이 웃으며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이게 다 닥터 최 덕분이에요."
"저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방금 전 제 눈빛 연기, 닥터 최를 따라한 거예요. 오목가슴을 앓고 있는 아이를 처치할 때 닥터 최 눈빛이 딱 이랬어요. 대사도 마찬가지고요. 닥터 최는 응급상황일수록 말투가 더 단호하고 차가워지거든요."
"저는 몰랐네요."
"원래 본인이 본인을 다 알기는 어렵잖아요."
에단이 말을 계속했다.
"닥터 최랑 동행하면서 정말 많은 게 변한 것 같아요. 조금 과장을 보태면 새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요즘은 진짜 환자를 봐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니까요."
"……."
"하여간 고맙습니다. 발연기가 나아졌다는 소리도 많이 들리고 드라마 시청률도 잘 나오고 있어요."
"그거야 에단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포기하지 마세요."
"그럼요. 전 이제 얼굴값 못하는 배우가 아니라 얼굴이 아까운 배우가 될 겁니다."
최기석은 에단과 대화를 끝낸 후 의국으로 돌아갔다.
쏴아아아아. 콰콰콰콰쾅!
창가를 바라보니 거센 빗줄기가 내리고 천둥이 요란했다.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 * *
그날 오후.
일과가 무사히 끝났다.
첫 당직을 맡은 최기석은 엠마와 의국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날씨가 사납네요. 이런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엠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오전부터 시작된 폭우는 그칠 줄 몰랐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굵고 거칠어졌으며 바람은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게요. 허리케인이 온다더니 이 정도일 줄은……."
"덕분에 환자가 없으니까 좋아해야 하나?"
"아마도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직을 선 지 두 시간이 지났건만 응급실 콜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제아무리 환타 칭호가 강력하다고 해도 유비무환, 아니 폭풍무환은 당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대화를 나누던 최기석이 문득 한 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웬 일로 독서예요?"
"갑자기 보고 싶어서요."
"제목이…… 바람의 숨결이네. 그 책은……."
"맞아요. 메이죠 신경외과 풀먼 교수님의 책이에요."
최기석은 책 커버를 쓰다듬으며 추억에 잠겼다.
눈 감으면 지금도 풀먼을 떠올릴 수 있었다.
폐암 말기를 깨닫고 절망하던 모습부터 이를 의연하게 이겨 내는 모습, 호스피스 병원으로 떠나면서 보냈던 편지의 글귀들까지 말이다.
"교수님이 너무 빨리 떠나신 게 안타까워요."
"저도요. 그래도 지금쯤 하늘에서 만족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풀먼의 에세이 바람의 숨결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미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돌풍을 일으켰다.
죽음을 앞둔 의사의 담담한 자기성찰.
이것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흉흉한 일이 많은 것 같아요. 미스터 왕이 MHC를 떠난 것도 그렇고. 외래진료로봇 셜록 문제도 있고요. 클리닉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확실히 바람 잘 날이 없기는 하죠. 미스터 왕하고 작별인사는 했어요?"
"어제가 근무 마지막 날인 줄 몰랐어요. 사실 송별회라도 할 줄 알았는데."
"송별회까지 하면 분위기가 더 다운되니까 일부러 안 했을 겁니다. 혹시 엠마도 제임스 홉킨스에 가고 싶은 건 아니죠?"
"저요? 글쎄요. 미스터 최가 보기엔 어떨 것 같아요?"
엠마가 웃으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엠마는 안 떠날 겁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하죠?"
"엠마는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고 MHC의 모토는 환자 중심이잖아요. 두 개가 딱 맞아떨어지니까 굳이 제임스 홉킨스에 갈 이유가 없죠. 제 말이 틀린가요?"
"칫. 예의상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어디 덧나요? 재미없게."
"제가 재미없는 사람인 거 이제 알았어요?"
"아니요.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죠."
엠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갑작스런 방송이 터졌다.
[코드 블랙! 코드 블랙!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코드 블랙!
최소 진료인원을 남겨 두시고 모든 진료과의 의사들은 응급실로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숙사에 있는 의사들도 지금 당장 응급실로 와 주세요.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코드 블랙! 코드 블랙!]
안내멘트에 최기석과 엠마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코드 블랙이라니……."
"엠마가 남아요. 제가 갈 테니까."
최기석이 가운을 휘날리며 응급실로 달렸다.
* * *
MHC 응급실.
간호사 안젤라는 아비규환이 된 응급실을 훑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일 분이 멀다 하고 도착한 구급차들이 환자를 쏟아 냈다.
더군다나 환자들 대부분이 중경상을 입어 처치마저 쉽지 않았다. 응급실 인력만으로는 환자를 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서 결국 코드 블랙 사인이 떨어졌다.
코드 블랙.
순간적으로 대량의 환자가 유입하여 응급실이 환자를 감당하지 못할 때 떨어지는 코드다.
메이죠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정도 발생하는 편인데 신규 클리닉인 MHC는 코드 블랙이 처음이다.
"날씨가 거지같더니 결국 이렇게 되네. 제인이랑 당직을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
곁에 있던 간호사 메이가 한마디 했다.
"메이. 저쪽에 머리 다친 환자 정맥혈관 확보하고 진통제 주사해 주세요."
"네. 수선생님."
안젤라의 지시에 메이가 재빠르게 처치에 나섰다.
안젤라는 의사들의 처방을 확인하며 간호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얼굴에 드린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코드 블랙이 떨어진 후 응급실은 더욱 개판이 되었다.
환자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며 보호자들의 아우성은 점점 커져만 갔다.
뒤늦게 응급실을 찾아온 의사들의 상태 또한 좋지 못했다.
인원은 제법 됐지만 본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모습이다.
환자 하나를 살필 때마다 의사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서 효율마저 나빴다.
"간호사. 여기 환자 근육주사 멀었어요?"
"이 환자. 빨리 붕대 좀 감아 주세요."
"여기 복부외상 환자 검사실로 보내주세요."
진료 중인 의사들이 간호사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불행은 겹친다고 몇몇 보호자들이 자기 가족들을 먼저 진료해 달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병원이 아니라 시장통이네.'
안젤라는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응급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처치하는 환자보다 실려 오는 환자가 많았기에.
절망적인 것은 응급실 상황이 나아질 여지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누가 좀 끝내 줘. 이 난장판을!'
안젤라의 답답함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을 때 한 남자가 응급실로 들어왔다.
바로 최기석이다.
* * *
'이거 완전 개판이잖아.'
최기석은 응급실 상황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아우성은 갈수록 커졌고 호출 받은 의사들은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백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함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는 중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교통정리다!
"잠깐만요!"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고 현장의 중심에 들어섰다.
"지금부터 제가 현장 지휘를 하겠습니다. 모두 제 말을 따라 주세요!"
"네가 뭔데? 너 흉부외과 신규 레지던트 아니야?"
한 의사가 최기석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지금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정 아니면 꼬우면 그쪽에서 현장 관리하시죠."
"아니…… 굳이 내가 하겠다는 게 아니라……."
"연차를 그렇게 먹고 똥오줌 못 가립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밑에 사람 말에 따르는 걸 불편해해서 어쩌자는 거예요!"
최기석의 호통으로 응급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폭군의 강림 효과와 그동안 쌓은 카리스마가 표출되면서 현장 주도권이 완전히 최기석에게 넘어갔다.
"제 지휘에 불만이 있는 분은 앞으로 나오세요."
"……."
"없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제 통제를 따라 주세요."
최기석은 우선 보호자들을 환자에게서 떨어트려놓은 후 한 자리에 몰았다.
가뜩이나 비좁은 응급실이다.
지금의 보호자는 진료에 독이 될 뿐이다.
"환자 분류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수술이라고 적은 환자는 수술실로, 처치라고 적은 분은 처치를, 안정이라고 취한 분은 따로 빼 주세요."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환자를 훑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세부정보까지 살필 여유가 없는 법.
진단명과 현재 상태, 경과, 주의 요소.
딱 이 네 가지만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신경외과! 이 환자 경막하 출혈이 의심됩니다. 브레인 CT 촬영하고 수술실로 보내세요."
"수술이요?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죠?"
"CT 결과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묻지 말고 제 지시부터 따라 주세요."
최기석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신경외과의분들 역할분담 하겠습니다. 거기 안경 쓰신 분은 오더 작성하고 수술실 잡아 주세요. 수염 난 분은 처치 도구 제공해 주시고 거기 키 큰 분은 처치에 집중해 주세요."
최기석은 의사의 역량을 파악한 후 가장 능력이 좋은 이에게 처치를 맡겼다.
이윽고 그의 환자분류와 역할분담이 모든 과에 이루어졌다.
환자들이 해당 진료과에 분배되고 의사들의 할 일이 딱딱 정해지자 응급실에 활기가 돌았다.
자연히 환자를 처치하는 속도까지 빨라졌다.
"수술, 처치, 처치, 처치, 안정. 수술. 안정."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이용해 순식간에 환자 분류를 해치워 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의료의 신이 강림한 듯 보였다.
'세상에. 하느님!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안젤라는 구세주처럼 나타난 최기석을 응시하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