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절반 (6)
최기석은 넋 나간 표정으로 왕진평을 응시했다.
마른하늘에 날 벼락이 떨어진다는 말을 바로 이런 때 쓰는 건가 싶었다.
대체 왜?
왕진평이 제임스 홉킨스로 간단 말인가.
"에이. 재미없는 농담 마세요. 저 지금 처치 끝나서 피곤해요."
"농담 아니야."
왕진평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한 달 전부터 스카우트 콜을 받았어. 제임스 홉킨스 흉부외과에 동기가 있거든. 처음에는 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는데……."
"……."
"거절할수록 조건이 좋아지더라. 클라라 치프까지 만나 봤는데 꽤 좋은 분인 것 같고."
왕진평의 말에 최기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 그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선배. 진짜 가는 거예요?"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왕진평, 최기석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임스 홉킨스에서 건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연봉을 올려 준다고 했고 수련환경까지 완벽하게 보장한다고 했고."
"MHC만 한 환경을 가진 곳은 없습니다. 레지던트에게 외래진료는 물론, 집도 기회까지 주잖아요."
"제임스 홉킨스도 곧 그렇게 바뀔 거래."
왕진평이 담담하게 대답했고 최기석은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벌컥 마셨다.
의사도 엄연한 직업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이 있다면 충분히 이직할 수 있었다.
'제임스 홉킨스에서 이런 식으로 견제할 줄이야. 조지환 병원장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 평판은 알아보셨나요? 클라라 치프가 들어선 이후 많이 떨어진 걸로 압니다."
"만나 보니까 정말 좋은 분이었어. 원래 능력 있는 사람들은 위아래로 해코지를 많이 당하잖아. 비슷한 맥락이겠지."
"완전히 마음을 굳히셨나 보네요."
"응. 맞아."
왕진평이 말을 계속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해. 나도 되도록 MHC에 있고 싶었는데…… 뜻대로 잘 안 되네."
"아닙니다. 선배 뜻은 존중해요. 하지만……."
"하지만?"
"뜻을 굳혔다면 준비 단단히 하세요. 제임스 홉킨스도 클라라 치프도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MHC에서 남은 우리에게 보란 듯이 성장하시고요."
"고마워. 미스터 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왕진평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런데 말이야. 미스터 최는……."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네요."
최기석이 왕진평의 말을 중간에 자르자 왕진평이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같이 제임스 홉킨스에 가자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 그걸 어떻게……."
"제임스 홉킨스의 계략이야 뻔하죠. 우선 몇몇 의사들을 좋은 조건으로 빼돌려서 MHC에 균열을 만든다. 그 후 나머지 의사들을 야금야금 데려오는 수법이죠."
최기석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제가 선배에게 안심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선배는 이제 의사이자 반 영업직원이 된 겁니다. MHC 의사들을 빼오지 못하면 클라라 치프에게 오히려 찍힐지 몰라요."
"말이 너무 심하잖아!"
쾅!
왕진평이 성난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당장 얼굴에 닿을 것만 같았다.
"악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벌어질 일을 이야기한 것뿐이에요."
"미스터 최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 앞으로 안 볼 사람이라고 막말을 하다니……."
왕진평이 벌떡 일어나서 휴게실을 벗어났다.
"하아……."
최기석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과 클라라.
둘 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의 계속된 공작에 대처하지 못할 경우 MHC의 존재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고민을 끝낸 최기석은 휴게실을 나와 한 병실을 찾았다.
윌리엄 증후군과 심질환을 앓고 있는 제이미와 그의 보호자 사무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이미가 먼저 그를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인사성과 사교성은 여전했다.
"반갑습니다. 닥터 최."
"네. 안녕하세요. 제이미에게 책을 읽어 주고 계셨군요."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놀아 준 적이 없으니까요. 책 읽는 게 좀 어색하긴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니까 저도 좋습니다."
"아빠. 이제 다른 거 읽어 주세요. 저거."
제이미가 테이블에 놓인 다른 책을 가리켰다.
"제이미. 힘들거나 몸이 불편한 건 없어?"
"네!"
"선생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야지. 숨쉬기 불편하진 않아?"
"……조금이요."
제이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선생님이 보니까 청색증도 조금 심해졌는걸?"
"청색증이요?"
"제이미의 심장이 조금 더 나빠졌다는 뜻이야."
"닥터 최. 제이미는 정말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알아보니까 폐동맥 협착증과 관상동맥 질환은 비수술적인 치료도 가능하다고 하던데요."
사무엘이 대화에 껴들었다.
"맞습니다만 그것도 케이스에 따라 다르죠. 제이미의 경우 관상동맥 질환은 비수술적 치료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폐동맥 질환에는 수술이 필요해요."
"어째서죠?"
"비수술적 치료는 폐동맥 판막만 좁은 경우에 가능합니다. 제이미는 폐동맥 분지와 폐동맥 판막륜, 판막 상하부가 전체적으로 좁습니다."
"어려운 말을 하시니까 머리가 아프군요. 하여간 수술은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사무엘이 푹 고개를 숙였다.
"아빠. 난 괜찮아."
"……."
"찰리가 그랬는데 눈 감고 자면 그냥 끝이라고 했어."
"찰리가 누구니?"
"저기 있던 얘."
제이미의 검지가 텅 빈 반대편 침상을 가리켰다.
"제이미 말이 맞습니다. 수술이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제이미를 돕겠습니다."
"허허. 이거 딸내미한테 위로를 받을 줄이야."
사무엘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수술 스케줄이 조금 밀렸습니다. 집도를 맡은 교수님에 수술 일정이 빡빡해서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제이미가 수술을 받도록 만들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최기석은 부녀와 대화를 마친 후 다른 병실을 찾았다.
오목가슴증을 앓고 있는 케빈과 그의 보호자가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낙상으로 인한 늑골 골절만 아니었다면 벌써 너스바 수술을 받았을 텐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케빈의 상태를 살피자 불량이 떠올랐다.
아직 갈비뼈가 다 붙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조용히 병실을 나온 그가 창가에 섰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먹구름 천지다.
* * *
다음 날 새벽.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트레이닝 룸에 접속했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셨습니다(입장횟수4/5)]
[집도 수술로 송명진의 신수술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태프 보조 난이도는 상을 선택하셨습니다. 촬영 동영상이 카데바로 진행되었기에 특수효과 실전이 적용됩니다.]
휘이이이잉.
설정이 끝나자 수술 환경이 갖춰졌다.
최기석은 수술용 장갑을 착용하고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스승에게 임무를 받은 후 하루에 두 번씩 신수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빨리 완성하는 게 말이 안 되지.'
스승의 신수술은 심장이식술을 상당부분 대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수술이다. 그런 수술을 몇 주 만에 완성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부터 수술을 시작한다."
최기석의 말에 가상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피부 소독과 절개가 끝나고 관상동맥 우회술이 이어졌다. 가장 자신 있었던 수술인 만큼 수술 속도와 정확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CABG 종료 후 찾아온 신수술.
최기석은 반드시 살린다 스킬로 스탯을 상승시키고 집도에 나섰다.
스으으윽.
메스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심근 및 주변 부위를 잘라 냈다.
예전에 비해 신중해진 손놀림.
이젠 절제가 깔끔해야 나중에 부분 이식할 때 편하다는 노하우가 생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기석은 본격적으로 심장혈관과 조직 이식에 뛰어들었다.
지금부터가 신수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혈관과 조직을 섬세하게 연결시키며 환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집도 속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끼기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문합을 시작했다.
'스승님의 수술을 완성해야만 해. 꼭!'
이 수술에 수많은 환자들의 목숨이 달렸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심장이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스승의 수술은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찰칵!
경쾌한 가위 소리.
최기석은 중요 혈관 문합을 마치고 세부 혈관을 꿰매어 나갔다.
관상동맥 우회술과 비교할 수 없는 난이도의 처치였지만 이를 악물고 진행했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혈관 문합을 끝낸 후 심근조직 이식에 나섰다.
전과 달리 수술의 끝자락까지 온 것이다.
문득 바라본 시계가 10시를 가리켰다. 수술을 시작한 지 무려 열 시간이 지났다.
샴쌍둥이 수술을 집도했던 매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최기석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신수술이 종료되었다.
[스승의 신수술이 종료되었습니다. 수술의 최종 랭크는 F입니다. 환자는 사망했습니다.]
평가와 함께 원래대로 돌아오는 시야.
최기석은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고생했음에도 환자가 죽었다니,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괜찮아. 한 발씩 나가고 있어. 오늘은 수술을 끝냈잖아.'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이윽고 환자 인수인계가 끝난 후 오전회의가 시작됐다. 평소와 달리 야사다가 단상에 서서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오늘은 모두에게 중요한 소식을 발표하려고 한다."
야사다의 말에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야사다가 직접 회의를 이끄는 것도 충격적인데 중대한 소식이 있다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또 폭탄이 터지려나?"
"좋은 일일지도 모르잖아."
"아닐 거라는 거 잘 알면서."
최기석의 대답에 찰스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찰스는 정치력이 높아서 그런지 감이 좋았다.
"가장 먼저 전할 소식은 크루즈 진료다. MHC는 이번 달 말일부터 허드슨 강에 유람선을 띄운 후 거기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한다. 귀찮은 일이지만 매주 두 명씩 유람선에 파견 근무를 나가야 해."
야사다의 발표에 희비가 엇갈렸다.
몇몇 스태프들은 새 휴가가 생겼다는 반응이었고 다른 스태프들은 일이 늘었다며 투덜거렸다.
"파견이 결정되면 당직 스케줄에 변화가 생기니 다들 주의하기 바란다. 파견 순서는 다음과 같다. 팀 CPR부터 시작해서 팀 하트비트……."
야사다의 호명이 이어졌다.
"우리가 제일 먼저네."
"다들 괜찮으면 제가 먼저 가도 될까요? 크루즈 여행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엠마가 의외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 상관없어요."
"저도요."
최기석과 찰스가 양보하면서 제레미와 엠마가 첫 번째 크루즈 진료에 낙점되었다.
"다음 소식은 이번 달 중순부터 EOB가 시작된다는 소식이다. EOB가 뭔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
"네!"
"메이죠의 모토인 환자 중심은 MHC에서도 이어진다. 다들 잘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CS(고객 만족)에 각별히 신경 쓰고 처치에도 더 집중하도록."
야사다가 EOB에 대한 세부지침을 설명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EOB라……. 일거리가 또 늘었네.'
최기석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