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절반 (4)
오전 회의와 회진이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은 잡무를 마치고 의국을 나왔다.
오늘은 식도이완불능증 환자의 풍선확장술을 펼치는 날이다. 흉부외과에서 진행하는 장기 임무 12가지 과업 중 두 번째 과업을 완성할 기회가 왔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초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풍선확장술의 난이도가 높아서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난이도로 따지면 카타리나와 함께했던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가 한 수 위다.
다만 이번 풍선확장술에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다.
그것도 환자 쪽에 말이다.
드르르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롬이 침대 등받이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닥터 최.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언제나처럼 그저 그렇습니다."
제롬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하는 처치…… 그러니까 풍선확장술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들었는데. 별 이상 없겠죠?"
"……아. 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긴 MHC에서 풍선확장술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죠. 제임스 홉킨스에서 당한 것 때문에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최기석은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보통 때와 달리 주의사항에 붉은 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주의사항을 제롬 본인은 물론 다른 의료진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는 오직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가진 최기석만이 가진 숙명이었다.
"오전에 프레드니 솔론이라는 약을 처방했는데 드셨습니까?"
"간호사분이 라운딩할 때 알약을 줬는데. 그거 맞죠?"
"네. 맞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있는 풍선확장술 실시 전까지 몇 시간 간격으로 주사를 맞게 될 겁니다."
"왜죠? 중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제롬이 눈을 가늘게 떴다.
"풍선확장술에 도움이 되는 약물입니다. 주치의인 저를 믿으세요."
"뭐. 닥터 최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제롬과 대화를 마친 후 병실을 나왔다.
그 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결과는 처치실에 들어가 봐야 알 것이다.
부디 별 탈 없이 처치가 끝나길 바라는 수밖에…….
"저…… 저기 선생님."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크."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마크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지금 촬영 중인 배우잖아요. 예전에 연기하는 걸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싶어서요. 한 달 전부터 두통이 심하고 가끔씩 구역질이 나서요. 입맛이 없어서 체중도 확 빠졌는데 대체 왜 이러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잠깐 의국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최기석은 마크와 의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간단한 문진 및 바이탈 체크를 시행했다.
가장 기초적인 진료라서 그럴까.
마크에게서 특별한 질환의 징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기석은 마크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 없는 증상은 없다.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케이스로 마크는 고통스러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띠링!
[숨겨진 임무, 마음의 문을 열어가 생성되었습니다. 임무 완수 시 특별한 보상이 제공됩니다.]
때마침 알림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래도 원인을 밝히는 게 힘들겠죠? 검사를 한 것도 아닌 데다가 닥터 최는 흉부외과 전공이니까."
"잠깐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금방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최기석은 의국을 나와 화장실을 찾았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마크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는 게 목표였다.
기사를 검색하는 그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최기석이 의국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죠. 제 생각에 마크는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슨 치료 말입니까?"
"신경정신과 치료입니다."
최기석의 똑 부러진 대답에 마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닥터 최. 지금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겁니까?"
"과장하지 마세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정신병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정신병자라는 말 자체에도 큰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난 그저 두통이 심할 뿐입니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이유가 없어요."
마크가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고 최기석은 가만히 그의 행동을 살폈다.
사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마크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신경정신과 이야기를 하면 유독 예민한 태도를 취하곤 한다. 몸의 병은 쉽게 인정하면서 정작 마음의 병을 지적하면 날카롭게 저항한다.
사회가 점점 병들고 각박해지는 것은 마음의 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럴까요?"
최기석은 되물으며 추궁 모드를 사용했다.
[추궁 - 이의가 있어!]
- 추궁 모드를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 추궁 모드: 상대방의 대화를 텍스트로 나타내어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의 거짓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당연하죠. 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십 년이 넘는 배우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단지 두통과 구역질의 원인을 알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잠깐만요!"
"뭐…… 뭐죠?"
최기석의 지적에 마크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십 년이 넘는 배우 생활이 정신적인 건강을 보장하는 건 아닙니다. 전혀 근거가 안 된다고요. 같이 연기하는 라빈을 생각해 보시죠."
"아……."
마크가 입을 벌린 채 신음을 흘렸다.
라빈은 몇 십 년간 연기를 한 베테랑이지만 약물중독으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닥터 최, 지적이 맞아요. 연기와 정신건강은 무관한 일이에요. 하지만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는 되지 못해요. 안 그렇습니까?]
한 번의 지적으로 텍스트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마크는 여전히 철옹성처럼 스스로를 지켰다.
라빈에게 추궁을 했을 때와 달리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황.
최기석은 이번 케이스의 경우 논리적인 압박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잠깐만요!"
"또 뭡니까?"
"마크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하는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역으로 질문을 해보죠? 마크가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아…… 그건."
마크가 동요한 빛을 띠었다.
"지금까지 제가 느낀 바에 따르면 마크는 막연하게 신경정신과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
"대답해 보세요."
최기석은 마크의 반응을 살피다가 유도질문을 던졌다.
"혹시 신경정신과에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게 아닙니까? 마크 아니면 마크의 가족에게?"
"하아……."
마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띠링!
[추궁에 성공하셨습니다. 상대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졌습니다. 졌어."
"……."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우리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여서 술만 마시면 개로 변해서 나와 어머니를 때리곤 했죠. 그런 아버지를 간신히 설득해서 신경정신과에 데려갔는데 결과가 어땠는지 압니까?"
"혹시……."
"변한 게 없었어요. 치료를 받으나 받지 않으나 똑같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중독이 낫지 않았다면서 더 난폭해졌어요. 괜히 시간하고 돈만 버렸다고 말이에요."
마크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난 신경정신과가 믿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거기에 가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라고 여겼죠. 내가 신경정신과 진료를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힘든 가족사가 있으셨군요."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마크의 고통과 신경정신과를 거부하는 이유.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치료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마음의 치료도 완벽할 수 없어요."
"……."
"몸이 나약해지는 것처럼 정신도 나약해질 수 있고요. 그러니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는 게 흠 잡힐 일은 아닙니다."
"정말 그런 겁니까?"
마크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생각에 마크는 우울증과 수면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요."
"마음의 병이 깊어지기 전에 진료가 필요해요. 무슨 병이든 방치하면 커지는 법입니다. 오늘을 기회 삼아 용기를 내는 게 좋겠습니다."
최기석은 말을 끝마치고 마크에게 격려 스킬을 사용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윙크.
[치명적인 격려 발생!]
[격려를 받은 대상의 감정이 대폭 밝아집니다.]
[면역력, 저항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추가 버프를 얻었습니다. 굳세어진 마음 버프로 진료 협조 및 질병 극복의지가 대폭 상승합니다.]
"닥터 최. 방금 전 윙크는 뭐죠?"
마크가 배를 잡으며 웃었다.
"죄송합니다. 가끔씩 눈꺼풀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그렇죠? 제가 잘못 본 거겠죠?"
"네. 지금 이 순간부로 잊어 주면 감사하겠어요."
"하여간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부분을 깨달았어요."
"누구에게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조언을 받았으니 촬영이 끝나는 대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아 보겠습니다."
"물론 환영이에요."
최기석은 마크와 훈훈하게 대화를 끝내고 휴게실을 나왔다.
* * *
그날 오후 처치실.
최기석은 흉부외과 인턴 이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4시간마다 메칠프레드니솔론 정맥주사 인젝션 했죠?"
"네. 간호기록지에 체크되어 있습니다."
"클로르 페니라민은요?"
"그것도 한 시간 전에 투여했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환자 풍선확장술 환자 아닌가요? 처치 전에 이렇게 약물 케어를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확장술 끝나며 알려 줄게요."
최기석은 대화를 마치고 참관실을 응시했다.
참관실 맨 앞자리에서 야사다와 카타리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의 풍선확장술을 보기 위해 두 교수가 친히 나선 것이다.
하필이면 골치 아픈 케이스를 맡았을 때 참관을 나오다니…….
'역시 느낌이 좋지 않아.'
최기석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처치실에 들어온 후부터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
풍선확장술이 녹록하지 않을 거라는 육감의 신호다.
"미스터 최는 메이죠에서부터 어려운 수술 많이 했잖아요. 일반외과에서 휘플 수술 보조도 하고 신경외과에서는 샴쌍둥이 분리 수술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
"풍선 확장술 정도는 간단하게 끝내시겠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들어가죠."
최기석은 스크럽을 끝내고 처치실로 이동했다.
제모 등의 전 처치를 끝내 놨기에 곧바로 풍선확장술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어이쿠. 집도의 오셨습니까?"
먼저 와 있던 찰스가 농담을 던졌다.
"잘 부탁합니다, 집도의 선생님."
"나야말로."
최기석은 심호흡하고 제롬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식도이완불능증에 대한 풍선확장술을 실시한다. 카테터."
"네."
최기석은 제롬의 대퇴동맥에 카테터를 찔러 넣었다.
주사침 앞부분에 맺히는 핏방울, 혈관을 한 번에 찾았다.
"가이드 와이어."
소독간호사에게 받은 가이드 와이어를 주사침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풍선확장술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