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절반 (3)
그날 오후.
최기석은 오랜만에 정장을 차려 입고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카터와 김두진의 연주회가 있는 날이다.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얼마만큼 멋진 연주를 보여줄까.
그런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차를 몰고 몇 시간을 이동해 연주회장이 있는 퀸즈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주차를 끝낸 후 휴대폰을 들었다.
[미스터 최. 도착했어요?]
"네. 지금 연주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잘 됐네요. 아직 여유 있으니까 대기실로 올래요? 대기실은 지하 1층에 있어요. 찾는 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대기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최기석을 발견한 김두진이 한걸음에 달려와 품에 안겼다.
"우리 두진이 잘 있었니?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천 년 만이에요."
"천 년?"
"그만큼 보고 싶었다고요."
아이답지 않은 너스레에 최기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선생님이 미안하다. 우리 두진이를 천년 동안 내버려 두고 말이야."
"헤헤. 아셨으면 됐어요."
"공부를 잘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벌써 연주회까지 가질 줄은 몰랐는데."
"카터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아니. 두진이 넌 이미 단독 연주회를 가질 만한 실력을 가졌어.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잠자코 있던 카터가 대화에 껴들었다.
"재활을 무사히 마쳤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이게 다 닥터 최 덕분이죠."
카터가 씽긋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과거에는 고무공조차 쥐기 힘들어했던 그지만 지금 보여 준 손동작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혹시나 해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해 봤지만 마비로 인한 부작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가 올게요."
"또?"
"긴장돼서요."
김두진이 자리를 떠나면서 대기실에 최기석과 카터만 남았다.
"두진이가 연주회를 부담스러워하는군요."
"언론에서 기사를 뻥뻥 터뜨렸거든요. 천재 소리를 듣던 두진이가 처음으로 갖는 연주회니까요. 게다가 두진이는 이제 내 제자가 됐어요. 실수하면 나까지 욕을 먹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겁니다."
"……."
"그래도 잘 이겨 낼 겁니다. 아니 꼭 이겨 내야죠. 청중을 두려워하는 연주가는 있을 수 없으니까."
"연주하시는 분들도 저희와 다르지 않군요. 의사도 수술실에 들어가면 환자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사람 일은 다 비슷한 거 같아요."
카터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누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죠."
"……."
"두진이의 경우 정신적인 성숙이 덜 된 상태에서 그런 상황을 겪기 때문에 더 힘들겠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김두진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두진아. 너 남대문 열렸다."
"어? 잠궜는데?"
"인사 잘하신다~"
김두진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최기석이 농담을 던졌다. 이에 김두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선생님. 그게 뭐예요!"
"뭐긴 뭐야 장난이지."
"어휴. 재미없어. 선생님은 웃기는 거 빼고 다 잘하니까 사람 웃기려고 하지 마세요."
김두진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의사 가운에 유머 젬을 발라 놨는데 가운을 입고 올 걸 그랬나.
문득 후회가 됐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저는 올라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입구에서 닥터 최 이름을 말하면 VIP석으로 안내해 줄 겁니다."
"네. 있다가 뵙겠습니다."
최기석은 두 사람과 헤어져 연주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석에 앉는데 옆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반가워요, 최 선생님."
"김태철이라고 합니다.
김두진의 어머니 임진희와 김태철이 인사를 건넸다.
"두진의 첫 연주회를 축하드립니다. 뿌듯하시겠어요."
"그럼요. 며칠 전부터 잠도 안 오더라니까요."
"아내에게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서 영광이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가족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제가 아니어도 두진이는 분명 잘됐을 겁니다. 이렇게 훌륭한 부모님이 있는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최 선생님이 고급 피아노까지 지원해 주셨잖아요. 그 때문에 두진이가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요."
파워볼에 당첨된 후 최기석은 목돈을 두 번 사용했다.
한 번은 정진명의 치료비를 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두진에게 고급 피아노를 사 준 일이다.
"흠흠. 이제 연주 시작하는군요."
두 사람의 감사인사에 머쓱해진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카터가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쥐었다.
"이번 연주회를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몇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반 마비를 겪었습니다. 재활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지만 주변에 많은 도움을 받아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
"그중에서도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기석 최 선생님께 가장 큰 감사를 돌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연주를 시작하겠습니다."
카터가 의자에 앉아 건반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연주가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카터는 돌이 된 것처럼 준비 자세만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싶었지만 기우였다.
최기석은 그가 복귀 무대에 감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따따라라~ 따라라라란~
카터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연주곡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해 준 대표곡 중 하나인 봄날의 추억이다.
멜로디는 푸근하고 따뜻했으며 연주를 듣고 있자면 따사로운 봄 날씨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최기석은 미소를 띤 채 감상을 이어 갔다.
초반에는 카터가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연주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또 왔구나.'
카터는 연주 도중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손가락이 다른 때와 달리 가벼웠다.
마치 손가락 마디에 깃털이라도 달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과거 연주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느낌, 이 느낌은 그의 감정 표현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터가 이 기이한 감각을 처음 느낀 것은 재활 종료 후 피아노 연주를 다시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피아노를 쳐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평생 치던 피아노를 몇 년 동안 놓았으니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감각이 착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왜 이런 감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깊이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재활을 이겨 낸 보답으로 하늘이 선물을 줬다고 생각했다.
따따따따~ 따라따따~
카터는 새로 얻은 감각을 받아들이며 연주를 이어 갔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그동안 억눌렀던 피아노에 대한 갈망이 음정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 연주회는 엄밀히 말해 청중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불의의 사건으로 펼치지 못한 연주에 대한 열정을 토해 내는 자리였다.
시간이 흘러 카터의 연주가 절정으로 다다랐다.
쾅! 쾅! 쾅!
연주회 마지막 곡인 흐린 날의 기억 마지막 부분에서 사고가 터졌다.
카터의 뒷마무리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완주는 무리인가 봐?"
"지금까지 친 것만 해도 용하지."
몇몇 관중들이 쑥덕거렸지만 카터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180도 다른 연주를 선보였다.
어두우면서 신비한 멜로디.
연주가 진행될수록 긴장감이 더해지고 카터의 손놀림이 절정에 다다랐다.
"맙소사. 이건 밤의 가스파드야."
"허허. 카터가 이 곡까지 소화하다니."
"다들 제대로 들어 봐. 이건 전통적인 연주방식이 아니야. 카터의 해석과 기교는 다른 연주가와 다르다고."
VIP석에 앉은 피아니스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밤의 가스파드.
이 곡은 피아노 연주곡 중 사상 최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곡 중 하나다. 그런데 카터는 이 곡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본인의 기교를 섞어 연주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듣겠지만 피아니스트 입장에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짝. 짝. 짝. 짝.
연주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터졌다.
카터가 청중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확인한 순간 최기석도 울컥했다.
이 순간을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켜봤기에.
카터의 연주가 끝난 후 김두진이 무대에 섰다.
다시 한 번 터지는 박수갈채.
김두진은 청중들에게 인사한 후 의자에 앉았다.
긴장이 된다며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김두진은 악보를 원수 노려보듯 하다가 건반에 손을 얹었다.
따랑!
강렬한 도입부를 시작으로 연주가 휘몰아쳤다.
기존의 연주곡이 아닌 이 날을 위해 준비한 자작곡이다.
'왠지 익숙한데?'
최기석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곡이 과거 그가 메이죠에서 즉흥적으로 연주했던 곳임을.
그때도 충분히 매력적인 곡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음정들이 귓가에 쏙쏙 박히는 느낌이랄까.
자작곡이 끝난 후 세 곡의 연주가 폭풍처럼 이어졌다.
김두진은 카터와 달리 피아노가 아니라 온몸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표정과 몸짓이 자유자재로 변했다.
자신이 연주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한국에서 온 음악 천재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그의 환상적인 연주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김두진의 연주마저 끝났다.
최기석이 연주회장을 나오자 기자들과 인터뷰 중인 카터와 김두진이 보였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은 수술실에서 환자를 살린 의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 저 잘했어요?"
인터뷰를 끝낸 김두진이 그에게 다가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한 게 아니라 최고였어. 네 작은 손으로 그런 곡들을 연주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
"헤헤. 감사해요."
"이상하게 연주하는 동안 계속 선생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김두진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특히 선생님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이 아이스크림 사 주셨던 때가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바보같이. 좋은 날 울면 안 되는 거야."
"죄송해요. 하여간 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될게요. 카터 아저씨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암 그래야지.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흠흠. 그건 그렇고 조만간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무슨 부탁이요?"
"너한테 피아노를 배워 보고 싶어서."
"선생님 여자친구한테 연주해 주려고 하는구나."
"윽. 그걸 어떻게……."
"카터 선생님이 음악은 원래 사랑 때문에 시작하는 거라고 했어요. 저도 짝사랑하는 누나에게 연주해 주고 싶어서 배웠고요."
김두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피아노 앞에서는 엄청 엄격한데. 완전 스파르타예요."
"괜히 선생님. 겁주지 마."
"헤헤. 들켰네. 시간 날 때 연락 주세요. 그럼 약속."
최기석과 김두진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