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절반 (2)
"자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제임스 홉킨스와 관련된 문제는 내가 해결할 거니까."
"그럴 순 없지. 난 진료부원장이라고."
송명진이 술잔을 비운 후 말을 이었다.
"진료과에 트러블이 생겼다면 나설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웬만하면 내 선에서 끝내겠다는 소리야. 안 그래도 클라라와 단판 지을 일도 있고."
야사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결의, 최기석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클라라 헤드 치프와 어떤 사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좋게 말하면 사제지간이었지. 아주 예전에. 내가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은 메이죠가 아니라 제임스 홉킨스였으니까."
"제임스 홉킨스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야사다의 날 서린 지적에 최기석이 한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야사다가 제임스 홉킨스를 떠난 이유가 클라라와 관계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호기심이 갈수록 커졌다.
"오늘 오목가슴을 앓고 있던 케빈이 낙상을 당했습니다. 10번과 11번 갈비뼈에 골절이 있었고 횡격막이 손상돼서 복원했습니다. 아무래도 너스바 수술은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쯧쯧. 스케쥴에 차질이 생겼군."
야사다가 혀를 차며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오늘은 유독 자네답지 않아. 벌써 잔을 두 번이나 비웠다고."
"나도 사람이야. 짜증 나고 답답할 때가 있단 말이지."
"교수님. 새로 부임한 파커 부병원장에 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말해 봐요."
"파커 부병원장을 MHC에 추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고속승진을 한 것도, MHC에 온 것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 일엔 메이죠의 크리스토퍼 병원장의 손길이 닿아 있어요. 크리스토퍼는 메이죠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야망가니까요."
송명진이 말을 계속했다.
"크리스토퍼는 예전부터 꾸준히 자기 사람들을 메이죠 각 부속병원에 심고 있는 중이에요."
"크리스토퍼라……."
최기석은 그의 이름을 되뇌며 턱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그와 독대한 적은 없었고 월례회의 때도 멀리서 얼굴만 봤다. 제대로 부딪친 적이 없어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적도 없었다.
스승의 말대로라면 파커 뒤에 크리스토퍼가 있다는 소리인데…….
가슴이 따끔거리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 그건 그렇고 최 선생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어요."
"……."
"다음 주에 한국흉부외과에서 개최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있어요. 심포지엄 장소는 의진대고요. 내 생각에는 최 선생이 다녀오는 게 좋겠군요."
"추천은 감사하지만 아직 레지던트인 제가 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걱정 마요. 카타리나와 미스터 왕, 그리고 최 선생, 셋이서 가는 거니까.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다른 의사들을 만나 볼 필요도 있어요."
"교수님의 뜻이 그렇다면 가겠습니다."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속 깊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최기석은 송명진과 야사다의 대화를 유심히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밤 10시가 되었다.
내일 수술이 예정된 야사다를 위해 식사시간이 끝났다.
늦은 밤이건만 타임 스퀘어는 더욱 뜨거웠다.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났으며 대형 전광판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냈다.
세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그런데 최기석의 눈에 한 남자가 눈에 띠었다.
남자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슬쩍 액정을 보니 슈퍼 몬스터 고를 플레이 중이다.
슈퍼 몬스터 고.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증강현실 게임이다. 게임을 실행하면 GPS로 주변 위치를 읽으며 화면상에 포획 가능한 몬스터가 떠오른다.
"에이. 왜 이렇게 안 잡혀!"
남자가 신경질을 내며 손가락으로 액정을 훑었다.
게임에 신경이 팔렸는지 그는 차가 질주하는 횡단보도로 성큼 다가갔다.
"저기요!"
최기석은 손을 뻗어 남자의 앞을 막았다. 이에 남자가 정면과 최기석을 한 번 쳐다보더니 몸을 들썩거렸다.
"아. 감사합니다. 게임에 한눈이 팔려서."
"게임하는 건 좋은데 잘 보고 걸으셔야죠."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남자는 최기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신호가 바뀐 후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띠링!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 업적 달성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레전드 젬을 지급합니다.]
[레전드 젬: 내과적 처치 레벨 1단계 상승.]
최기석은 상태창을 열어 처음 얻은 레전드 젬을 확인했다.
스탯을 한 단계 올려주는 젬이라니, 충분히 레전드의 값어치가 있다.
"하아아암."
"최 선생 피곤했나 봐요."
최기석의 하품을 본 송명진이 웃음을 터뜨렸고 최기석은 민망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상태창에 있는 젬에 고정되었다.
[젬(일반): 하품 1.5배 증가.]
얘는 참 쓸데가 없단 말이지.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의국에서 동료들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엠마는 어디 갔어?"
"응급실에. 너희 들어오기 직전에 환자 왔어."
제레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계속되는 인수인계.
어젯밤은 평소와 달리 환자 수가 적었다. 응급환자는 두 명뿐이었고 응급수술을 한 환자는 아예 없었다.
[Go through the patient, 환자 사이로 막 가]
- 누구보다 적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환자를 빗겨 나가는 외과의.
- 근무 중 입원환자 및 중증환자를 받을 확률이 대폭 줄어듭니다. 단, 칭호로 줄어든 환자는 주변 동료가 담당을 맡게 됩니다.
제레미의 칭호가 제대로 활약한 것이다.
'미스터 왕이랑 찰스가 죽어 나겠구나.'
최기석은 곁에서 웃고 떠드는 찰스를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오늘 당직 때 닥칠 운명을 안다면 절대 지금처럼 웃을 수 없을 텐데.
삐리리리리~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최기석이 전화기를 들었다.
"흉부외과 최기석입니다."
[미스터 최예요? 잘 됐다.]
엠마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응급실에서 진료 중인데 아무래도 환자가 이상해서요.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서 그런데. 잠깐 응급실로 와줄 수 있어요?]
"네. 금방 갈게요."
최기석은 동기들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응급실로 내려갔다.
엠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엠마. 어떻게 된 거죠?"
"환자가 호흡곤란하고 흉통을 호소하고 있어요. 검사해 보니까 복강하고 흉강에 체액이 발견돼서 천자를 했는데. 이것 봐요."
"……."
최기석은 엠마가 가리킨 배액통을 확인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배액통 안에 초록빛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천자액이 아닌 것이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담즙 같은데. 이상하지 않아요? 흉강천자를 했는데 왜 담즙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잠시만요."
최기석은 검사 결과와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4/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 복통
아픈 부위: 담낭
진단명: 담낭괴사 / 담낭천공 / 담즙흉
현재 상태: 불량
경과: 응급
과거력: 없음
가족력: 없음
주의 요소: 없음
"이 환자 담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담낭이요?"
"담낭이 괴사하면서 담즙이 주변 장기로 유출됐을 거예요. 유출된 담즙이 흉부까지 침입해서 흉강천자를 했을 때 담즙이 나온 거죠"
"아……."
"제가 간담췌외과에 연락할 게요."
최기석의 호출에 간담췌외과 당직의가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왔다.
검사 결과와 최기석의 브리핑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단을 잘 하셨네요. 흉부외과에서 환자를 맡았으면 처치가 한발 늦을 뻔했습니다. 이 환자는 지금부터 간담췌외과에서 맡겠습니다."
"후속 처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 입원시킨 후 바이탈을 정상으로 돌려야죠. 바이탈이 돌아오면 담낭절제술을 펼칠 겁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간담췌외과 당직의와 대화를 끝낸 두 사람이 흉부외과 병동으로 복귀했다.
"미스터 최. 진짜 대단해요. 그 상황에서 담낭에 문제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엠마가 놀란 토끼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초록빛 천자액을 확인했던 순간 머리가 하얗게 굳어버렸다.
그녀의 상식을 한참 벗어난 상황이었기에.
그럼에도 최기석은 담담하게 문제의 원인을 짚어냈다.
그는 외과적인 처치만 잘하는 게 아니라 진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예전에 비슷한 케이스를 접해서."
최기석은 대충 둘러대며 말을 이었다.
"엠마도 이런 케이스 주의하세요. 흉부외과 환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과 환자인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네. 아주 확실히 공부했어요."
엠마가 씽긋 미소를 날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병동 복도를 걷던 중 맞은편에서 낯익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바로 에단과 라빈이다.
"미스터 최. 시간 있어요?"
"아. 네 괜찮습니다. 엠마도 나랑 같이 갈래요?"
"저도요?"
질문을 받은 엠마의 시선이 에단에게 고정되었다.
잘 익은 살구 빛으로 물드는 그녀의 두 뺨.
여성이 한 남성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최기석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바쁘지 않다면 같이 가시죠."
"아…… 아니에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
에단의 제안을 받은 엠마가 후다닥 의국으로 도망쳤다.
"아무래도 자네와 있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인데?"
"네. 이상하게 여성분들이 저와 있는 걸 부담스러워하더라고요."
에단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남자는 해 본 적 없는, 할 수도 없는 미남의 고충이다.
"그럼 휴게실로 가시죠."
"좋지."
세 사람은 휴게실에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스터 최. 어제 촬영할 때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네요. 무슨 소식이죠?"
"연기 인생 최초로 연기 잘했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에단이 들뜬 목소리로 어제 사건을 들려주었다.
오목가슴 환자를 걱정하던 마음이 실제 연기에 녹아들어 멋진 애드리브로 탄생했음을.
"감독님께 칭찬 받을 때는 너무 짜릿했어요. 이 맛에 배우 한다고 해야 할까요?"
"거 봐.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최 선생같이 훌륭한 의사와 동행하는데 그게 연기에 안 녹고 배기겠어?"
"저야 평소대로 한 것뿐인데요, 뭐."
라빈의 칭찬에 최기석이 볼을 긁적거렸다.
"하여간 닥터 최. 고맙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에단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최기석은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띠링!
[에단과 라포를 형성하셨습니다.]
NEW [라포 3단계 - 신뢰]
[특수 관계, 존경의 사슬이 형성되었습니다.]
[존경의 사슬: 존경의 사슬 대상자에게 전폭적인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상자의 솔직한 과거나 감정을 들을 수 있으며 무언가를 부탁할 경우 80퍼센트의 확률로 수락합니다.]
[유의하세요! 관계가 유지 중일 경우 플레이어의 말 한마디가 대상자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알림을 확인한 최기석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라빈에 이어서 에단까지…….
레지던트에 불과한 자신의 인맥이 배우들에게까지 뻗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