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기회 (6)
"수술이라니…… 정말입니까?"
에단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다.
"네. 지금부터는 동행이 어려워요. 에단은 촬영장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침상을 끌고 신속하게 병동을 벗어나는 최기석, 에단은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낙상환자와 응급처치 그리고 응급수술까지.
동행 첫날부터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기석과 동행이 쉽지는 않을 듯 했다.
에단은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막 조연배우들이 첫 번째 씬에 들어갔다.
"어제 당직 서느라 죽는 줄 알았다. 환자들이 벌 떼같이 와서 쪽잠도 못 잤어."
"넌 예전부터 당직 운은 지지리도 없었지. 인턴 저리 가라였으니까 말이야."
에단은 연기 중인 배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대사는 짧았으며 큰 비중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 짧은 연기로 병원 생활의 고단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아마도 이게 살아 있는 연기의 힘이리라.
시청자들이 왜 자신의 발연기를 욕했는지 에단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허접한 연기는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한다.
만약 의사 연기를 못하면 시청자는 극중 인물이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자연히 극 중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고 거리를 두게 된다.
'하긴…… 주인공인 내 연기가 밑바닥이었으면 말 다했지.'
에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 에단과 라빈이 의국에서 대면하는 씬이 찾아왔다.
에단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촬영 스태프들이 시선이 비수처럼 온몸에 꽂혔다.
이번 드라마에서 발연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에단은 최기석과 동행하던 때를 떠올리며 최대한 그가 되려고 노력했다.
"에단. 긴장만 안 하면 돼. 잘할 수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샷 들어갑니다."
촬영 감독의 말에 에단과 라빈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서로를 응시했다.
"레지던트를 다시 시작한 소감은 어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생활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누구라도 실수는 할 수 있어. 더군다나 예전에 그 일은 자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아닙니다. 그 환자의 주치의는 저였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에단은 무난하게 대사를 쳤다.
그가 맡은 드라마 속 주인공은 진.
과거 진은 의사생활을 했다가 뜻하지 않게 환자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일 년간 잠적했다. 그리고 라빈이 역할을 맡은 스승 오웬의 부름을 받아 다시 병원 생활을 시작한다.
이것이 드라마의 초반 부분.
대사가 핑퐁처럼 오고 가는 가운데 에단은 갑자기 대사를 칠 수 없었다.
낙상환자 케빈이 걱정되었다.
가슴이 움푹 파였던 꼬마 환자는 과연 제대로 수술을 받았을까.
"진."
"……."
"진. 내 말 안 들리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빈의 말에 에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도졌네, 도졌어."
"우리 잘생긴 주인공님께서 대사 까먹었나 보다. 좋겠다. 대사를 저렇게 먹으면서 살도 안찌고."
"이번 드라마도 망이다, 망."
몇몇 스태프들이 에단을 조롱했지만 에단은 그마저 듣지 못했다.
그의 온정신은 일순간 케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진!"
라빈의 호통에 에단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병동으로 오던 중 응급수술 들어간 아이를 마주쳐서요. 지금쯤이면 수술이 끝났을 텐데……."
에단의 즉흥적인 한마디에 라빈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일부 스태프들은 술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응급수술이라고? 무슨 환자였지?"
라빈이 노련하게 에단의 에드리브를 받았다.
"오목가슴을 앓고 있는 소아 낙상환자입니다. 늑골 골절이 심해서 응급처치를 받았고 지연성 혈관 손상에 횡격막 손상이 의심돼서 응급수술에 들어갔습니다."
에단은 아까 최기석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따라했다.
"하하하. 역시 자네 부르기를 잘했어.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라빈의 시원한 웃음과 함께 씬이 끝났다.
'또 잘못했나?'
에단은 넋 나간 스태프들을 훑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촬영장에 도는 심상치 않은 침묵.
자신이 발연기를 했을 때 주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에단. 방금 연기 어떻게 된 거예요?"
드라마 감독이 놀란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까 MHC 레지던트 선생님하고 업무 동행을 했거든요. 오늘 씬에 그게 묻어나온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애드리브를 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잘했다고요."
"네? 제가 잘했다고요?"
"아주 좋았어요. 굿이라고요. 굿!"
드라마 감독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이번 애드리브 때문에 주인공 캐릭터가 살았어요. 기존 씬대로 갔으면 주인공이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모습만 드러났을 거예요. 그런데……."
"……."
"에단의 애드리브로 환자를 위하는 주인공의 성격이 부각됐잖아요."
"그래. 잘했어. 나도 놀랐다니까."
라빈이 에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대화에 껴들었다.
"역시 미스터 최에게 부탁한 보람이 있는 걸?"
"라빈. 저 정말 잘한 건가요?"
촬영장에서 처음 듣는 칭찬에 에단은 아직도 어리둥절했다.
꿈속에서조차 스태프들에게 연기를 못한다고 시달림을 받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칭찬을 받게 될 줄이야.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 힘내서 다음 씬 들어가자고."
"네!"
에단의 목소리에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 * *
흉부외과 의국.
팀 CPR 인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수술해야 돼."
최기석이 모니터에 떠오른 검사 영상을 가리켰다.
"10번 하고 11번 갈비뼈가 부러졌어. 응급처치 할 때는 혈흉 징조가 없었는데 지금은 혈흉이 생겼고 횡격막에 열상(찢어지는 상처)까지 있어."
"아직 회의 시작하려면 한 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수술 가능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할게."
최기석의 대답에 동료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다.
"횡격막 복원은 우리 수준에서 할 처치가 아니야. 그걸 네가 하겠다고?"
"그럼 케빈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자고?"
최기석과 찰스의 시선이 팽팽하게 충돌했고 이를 지켜보는 제레미와 엠마의 시선에 초조함이 서렸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레미는 케빈에게 흉관삽관 좀 해 줘. 삽관 끝나면 인턴하고 수술실로 올라가고 엠마는 미스터 최 도와서 수술실 들어가. 나는 교수님께 수술 허락받을 게. 보호자 돌아오면 동의서 받고."
"내 집도, 반대하는 거 아니었어?"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딱히. 내가 반대했을 때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을 뿐이야."
"싱거운 자식."
"그걸 이제 알았어? 하여간 네 환자고 네가 자원해서 한 수술이니까 마무리 잘 지어."
"걱정 붙들어 매셔. 가죠."
최기석은 엠마와 수술실로 이동했다.
찰스의 일 처리로 수술 준비가 순식간에 끝났다.
야사다의 수술 허락, 보호자의 수술 동의, 보조 스태프 동원들이 단번에 마무리됐다.
벅. 벅. 벅. 벅.
최기석은 동료들과 스크럽하며 케빈을 떠올렸다.
이틀 후 너스바 수술이 예정된 케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늑골 골절이 발생할 줄이야.
늑골 골절로 너스바 수술은 자동적으로 연장되었다.
더불어 늑골 골절의 후유증은 차후에 있을 너스바 수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최기석의 눈빛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졌다.
지이이이잉.
스크럽이 끝나고 스태프와 케빈이 동시에 로젯으로 들어갔다.
이번 수술의 집도의는 최기석, 제1보조는 엠마, 제2보조는 제레미, 제3보조는 인턴이다.
"환자 혈압 105mm/Hg, 60mm/Hg, 심장박동 분당 87회, 체온은 37도. 바이탈은 정상입니다."
케빈에게 환자 감시 장치를 연결한 인턴이 보고에 나섰다.
"좋아요. 선생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최기석의 시선을 받은 소독간호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VATS(비디오 흉강경 수술) 준비해 주세요."
"개흉술 안하실 거예요?"
"소아 환자입니다. 개흉술을 하면 회복이 더디고 흉터가 생겨요. 가뜩이나 오목가슴으로 상처받는 아이인데 흉터까지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거야 저도 알지만 닥터 최가 VATS를 하는 건……."
소독간호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 제가 야사다 헤드 치프와 VATS 하는 거 보셨잖아요. 비록 그때는 보조였지만 저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모든 결과는 집도의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닥터 최 말대로 할게요."
소독 간호사는 VATS 도구를 준비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최기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람이야.'
최기석은 이제 막 흉부외과 전공에 들어선 일종의 풋내기다.
그런데 행동과 말투는 흉부외과 바닥에서 오랫동안 구른 듯한 노련함이 느껴졌다.
그 괴리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엠마는 VATS 반대 안 해요?"
"할 수 있으면 당연히 VATS를 해야죠. 그게 환자를 위하는 길이니까요."
"엠마와는 말이 통해서 좋네요."
"저도 알아요."
엠마가 씽긋 웃으며 수술 준비에 나섰다.
"마취 끝났습니다."
마취의의 보고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늑골 골절로 발생한 혈흉 및 횡격막 복원술을 시작합니다."
"소독 들어갈게."
제레미가 케빈의 흉부를 넓게 소독한 후 방포를 덮었다. 이에 최기석이 메스를 들고 케빈의 6번째 늑간 부위에 절개창을 냈다.
"트로카(투관침) 삽입하고 흉강경으로 시야 확보할게요."
엠마가 수술에 필요한 밑 작업을 끝내자 모니터에 수술 부위가 떠올랐다.
"11번 늑골 후방부가 혈종으로 덮여 있어요. 횡격막 양쪽 사이드 부분에 열상이 있고요."
"확인했습니다. 횡경막과 늑막에 유착까지 있네요. 투관침 추가로 삽입하고 유착부위부터 처리할게요."
최기석은 길쭉한 VATS 수술 도구를 투관침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수술 시야는 제레미가 확보해 주고 엠마는 전기 소작기로 유착 부위를 지져 주세요. 그럼 제가 포셉으로 유착 부위를 떼어 낼게요."
"알았어요."
"오케이."
세 사람이 동시에 처치에 나섰다.
팀 CPR 스태프들로 꾸려진 첫 번째 수술의 첫 번째 처치.
최기석의 지도하에 유착 부위를 분리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분리 종료. 이제 혈종 제거합니다."
최기석은 투관침 안쪽으로 길쭉한 포셉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포셉 끝으로 횡격막 후방부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후방부에 있던 혈종이 토마토 껍질처럼 살살 벗겨지기 시작했다.
"식염수 부어 줄게요."
엠마의 보조로 혈종을 벗겨 내는 작업이 한층 순조로웠다.
이제 남은 것은 손상을 입은 횡격막을 복원해 주는 일이다.
"3-0 prolene."
끼기기긱.
최기석은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인 후 봉합 준비에 나섰다.
VATS 수술은 처음이지만 그 원리는 일반외과에서 실시한 복강경 수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사히 마칠 자신이 있었다.
"그럼 횡격막 복원 시작합니다."
VATS 전용 니들홀더가 투관침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