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기회 (5)
"네. 하겠습니다."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군."
야사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힘들다고 한 번은 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차피 할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 목표는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는 거니까요."
"으음…… 그럼 나랑 라이벌인가?"
야사다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로 뜻밖의 인물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널 초대한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저희 사이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됐나요? 저는 아직도 과장님께 수술을 배우던 때가 생생한데."
클라라가 최기석의 옆자리에 앉아 야사다를 응시했다.
'이 사람이구나.'
최기석의 시선이 클라라에게 고정되었다.
클라라.
제임스 홉킨스의 최연소 여성 파트장.
일전에 야사다는 그녀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제 발로 MHC에 찾아올 줄이야.
최기석은 호기심을 안고 그녀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성향: 성공 중심]
[진단력: 7]
[외과적 처치: 9]
[내과적 처치: 6]
[정치력: 8.5]
[카리스마: 8]
클라라의 스탯은 화려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정치력과 카리스마.
그녀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미친!'
그녀의 스킬과 라포를 살피던 최기석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클라라와 친분이 있는 의사 중 파커가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죠에서 응급의학과 과장을 맡았고 지금은 MHC의 부병원장인 파커 말이다.
불길한 그림이 그려지면서 갑자기 흉통이 발생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어제 문자 보낸 거 못 보셨어요? 분명 오늘 방문한다고 했는데."
"못 봤어."
"과장님은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 놓고 손에서 놓지를 않으시잖아요. 그런데 제 문자를 못 봤다고요?"
"못 봤어."
"너무 하시네요. 아직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하셨나 봐요."
클라라의 지적에 야사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날 찾은 이유가 뭐야. 용건부터 말해."
"옛 은사를 찾아오는데 꼭 용건이 필요한가요? 흐음…… 이쪽 분은…… 미스터 최?"
클라라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인사가 늦어서 미안해요.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 헤드 치프 클라라라고 해요."
"기석 최입니다. 헤드 치프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정말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쁘네요."
클라라가 방긋 웃었다.
검색을 통해 알아낸 그녀의 나이는 37세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하고 있자니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카리스마 8단계가 어울리지 않게 붙임성이 좋고 발랄한 성격마저 보였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이 없었다면 그녀를 경계할 생각은 못했으리라.
"저도 미스터 최 소식은 많이 들었어요. 메이죠에서 활약이 아주 대단했다고 하던데."
"너무 치켜세워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어머. 겸손도 하셔라."
클라라가 씽긋 웃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미스터 최는 그만 나가 봐."
"과장님. 지금 저랑 미스터 최를 질투하시는 건가요?"
"헛소리는 건 여전하군. 미스터 최."
야사다가 무서운 얼굴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물론 그 뜻을 읽지 못할 최기석이 아니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이서 좋은 이야기 나누세요."
"다음에 또 봐요. 우린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클라라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클라라와 야사다는 과거에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은 지금부터 무슨 대화를 나눌까.
최기석은 깊어지는 호기심을 미뤄 둔 채 자리를 떠났다.
* * *
다음 날 새벽.
최기석은 일찍 세면을 마치고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얼마 전 송명진에게 배운 신수술을 두 번 집도하고 이어서 어제 촬영한 너스바 수술을 집도했다.
수련이 끝나자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한참 걸리겠구나."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심장 이식을 커버할 수 있는 스승의 신수술.
이것을 수련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오늘은 여차저차 수술을 끝냈지만 집도 시간이 열다섯 시간을 넘었고 수술 랭크는 F였다.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수술이었다는 소리다.
스승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려면 최소 몇 개월은 더 수련해야할 듯싶었다.
"으라차차!"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건만 병동에서는 드라마 촬영이 한참이었다.
촬영 장소는 복도 끝 병실.
배우들이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었으며 수많은 촬영스태프들이 배우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최기석은 멀찍이 떨어져서 촬영현장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배우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촬영 스태프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감정선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스태프가 코를 후비거나 딴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는 다르다.
그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닥터 최. 저 왔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에단이 서 있었다.
발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사내이자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 말이다.
"가운 잘 어울리네요. 겉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의사인데요?"
"그렇겠죠.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입만 다물면 저도 명배우예요."
에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에단. 동행하는 동안 닥터 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살펴. 그 사람의 생각은 행동과 말투에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돼 있거든. 그것만 읽어 낼 수 있다면 이번에 자네 연기력은 일취월장할 거야.]
'그래. 해보자.'
에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까지 발연기의 화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배우인 라빈의 조언.
최기석이라는 훌륭한 의사의 도움.
이 두 가지가 함께하는 지금이야말로 새롭게 태어날 기회다.
"저 같은 경우 출근하면 병실을 돌며 환자부터 살펴요. 간호사들이 매 시간마다 라운딩을 하지만 간혹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거든요."
"네."
"따라오세요."
에단은 수첩을 든 채 최기석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최기석은 병실을 돌면서 일찍 깨어난 일부 환자들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말투는 사근사근했으며 환자를 향한 시선에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닥터 최는 유독 환자들에게 친절하신 것 같아요."
라운딩이 끝난 후 에단이 운을 뗐다.
"저도 병원에 입원해 봤는데 의사분이 닥터 최처럼 살갑게 대하진 않았어요."
"아. 그거요?"
최기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의대를 졸업하던 무렵 심장 이식을 받았어요. 의사가 되기 전에 환자가 먼저 됐다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환자들을 보면 감정이입이 잘 돼요."
"……."
"내가 환자와 같은 질병으로 입원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말이죠. 그러면 친절한 태도가 나올 수밖에 없죠."
"환자의 기분이라……."
에단은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말을 수첩에 적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당직의와 새롭게 출근한 의사들의 인수인계.
에단은 최기석의 도움을 받아서 인수인계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사들이 그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겼지만 곧 여과 없는 대화들이 오고 갔다.
환자 및 질병에 대한 고민과 병원 내의 소소한 일상까지.
에단에게는 공부할 것 천지였다.
'내가 모자랐구나.'
동행한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오직 대사 속에만 존재하던 누군가의 삶.
그것이 생생하게 온몸으로 스며드는 기분이랄까.
"그건 그렇고 엠마. 에단한테서 눈을 못 떼네요?"
"내…… 내가요?
찰스의 지적에 엠마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인수인계 안 듣고 에단만 훔쳐봤잖아요. 내 말 틀려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예쁜 여자 밝힌다고 뭐라 그럴 게 아니라니까. 여자들도 똑같다고."
"동감."
찰스의 말에 제레미가 한마디 덧붙였다.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엠마가 잘 익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커피 좀 사 올게."
최기석이 의국을 나오면서 에단이 그 뒤를 쫓았다.
"어때요? 에단? 나랑 같이 있는 게 도움이 되나요? 괜히 시간만 뺏는 건 아닌가 해서."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에단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병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타다다다닥.
에단은 앞서 나가는 최기석을 따라 병실에 도착했다.
한 침상 밑에 어린 남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며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가냘픈 호흡은 당장에라도 꺼질 듯했다.
응급환자를 본 순간 에단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런 게 바로 실제 상황인가.
"선생님. 케빈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러 왔는데 케빈이 쓰러져 있었어요."
케빈을 발견한 한 환자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낙상이에요. 물을 마시려고 바를 내렸다가 그대로 떨어진 겁니다."
최기석이 케빈에게 다가가 침착하게 상태를 살폈다.
"케빈. 괜찮니?"
"가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최기석은 케빈의 상의를 벗긴 후 흉부 몇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이에 케빈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가슴이 왜 저렇게 생겼지?'
에단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케빈이라는 아이의 가슴 중앙 부분이 웅덩이처럼 깊게 파여 있었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혐오감이 생길 만한 수준이다.
"선생님이 안 아프게 해 줄 테니까 천천히 숨 쉬어 봐. 지금은 어때?"
"아…… 아까보다는 안 아파요."
"그래. 지금처럼 천천히 숨을 쉬어 봐. 에단, 스테이션에서 클라린 원 앰플하고 주사기 좀 챙겨 주세요."
"네?"
"클라린 진통제 원 앰플!"
최기석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단은 두 팔을 휘저으며 병동 복도를 질주했다.
몇몇 촬영 스태프가 그를 보며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파하던 아이의 모습만 가득했다.
"하아…… 하아…… 클라린 진통제 원 앰플 주세요! 지금 케빈이라는 아이가 쓰러졌어요."
"잠시만요."
에단은 간호사에게 약물을 받아 병동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최기석이 아이에게 근육주사를 놓은 후 침상 등받이에 기대어 눕혔다.
일단의 처치가 끝나자 아이는 전보다 편한 모습을 보였다.
"이제 끝난 건가요?"
"아니요.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자세한 검사는 해 봐야겠지만 수술이 필요할 것 같아요."
"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은데요?"
"늑골 골절이 심해요. 거기다 지연성 혈관 손상에 횡격막 손상까지 의심돼요."
"그럼 혹시……."
"네. 응급수술이 필요합니다."
최기석이 케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