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5)
"먼저 병동으로 가 봐. 나는 잠깐 연구실을 들러야하니까."
"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최기석은 야사다와 헤어져 병동으로 돌아갔다.
복귀 중 휴대폰으로 클라라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 봤다.
클라라는 제임스 홉킨스 최초의 여성 헤드 치프로 명망이 높았다.
전공 분야는 심장외과.
각종 수술에 능통했으며 지역 사회 봉사활동을 비롯해 좋은 활동도 많이 펼쳤다.
반면 그녀가 속한 심장 클리닉에 대한 기사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환자가 돌연사한 케이스, 수술 후 후유증으로 사망한 케이스, 의료사고를 당한 케이스 등등.
여러 가지 구설수에 휘말렸다.
'개운치 않네.'
최기석은 휴대폰을 가운에 집어넣으며 얼굴을 구겼다.
클라라의 기사는 좋은데 그녀가 속한 흉부외과는 트러블이 많다?
완벽한 모순이다.
"오랜만이군."
엘리베이터 앞에서 뜻밖의 인물이 인사를 건넸다.
바로 파커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얼굴을 보아하니 잘 지내는 것 같군. 꿈에 그리던 흉부외과에 들어가니 속이 시원한가?"
"이제 제 자리를 찾은 기분입니다."
짧은 대화 끝에 찾아온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최기석이다.
"과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MHC를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하하하. 다음 주부터 MHC에서 근무하게 됐어. 앞으로 잘 부탁하지."
"아…… 그러셨군요."
"이게 다 자네와 다른 레지던트들이 열심히 일해 준 덕분이야. 구조 팀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내니 병원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시더군."
파커의 말에 최기석은 뒤통수가 간지러워졌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MHC는 흉부외과에 특화된 클리닉 병원이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메이죠의 응급실에 비하면 시설과 인력 면에서 몇 단계 아래다.
그렇다면 혹시?
"대충 눈치챈 모양인데?"
최기석의 표정을 살핀 파커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응급실 소속으로 MHC에 발령받은 게 아니야. 내 직책은 부병원장이라네."
그의 한마디가 망치처럼 머리를 내려쳤다.
정치력이 상승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면전에서 결례를 범했을지 모른다.
세상에 파커가 부병원장이라니…….
불쾌함이 먹구름처럼 온몸에 밀려왔다.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MHC에서 처음 받는 축하인사라서 더 기쁜데?"
"응급의학과 과장에서 부병원장으로 진급한 케이스가 없지 않습니까? 대단한 일을 하신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지금 나를 비꼬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화 도중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저는 흉부외과 병동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하고 다음 주부터 같이 잘해 보자고."
파커가 씨익 웃으며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최기석은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으며 병동 복도를 걸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육감의 신호.
파커의 진급이 MHC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최기석은 고개를 저어 걱정을 떨쳐 내고 의국에 들어갔다.
다들 일이 바쁜지 자리가 텅 비었다.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며 상태창을 띄웠다.
3단계로 상승한 용의 눈과 신규 효과 입체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용의 눈을 사용하셨습니다. 자동으로 최적의 수술 시야를 제공합니다. 필요에 따라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 입체화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입체화 모드를 사용하자 갑자기 시야가 바뀌었다.
마치 모눈종이로 세상을 보는 기분이랄까. 별안간 등장한 가로줄과 세로줄이 당황스러웠다.
[입체화 모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재구성하는 능력입니다. 시야가 다 드러나지 않는 사물을 선택하면 재구성에 들어갑니다. 레벨이 증가할수록 재구성 영상의 세밀도가 증사합니다.]
[대상을 선택해 주세요.]
최기석은 두루마리 휴지 안에 볼펜을 넣은 후 입체화 모드를 사용했다.
지이이이잉.
밀려오는 현기증.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것만 같았다.
지독한 어지러움이 사라질 무렵 입체화된 볼펜의 모습이 드러났다.
'말도 안 돼.'
최기석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볼펜이 두루마리 휴지 안에 들어 있었다.
당연히 볼펜의 상단 부분 외에는 볼 수가 없어야 했다. 그런데 입체화 모드를 통해서 볼펜의 나머지 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부분적인 시야로 사물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일.
그것이 입체화 모드의 진면목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3D 프린팅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스킬이 걸렸어.'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입체화 모드가 있다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출혈을 잡거나 절제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새로운 능력을 이용할 다른 분야가 또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제레미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후 최기석의 반대편에 앉았다.
"VATS 보조 끝나고 복귀한 거?"
"어. 생각보다 잘 끝났어."
"축하해."
제레미는 짧게 한마디 하고 제 할 일에 몰두했다.
찰스나 엠마였다면 수술 과정이 어땠냐며 구체적으로 물어봤을 텐데 제레미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짝 찰스가 그를 골렘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제레미. 넌 왜 흉부외과에 지원했어?"
"돈 때문에."
제레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너랑 찰스 같은 사명감이 없어. 트러블 없이 생활하면서 돈만 벌면 그만이야."
"돈은 왜 필요한데?"
"……그건 몰라도 돼."
제레미가 금방 입을 닫았지만 최기석은 놓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표정에 묻어난 고통의 흔적을.
"난 환자 보고 올게."
최기석은 의국을 나와서 소아병동을 찾았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가자 한 소년이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케빈. 안녕. 너를 담당하고 있는 기석 최라고 해."
"안녕하세요."
케빈이 휴대폰을 테이블에 놓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어머님은 어디 계시니?"
"뭐 사러 나가셨어요."
"그랬구나. 몸은 좀 어떻고?"
"그저 그래요."
케빈이 힘없이 대답했다.
"선생님이 잠깐 진료 좀 볼게."
최기석은 케빈의 양해를 얻은 후 그의 상의를 벗겼다. 그러자 구덩이가 파인 것처럼 함몰된 가슴이 보였다.
케빈이 앓고 있는 질환은 오목가슴.
가슴이 선천적으로 극심하게 함몰된 기형이다.
케빈의 경우 함몰이 심해서 심장과 폐를 짓누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님. 저 수술받으면 나을 수 있어요? 그동안 제대로 된 운동을 한 번도 못해 봤어요."
"그래. 그동안 많이 불편했겠지. 선생님도 알아. 하지만 수술받고 조금만 참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지낼 수 있어."
"정말요?"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저 예전부터 수영이 하고 싶었어요. 가슴이 이렇게 파여서 수영복도 못 입고 헤엄도 제대로 못 쳤거든요. 그래서 수영이 제일 하고 싶어요."
"암. 선생님이 도와줄 거야. 케빈이 건강하게 수영하도록."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케빈과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왔다.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케빈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에 선해서.
그저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얼마나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을까.
띠링!
[일반 임무, '평범한 삶으로'를 획득하셨습니다. 집도의가 되어 오목가슴 집도에 성공할 경우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까짓 거 해보자.'
의국으로 복귀하는 그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 * *
그날 저녁.
일과가 끝난 CPR팀이 회의실에 모였다.
MHC에 진행하는 특별 트레이닝을 받기 위함이다.
최기석과 엠마, 찰스, 제레미가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한 쌍의 남녀가 회의실 안에 들어왔다.
남자는 최기석이 VATS 수술로 안면을 튼 왕진평이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단상에 서서 일행을 응시했다.
"다들 반가워. 나는 심장외과 교수 카타리나고 해. 전문 분야는 관상동맥 질환, 대동맥 질환, 심장판막 질환이야."
"나는 왕진평. 여러분들의 레지던트 2년 차고 여러분들의 교육을 맡았어."
인사를 끝낸 왕진평이 말을 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MHC는 메이죠 흉부외과와 교육과정이 달라. 레지던트의 외래 진료, 집도의 자율화, 팀 활동. 마지막으로 특수 트레이닝이지. 오늘 자리는 팀 활동과 특수 트레이닝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알려 주기 위해서야."
"……."
"팀 CPR의 구성은 교수님과 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쉽게 같은 배에 탄 사람이라고 보면 돼."
왕진평이 말을 이었다.
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 교수와 티칭 레지던트, 그리고 네 사람의 역할 등등.
팀 활동에 대한 범위를 정한 후 특수 트레이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다들 오전 회의에 참석해서 의아한 점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네. 케이스 발표가 없어서 놀랐습니다."
왕진평의 말에 찰스가 신속하게 대답했다.
"맞아. MHC에서는 오전 회의 때 케이스 발표를 하지 않아. 일과가 끝난 후 팀별로 케이스 발표를 하지. 우리는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그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찰스, 엄청 적극적인데?"
왕진평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특수 트레이닝에 포함된 건 케이스 발표뿐만이 아니야. 더 중요한 건 봉합 연습이지."
"……."
"앞으로 매일 봉합 연습을 하게 될 거야. 그래야 너희들이 하루 빨리 집도할 수 있을 테니까. 모형은 넘칠 만큼 있으니까 부자재 걱정은 말고."
왕진평이 회의실 한구석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닛 안에는 그의 말대로 집도의 필요한 도구들과 모형이 한가득 있었다.
"집도 연습은 매일 두 시간씩 진행해. 특별히 아픈 게 아니면 열외는 없어."
"당직 서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근무 중에 연습해야지. 그리고 근무 끝난 후 연습한 모형을 제출하면 돼."
"미스터 왕. 시범을 보여 줘."
"알겠습니다."
카타리나의 말에 왕진평이 모형 봉합을 시작했다.
일명 쌈지 봉합.
우선 함몰된 부위에 절개창을 낸다.
이후 함몰된 부위의 피부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주변 부위를 묶어 주는 봉합법이다.
충수 절제술 및 유두 수술에 자주 이용된다.
"우와. 속도 봐."
"대단해요. 선생님."
왕진평을 지켜보던 찰스와 엠마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속도와 정확도, 왕진평의 쌈지 봉합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있었다.
짝. 짝. 짝. 짝.
봉합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최기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집도 연습에 빠지고 싶습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집도 연습에 빠지겠다고?"
카타리나의 얼굴이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미스터 최. 네가 진료부원장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게 교육에 불참하는 이유는 될 수 없어."
"그게……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최기석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할 말을 고민했다.
트레이닝 룸에서 실전 같은 수련이 가능한 그다. 모형으로 하는 연습은 큰 의미가 없을뿐더러 이미 그의 경지는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다.
동기들과 외과적 처치 레벨이 서너 단계 차이가 났으니까.
모형 연습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주 건방지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모형 연습을 할 단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개인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동기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카타리나와 왕진평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 왕진평이 검지로 최기석을 가리켰다.
"야, 미스터 최. 니가 그렇게 봉합을 잘해? 단상으로 올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