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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70화 (269/407)

수련 (3)

"뭐…… 뭐라고요?"

개리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당신. 제임스 홉킨스 병원 인턴이지? 염탐하러 온 수작이 뻔히 보여."

"……."

"증상 설명이 교과서적인 대동맥 박리잖아. 대동맥 박리 환자인 척하면서 외래진료의 수준을 떠보려고 했던 거 아닌가?"

참고로 다음에 올 때는 그 펜을 빼놓고 오는 편이 좋겠어."

최기석의 지적에 개리가 가슴 주머니에 달린 펜을 내려다보았다. 펜 상단부에 제임스 홉킨스 병원을 상징하는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순간 개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내 말 뜻 알겠지? 꺼지라고."

최기석이 재차 으르렁거리자 개리가 쏜살같이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개리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임스 홉킨스의 심장 클리닉 역시 뉴욕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MHC보다 일 년 먼저 진료를 시작했는데 MHC의 수준을 살피기 위해 스파이를 보낸 듯싶었다.

'경쟁은 피할 수 없겠네.'

최기석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음 환자를 받았다.

시간이 흘러 외래진료의 끝이 다가왔다.

그동안 최기석은 서른 명에 육박하는 환자를 진찰했다.

흉부외과 전공을 끝낸 전공의와 맞먹는 수치.

히포크라테스의 눈이 없었다면 이만한 환자를 진료하지 못했으리라.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부녀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오늘의 마지막 환자다.

"안녕하세요. 제이미입니다."

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 깜찍한 모습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이미와 보호자분 자리에 앉으세요."

"네."

제이미가 자리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았다.

"제이미, 어디가 아파서 왔니?"

"여기가 아파요."

제이미의 손이 심장 부위를 가리켰다.

"숨 쉬기도 힘들어요."

"제이미가 아프다고 한 게 거의 두 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요즘은 계속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보호자 사무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최기석은 제이미와 보호자에게 차근차근 문진을 시행하고 청진기로 에이미의 심음을 확인했다.

대동맥, 폐동맥, 늑골, 마지막으로 승모판 부위까지.

심음을 청취를 하는 내내 그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이상해.'

최기석은 청진기를 목에 걸며 제이미를 응시했다.

제이미의 심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소리가 지나치게 과했으며 기질성 심잡음까지 들렸다.

불안함을 부추기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제이미 자체였다. 청진하는 동안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으며 계속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정상인 듯하면서 정상이 아닌 듯한 모습이 교차했다.

타타다다닥.

최기석은 차트를 작성하며 제이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진단명을 확인한 순간 그동안의 의혹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사무엘. 지금부터 제이미에게 몇 가지 검사를 할 겁니다."

"거…… 검사요? 제이미가 큰 병에 걸렸나요?"

"검사 결과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수술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선 폐동맥 협착증이 의심되고 관상동맥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사무엘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저 이제 가도 돼요?"

제이미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이미는 나가 있어도 되겠다. 간호사 언니한테 이야기 하면 간식 줄 거니까 간호사 언니하고 꼭 붙어 있어야 된다."

"네!"

"사무엘. 제이미를 키우면서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이상한 점이요? 우리 애가요?"

사무엘이 놀란 토끼 눈으로 되물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그냥 그동안 느낀 점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게…… 사실 우리 제이미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습속도가 더딘 편입니다. 제가 아내랑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는데…… 그래서 잘 돌보지 못했거든요."

"……."

"그래도 제이미는 사교성이 좋고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요. 유치원에서도 인기가 많답니다."

제이미 이야기를 하는 사무엘의 표정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사무엘. 제 생각에 제이미는 윌리엄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윌리엄 증후군이요? 그게 뭐죠?"

"지금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윌리엄 증후군이란 심장질환과 정신지체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선천성 질환이다. 이를 앓고 있는 아이들은 보통 사회성이 좋으며 말을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단순 인지저하를 겪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웠다.

"선생님.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 제이미는 정상입니다. 정신지체라니요!"

"유치원 선생님과 제대로 이야기 나눠 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제 일이 워낙 바빠서……."

"찾아가서 상담해 보세요. 제이미가 유치원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최기석의 말에 사무엘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우선 검사 받고 다시 진료실로 오세요."

"오전 진료는 이제 끝난 거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점심 조금 늦게 먹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심전도와 흉부 CT 검사를 마친 부녀가 다시 진료실을 찾았다.

딸칵. 딸칵.

최기석은 결과를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검사 결과와 히포크라테스의 눈의 진단명이 일치했다.

"혹시 오늘 입원 가능하십니까?"

"입원해야 할 정도인가요?"

"입원해서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입니다."

"오늘은…… 힘들고 이번 주 중으로 다시 한 번 찾아오겠습니다. 제 일도 마무리 짓고 유치원도 가 봐야겠어요."

"네. 그렇게 하세요. 진료받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이미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고 최기석도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처럼 웃어 주고도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마음까지는 생기지는 않았다.

부녀에게 다가올 시련이 눈앞에 선했다.

* * *

"하아…… 뭐. 저딴 자식이 다 있어!"

개리는 씩씩거리며 MHC 건물을 노려보았다.

최기석에게 당했던 때가 재차 떠오르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사실 불순한 의도로 진료를 본 건 맞았다.

전공 수련 중인 레지던트에게 외래진료를 맡기는 시스템은 MHC에서 처음 도입했다.

[MHC의 한발 앞선 진료. 레지던트 외래 진료.]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교수의 환자 재검수로 탄력 받는 MHC 신규 진료 시스템.]

[환자들도 만족, 의사들도 만족. MHC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

MHC 진료에 대한 지역사회의 평은 대체적으로 호의적.

이에 위협을 느낀 제임스 홉킨스는 개리를 파견해서 MHC의 신규 진료를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개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를 몰아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으로 돌아왔다.

"어때? 진료는 잘 받았냐?"

개리의 직속선배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 완전 망했어요."

"왜? 나랑 연습까지 하고 갔잖아. MHC 외래진료 봤을 레지 녀석 생각하면서 동기들이랑 깔깔거렸는데."

"하아……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우선 헤드 치프 뵙고 나서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래."

개리는 병동 복도를 지나 제임스 홉킨스 심장 클리닉 헤드 치프의 집무실 앞에 섰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MHC에서 진료 보고 돌아오는 길이지?"

"……네."

"표정을 보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네."

클라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고 개리는 자리에 앉아서 안절부절못했다.

"헤드 치프가 지시하신 대로 대동맥 박리 환자인 척 연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먹히는가 싶었는데 진료의가 금방 눈치를 채서."

개리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당시 일을 설명했고 클라라는 조용히 이를 듣기만 했다.

"검사는 받았어?"

"아니요. 검사도 안 받았는데 진료의가 꾀병이라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나와 버렸습니다."

"바보같이……. 검사만 받았어도 우리 쪽에 명분 한 가지는 생기는데."

클라라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진료의 이름은 기억해?"

"네. 기석 최라는 동양인입니다."

"……상대가 안 좋았네. 그만 가 봐."

"네? 정말 그냥 가도 되는 겁니까?"

개리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클라라의 별명은 단두대.

본인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의사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만 가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 알겠습니다. 있다가 수술실에서 뵙겠습니다."

개리가 나가자 클라라가 소파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기석 최가 MHC로 왔단 말이지?"

* * *

외래진료를 마친 최기석은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동료들이 회의실에서 피자를 먹고 있었다. 향긋한 피자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미스터 최. 먹을 복 있네."

"잘 왔어요. 방금 막 도착했어요."

찰스와 엠마가 한마디씩 했고 제레미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최기석은 제레미의 옆자리에 앉아 식사에 나섰다.

외래 진료를 마치고 먹는 피자는 꿀맛이다.

"외래 진료를 처음 해 본 소감이 어때?"

"생각보다 훨씬 힘들어. 난 병동에 있거나 스크럽 서는 게 더 나은 것 같더라."

"아무렴 외래가 스크럽보다 힘들겠어? 지금 괜히 겁주는 거 아니야?"

찰스가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최기석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사람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인 것 같아? 수술대에 누운 환자는 아무 말도 없잖아. 장기가 잘리고 피가 튀어도 아무 말 안한다고. 그런데 외래진료는 정반대야. 환자들마다 증상과 병명이 다른 데다가 환자에게 해줄 말도 많아."

"미스터 최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힘들었나 보네요."

엠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점심 식사와 함께 대화가 이어졌다.

최기석은 비록 하루지만 외래진료를 보면서 느낀 요령들을 동료들에게 알려 주었고 동료들에게 환자 한 명을 받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찰스가 운을 뗐다.

"혹시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우리 병원에서 드라마 촬영한대. 흉부외과의가 주인공인 드라마인데. 닥터 마우스랑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하더라."

"닥터 마우스랑 엮을 줄은 몰랐네. 특이하다."

최기석이 한 마디 덧붙였다.

닥터 마우스는 몇 년 전에 종료한 의학 드라마로 성격이 까칠하고 말 많은 천재 내과의가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시즌 9까지 나왔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제 생각에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엠마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드라마 촬영한다고 하면 우리 일에 지장이 있잖아요. 괜히 신경도 쓰이고. 차라리 취소됐으면 좋겠어요."

"엠마는 배우들 보고 싶지 않아요?"

"네. 손톱만큼도요."

"미스터 최는?"

"나도 엠마랑 똑같아. 촬영 시작하면 귀찮은 일만 생기겠지."

"난 했으면 좋겠어."

잠자코 있던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할 때부터 지금까지 처음 입 밖으로 낸 말이었기에 그 무게가 남달랐다.

"넌 왜?"

"드라마 여주인공이 제니퍼 로펜즈니까."

"너 제니퍼 좋아해?"

찰스의 물음에 제레미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특이한 캐릭터 제레미, 그의 모습에 최기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드라마 취소될 일은 없어. MHC에서 홍보차원으로 ABD 채널을 끌어들인 걸로 알고 있거든."

"귀찮다. 귀찮아. 촬영은 언제부터래?"

"정확한 건 모르지만 이번 주부터라고 하더라."

찰스가 말을 마치고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슬슬 일어나자."

"난 스크럽 서러 갈게."

"스크럽? 내일까지는 수술 보조 없는 걸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아는 건가?"

"아침에 야사다 헤드 치프가 급하게 불렀어."

"오케이. 저녁에 팀 미팅 있는 거 잊지 말고."

최기석은 동료들과 헤어져 수술실을 찾았다.

열두 가지 과업 중 첫 번째 과업인 비디오 흉강경 폐 수술이 코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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