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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69화 (268/407)

수련 (2)

이반의 설명이 이어졌다.

MHC는 흉부외과 전문 병원이지만 동시에 중증외상센터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환자를 보느라 눈 코 뜰 사이가 없었고 심지어 응급 수술 스크럽을 두 번이나 섰다고 한다.

"죽을 것 같아.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쉰 것 같아. 괜히 당직을 두 명이나 서는 게 아니더라."

"에너지 음료라도 뽑아 줄까?"

"그럼 고맙지."

최기석은 휴게실에서 에너지 음료 몇 캔을 챙겨 당직실로 돌아왔다.

때마침 CPR팀 동료들과 또 다른 당직의가 도착했다.

이어지는 인수인계.

당직의가 받은 환자들은 엠마와 찰스, 제레미가 각각 나눠서 받았다.

"당직이 힘들긴 힘들구나. 이반이 저러는 건 처음 봤어."

회의실로 향하던 도중 찰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는데."

"나랑 같이 서면 괜찮아."

"하긴 너라면 다행이지."

최기석은 찰스와 제레미의 대화를 듣고서 제레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제레미는 재미있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Go through the patient, 환자 사이로 막 가]

- 누구보다 적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환자를 빗겨 나가는 외과의.

- 근무 중 입원환자 및 중증환자를 받을 확률이 대폭 줄어듭니다. 단, 칭호로 줄어든 환자는 주변 동료가 담당을 맡게 됩니다.

제레미의 칭호는 환타 칭호의 정반대다.

모든 의사들이 선호에 마지않는 칭호라고 할까.

잡담을 나누는 사이 회의실에 도착했다.

이윽고 MHC에서의 첫 번째 오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첫날이었기에 프로젝트 팀과 팀원들의 소개가 가장 먼저 진행되었고 이어서 케이스 발표와 입원환자 브리핑 및 수술 스케줄 확인이 이어졌다.

회진까지 끝나면서 마침내 시작된 일과.

최기석은 목을 뚜두둑 꺾으며 각오를 다졌다.

MHC 특유의 시스템인 레지던트의 외래진료, 이것의 첫 번째 타자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힘내요. 미스터 최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긴장만 하지 마."

엠마와 찰스가 한마디씩 했고 제레미는 아무 말 없이 두 팔을 가볍게 내렸다 올렸다.

걸 그룹이나 할 법한 파이팅 제스처.

최기석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제레미 이 친구는 아무리 봐도 보통이 아니다.

"미스터 최. 잠깐 나 좀 보지."

"네! 그럼 있다가 보자."

최기석은 동료들과 헤어진 후 야사다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MHC에 온 소감은 어때?"

"좋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그 초심 절대로 잊지 마. 사실 MHC의 교육과정은 닥터 송이 자네를 위해서 만든 거니까."

"저를 위해서요?"

최기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 순전히 자네를 키우기 위한 거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라고. 레지던트의 외래진료와 집도 자율화가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흉부외과 전공을 택한 레지던트 중 에이스만 골라서 MHC에 파견한 것도 같은 맥락이야. 자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장치지."

"교수님이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마찬가지야. 닥터 송은 자네를 거의 친자식 수준으로 여기고 있더군."

"말씀을 듣고 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야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헤드 치프. 어제 집도 자율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헤드 치프의 허락을 받으면 정말 그 어떤 수술도 집도할 수 있는 겁니까?"

"능력만 된다면 심장 이식이나 폐 이식까지 시켜 줄 생각이 있어. 물론 사전에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겠지만 말이야. 벌써부터 집도가 탐나나?"

"네!"

"뭐. 그럴 만도 해. 닥터 송에게 이야기를 듣자니 한국에서 이미 CABG(관상동맥 우회술)를 성공시켰다더군."

"맞습니다."

"써전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메스를 드는 게 맞아. 기술전수는 뒷전으로 미루고 잡일만 시키는 건 다 윗대가리들이 잘못하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야사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오늘 오후에 나와 스크럽을 섰으면 좋겠군."

"어떤 수술입니까?"

"VATS(Video Assisted Thoracoscopic Surgery, 비디오 흉강경 폐 수술). 아직 VATS 경험은 없지?"

"보조는커녕 참관도 해 본 적 없습니다."

"가르치는 맛이 나겠군."

야사다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마음 단단히 먹어. 자네를 마음대로 굴려도 좋다고 닥터 송에게 허락받았거든."

"저는 자신 있습니다."

"외래 진료 끝나면 곧장 수술실로 와. 수술이 오후 1시 30분에 있으니까."

"네. 있다가 뵙겠습니다."

야사다와 대화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왔다.

때마침 울리는 알림.

띠링!

[중요 임무, 최기석의 12가지 과업 중 첫 번째 시련을 받으셨습니다. 계속되는 과업에 통과하여 실력을 인정받을 경우 특별한 보상이 제공됩니다.]

[첫 번째 과업: 성공적인 VATS 보조]

[두 번째 과업: 미정]

[세 번째 과업: 미정]

[네 번째 과업: 미정]

.

.

.

'헤라클레스라도 된 기분인데?'

최기석은 임무를 확인한 후 외래진료실로 이동했다.

외래 진료시간이 십 분 정도 남은 시점.

책상을 정리하고 진료 예약한 환자들을 가볍게 훑었다.

똑. 똑. 똑.

"닥터 최. 환자 분 들어갑니다."

"네."

간호사의 말에 최기석은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드디어 외래진료의 막이 올랐다.

"반갑습니다."

한 중년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맞은편 진료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제임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요즘 들어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특히 잠자기 전에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을 못 잘 정도예요. 전하고 다르게 숨 쉬기도 불편하고요."

"오늘이 초진인데 혹시 지병은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담배는 피세요?"

"네. 하루에 1갑 정도 핍니다. 선생님. 혹시 제가 폐암에 걸린 건 아니겠죠?"

제임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폐암은 증상이 없다가도 갑자기 나타난다면서요."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증상들은 언제부터 나타났죠?"

"한 두 주 정도 됐습니다. 원래 병원까지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덜컥 겁이 나서."

"알겠습니다. 우선 청진해 볼 테니 상의 걷어 주세요."

최기석은 청진기로 폐음을 청취했다.

제임스의 호흡은 거칠었으며 코를 고는 것처럼 갸르릉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흡음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부잡음이 들리는 상황이다.

'으음…….'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심계항진과 흉통 등의 증상만 보이고 진단명은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케이스.

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환자 분. 혹시 최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불안함을 느낀 적이 있나요?"

"아…… 그게…… 얼마 전 아내와 심하게 다퉜습니다. 아직 화해는 못했고요."

"검사는 해 봐야겠지만 심리적인 영향으로 말씀하신 증상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선 흉부 엑스레이 촬영하고 심전도 검사 시행하겠습니다."

"네."

"검사 끝나면 다시 와 주세요."

제임스가 나간 후 두 번째 남자 환자가 들어왔다.

환자의 이름은 칼, 그 역시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초진이다.

칼은 진료의자에 앉자마자 투덜거림을 쏟아놓았다.

"이봐요. 선생님. 대체 내가 왜 흉부외과 진료를 봐야하는 겁니까? 먼저 진료 본 가정의학과 의사 돌팔이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제대로 오신 거 맡습니다."

최기석은 가정의학과 의사가 보내 준 차트를 훑었다.

환자가 원하는 진료과를 찾지 못할 경우 가정의학과 진료를 통해 진료과를 정하는 케이스가 제법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칼처럼 말이다.

"오래 서 있으면 발이 무겁다고 하셨죠? 새벽에는 종아리가 아파서 잠도 못자고요."

"네."

"잠깐 다리 좀 살펴보겠습니다."

최기석은 칼에게 다가가 그의 종아리를 살폈다.

양쪽 종아리에 푸른 핏줄이 불룩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칼은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정맥이라는 건 심장에서 온 몸으로 퍼졌던 혈액이 돌아오는 통로를 말합니다. 환자분의 경우 다리에 위치한 정맥의 압력이 높아져서 정맥벽이 약해지고 판막이 손상된 거예요. 그래서 혈관이 이렇게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거죠."

"……."

"하지정맥류는 오래 서 있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주로 걸립니다."

"흠흠…… 마트에서 일하기는 합니다. 근데 흉부외과는 심장 진료를 보는 곳 아닙니까? 이걸 왜 흉부외과에서 진료를 봐야 햐죠?"

"흉부외과는 혈관진료도 같이 보니까요."

최기석의 설명에 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대로 찾아왔다면 다행이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수술이라도 받아야 하나요?"

최기석은 칼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고개를 저었다.

"수술이 필요한 단계는 아닙니다. 압박 스타킹 처방해 드릴 테니까 활동하실 때 항상 착용하세요. 꽉 끼는 바지는 자제하시고 일하실 때 서 있는 자세도 자주 바꿔 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칼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진료실을 떠났다.

"휴우……."

최기석은 탁자에 놓인 물을 마시며 한숨 돌렸다.

이어지는 환자들의 행렬.

초진환자와 재진환자, 수술이 필요한 환자와 수술이 필요 없는 환자, 자신이 의사라도 된 것처럼 먼저 진단명을 정해 놓은 환자, 본인 신세를 한탄하는 환자 등등.

각양각색의 환자를 보는 일은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 또한 피로를 부추겼다.

외래진료의 피로는 병동 일을 하거나 수술을 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적어도 그에게는.

덕분에 사람 대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게 외래진료를 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젊은 남성이 진료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복장이 단정했으며 지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그리고 가슴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린 채 한쪽 손을 가슴에 얹었다.

"개리. 초진이네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죠?"

"가슴이 너무 아파요. 누가 칼로 가슴을 찢는 것 같아요. 죽을 것 같아요."

"정확히 가슴 어느 쪽이 아프죠?"

"여기 앞쪽 가슴하고요 등쪽 날개뼈요. 여기 배 위쪽도 아프고요. 웬만하면 참아 보려고 했는데…… 아윽……."

개리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에 최기석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증상만 들었을 때는 대동맥 박리가 의심되었다.

대동맥 박리.

대동맥은 좌심실과 연결된 동맥인데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모든 동맥들이 대동맥에서 갈라진다.

대동맥 박리란 이 대동맥이 압력으로 인해 찢어진 상태로 일분일초를 다투는 응급질환이다.

"혈압부터 재어 볼게요."

최기석은 서둘러 혈압을 측정하며 개리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6/10

주 증상: 없음

아픈 부위: 없음

진단명: 없음

현재 상태: 양호

경과: 양호

과거력: 없음

가족력: 없음

주의 요소: 없음

환자가 말한 증상과 히포크라테스의 눈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은 개리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료모드로 개리를 살폈다.

[성향: 성공 중심]

[직업 및 전공: 인턴]

[진단력: 2]

[외과적 처치: 2]

[내과적 처치: 1]

[정치력: 2]

[카리스마: 2]

개리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실소가 터졌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최기석은 유심히 개리를 살펴보던 중 그의 가슴 주머니에 있는 펜에 시선을 고정했다.

펜 상단부에 익숙한 마크가 보였다.

"선생님. 저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으으으윽!"

개리가 연신 고통을 호소했고 최기석은 자리로 돌아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야."

"네? 선생님. 지금 뭐라고 하셨죠?"

개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장 죽어 가는 환자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진료가 장난이에요?"

"환자는 개뿔. 그쪽 병원은 아픈 척하는 스파이를 환자라고 부르나 보지?"

"……."

"연기 때려치우고 좋은 말 할 때 꺼져."

최기석이 거지 쫓아내듯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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