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68화 (267/407)

수련 (1)

"치프, 진심입니까?"

"그럼 전공 수련 중인 레지던트를 불러 놓고 농담 따먹기를 하겠어요??"

로버트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MHC의 목표는 하이클래스 흉부외과 써전을 양성하는 겁니다. 당연히 메이죠 흉부외과와 교육 과정이 같을 수 없죠. 외래 진료는 로테이션으로 진행하고 당장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진료 시간은 얼마나 되죠?"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대략 4시간 정도예요. 그리 길지 않으니 너무 걱정 말거요."

설명이 끝나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본래 대학병원 외래진료는 전공과정을 마친 전공의는 되어야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수련 중인 레지던트가 외래진료를 보게 될 줄이야.

참석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넋 나간 표정을 주고받았다.

"놀라기엔 아직 일러요. 전해 줄 소식은 두 개가 더 있어요."

로버트의 손가락 두 개는 아직 접히지 않았다.

"자, 두 번째 소식은 집도에 관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궁금해할 정보겠죠?"

"……."

"MHC에서는 여러분들도 집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야사다 헤드 치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요."

"헤드 치프가 허락하면 그 어떤 수술이라도 집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원칙적으로는 그래요."

최기석의 질문에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도를 원하는 레지던트는 야사다 헤드 치프께 집도희망서를 제출하면 됩니다. 참고로 집도를 희망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집도 횟수는 다 채워야 해요."

"……."

"경험이 사람을 키운다. 그게 야사다 헤드 치프의 교육방향이거든요. 혹시 이의가 있는 사람은 제게 하지 말고 야사다 헤드 치프에게 직접 하세요."

로버트가 선을 긋자 몇몇 레지던트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야사다의 명성과 반비례하는 것이 바로 그의 아랫사람 대하는 태도다.

야사다는 하급자를 들들 볶고 쥐 잡듯이 잡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의를 제기한들 통할 리 없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팀 활동을 하게 됩니다."

로버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MHC의 레지던트들은 4인 1조로 팀을 구성한다.

이 팀은 전공의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며 긴밀한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의 실력을 키워 나간다.

"지금부터 조를 발표합니다. 먼저 A조예요. 기석 최, 엠마, 찰스, 제레미, B조는 이반……."

A조가 호명된 순간 버스에서 대화를 나눴던 4인방의 눈빛이 교차했다.

"성적순이네. 그렇지?"

그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찰스가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고 최기석은 대답 없이 고갯짓을 했다.

그 역시 찰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흔히 통용되는 능력주의.

그것이 병원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조 발표가 끝난 후 레지던트들이 회의실을 나왔다.

로버트를 따라서 MHC의 건물과 시설을 견학한 후 마지막으로 흉부외과를 찾았다.

MHC 흉부외과는 메이죠 흉부외과보다 두 배는 더 깔끔하고 세련됐다. 스테이션과 베드가 없었다면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자. 오리엔테이션은 이걸로 마치겠어요. 지금부터 조별 활동을 시작합니다. 각 조별로 외래 및 당직 근무표를 작성해서 오늘 일과 전까지 제출해 주세요. 알겠습니까?"

"네!"

씩씩하게 대답한 써전들이 흩어졌다.

최기석은 팀원들과 함께 복도 끝 제2회의실을 찾았다.

버스에서 먼저 통성명을 했기에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제 슬슬 팀명하고 근무표를 짜야겠지?"

찰스가 손에 들고 있는 펜을 굴렸다.

"팀명부터 짜는 게 좋겠어요. 뭔가 좋을까요? 하트비트 같은 게 무난할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무난하지 않아요? 다른 조랑 겹칠 것 같기도 하고. 코드 블루…… 아. 이것도 너무 식상하구나. 미스터 최 생각은 어때?"

세 사람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몰렸다.

"처치라면 모를까 나는 이런 쪽으로는 영 젬병이라서. 어쨌든 팀명만 듣고 흉부외과 전공이라는 게 느껴져야 되는 거잖아."

"그렇지."

"가만 보자. 에크모는 어때?"

"일단 적어 둘게요. 우선 아이디어를 다 적어 보고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걸로 정해요."

엠마가 필기를 시작했다.

이윽고 팀명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증상용어인 chest pain(흉통), palpitation(심계항진), arrhythmia(부정맥)부터 수술명인 노우드, 세이버, 메이즈 수술 등등.

갖가지 명칭이 떠올랐지만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는 이름은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CPR."

그의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회의실에 퍼졌다.

"CPR? 그거 느낌 좋은데? 심장과 폐를 회복하는 처치인 데다가 응급환자를 살린다는 느낌도 들고."

"저도 좋아요."

"나도."

팀명이 CPR로 정해지자 제레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활약에 만족하는 모습.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말수가 적은 제레미, 그가 처음으로 귀여워 보였다.

띠링!

[팀 CPR이 구성되었습니다.]

[소속: 팀 CPR]

[팀 성향: 환자중심]

[팀 레벨: 1/5]

[단결력: 1.5/5]

[처치레벨: 1/5]

[팀 특수능력: 없음]

상태창에 떠오른 팀의 정보.

팀이 막 결성된 만큼 능력치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MHC 동기들로 꾸며진 이 팀을 최고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세계 최고의 여자 흉부외과 써전을 목표로 하는 엠마.

병원을 넘어 의료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찰스.

수줍게 활약하는 제레미.

이 동료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내일 있는 외래 근무, 우리 조부터 시작이지?"

"왜 네가 근무 서고 싶어?"

"어. 내가 먼저 서는 게 나을 것 같아. 요령 파악해서 모두에게 알려 줄게."

"우리야 땡큐지."

찰스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근무 스케줄을 완성하고 잡답을 나누다 보니 일과시간이 훌쩍 지났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기숙사로 이동했다.

처음 해 보게 될 외래 진료.

야사다의 허락을 받으면 그 어떤 수술이라도 집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벌써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MHC에 오길 잘했다.

* * *

그날 저녁.

송명진은 야사다를 비롯한 임원들과 저녁을 먹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몸은 피곤했지만 할 일이 남아 있었다.

MHC에 관련된 각종 서류를 읽던 중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때마침 팀 활동을 시작한 신규 레지던트들의 팀명과 근무표가 눈에 들어왔다.

'다들 증명해 주세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서류를 읽는 송명진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번 레지던트 교육과정을 계획한 것은 바로 송명진이다.

레지던트의 외래 진료, 조기 집도와 집도의 자유화, 동기 간의 팀 활동까지.

한국에서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수련법이지만 MHC라면 가능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메이죠를 대표하는 흉부외과 써전이었으며 지금은 진료부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이 혁신적인 교육 과정을 밀어붙일 힘이 있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졌고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최기석을 포함한 레지던트들이 부디 교육을 잘 마치고 훌륭한 써전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수밖에…….

'갈 길이 멀구나.'

송명진은 돋보기안경을 벗고서 눈을 비볐다.

수술실을 떠난 후 더 바빠졌다.

수술실에서는 환자에게만 집중하면 되지만 교육를 비롯한 다른 제반을 다지는 일은 한층 많은 심력을 요구했다.

서류업무를 끝낸 송명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신호음.

오늘은 상대가 아예 전화를 안 받을 생각인 듯싶었다.

포기하고 종료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상대 목소리가 들렸다.

[송 교수. 아니 이제는 진료부원장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호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순진한 소리 하는 건 여전하군요.]

상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오늘도 또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한 겁니까?]

"맞습니다."

[최 선생에게도 누누이 말해 왔지만 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합니다. 더 이상 날 끌어내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하는 말 진심이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사람은 무릇 자기 그릇에 맞는 곳에서 있어야 하는 법. 지금 있는 곳은 어울리지 않아요."

[그건 송 교수 생각이죠.]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송명진이 말을 이었다.

"저 얼마 전에 은퇴했습니다."

[으…… 은퇴요? 어째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젊은 써전들에게 미래를 맡기기로 했어요. 내가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것보다 나보다 멋진 써전을 만드는 게 수지타산에 맞겠다 싶었죠."

[흐음…….]

"그리고 그 일의 적임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메이죠에는 세계적인 써전들이 수두룩한데. 송 교수는 어째서 내게 집착하는 겁니까?]

"그건 간단해요. 그들보다 당신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죠. 명성과 실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송명진의 말에 상대가 침묵을 지켰다.

"염치 불고하고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제게 힘을 보태 주세요."

[……송 교수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면 어쩔 수 없군요.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를 했는데,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이라고 더 이상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그럼 제 부탁, 들어주시는 겁니까?"

[조만간 이쪽 일 정리하고 뉴욕으로 넘어가죠. 대신 USMLE를 통과해야 하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권 교수."

송명진은 통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MHC를 위한 퍼즐 조각 하나가 이제 막 완성되었다.

* * *

다음 날 새벽.

최기석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한 흉부외과 생활.

이에 송명진이 의진대 시절처럼 최신 논문을 정리해서 보내 주기로 했다.

"역시. 교수님이야."

최기석은 메일에 첨부된 논문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기분 탓인지 예전에 비해 논문 수준이 몇 단계는 뛰어오른 것 같았다. 개중에는 아직 유효성을 입증하지 못한 신수술도 포함되었다.

[논문이 가장 쉬웠어요]

- 꾸준하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눈을 뜨는 순간이 있죠. 그때부터는 모든 게 쉬워져요.

- 논문 이해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논문의 주장과 근거를 파악하며 논리상의 맹점을 쉽게 파악합니다.

칭호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독파하고 감상문을 보냈다.

신수술에 대한 그의 의견은 회의적.

해당 수술은 수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술 후 경과가 좋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슬슬 가 볼까?"

최기석은 가운을 걸치고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닥터 최."

"만나서 반가워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간단한 통성명을 나눴다.

드르르륵.

대화를 끝낸 후 당직실로 들어갔다.

어제 야간 근무를 섰던 이반이 피로에 찌든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왜 그래? 어제 환자 많았어?"

최기석의 질문에 이반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 하얗게 불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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