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 Heart Center (4)
"하아…… 이것 참."
루카스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고, 레온은 간신히 슬픔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 역시 최기석과 같은 마음이었다.
먼 길 떠나는 동료를 지켜보는 게 어찌 쉬울 수 있을까.
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풀먼 교수가 남은 시간을 잘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맞는 말이야. 풀먼이 지금까지 괴로워했다면 우리도 더 속이 탔겠지."
루카스는 말을 마치고 책을 집어 들었다.
"바람의 숨결이라…… 풀먼다운 제목이군."
"헤드 치프도 읽어 보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풀먼 교수의 성찰이 깊습니다."
"그래. 꼭 봐야지."
"그리고 이 기회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풀먼 교수가 제게 새로운 척추 수술 자료를 넘겼습니다. 그걸 헤드 치프께 드리고 싶습니다."
"내게?"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풀먼이 자네를 택했다면, 자네가 학계에 발표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풀먼도 그걸 바라고 줬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그 일로 통화했습니다. 풀먼 교수도 동의한 내용입니다."
최기석은 새로운 척추 수술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최고의 흉부외과 써전이 되는 것.
본인이 펼치지 않을 수술법을 손에 쥐고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법을 공개해 환자들의 아픔을 덜어 주는 게 옳았다.
"자네와 풀먼이 동의했다면 알겠네."
"네. 오늘 중으로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때마침 비가 오는군."
루카스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기상했을 때의 맑은 날씨가 거짓말처럼 짓궂게 변했다.
"그럼 슬슬 일어나지. 미스터 최는 나랑 외출 준비하고."
루카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날 오후.
먹구름 낀 하늘이 장대비를 토해냈다.
최기석은 정장을 입은 채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오늘은 프리드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경찰이 부검을 주장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우선 매튜와 경찰청장의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프리드가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두 명으로 늘었다.
사건의 잘못이 경찰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내내 최기석은 마음이 불편했다.
프리드 사건은 이 사회의 부조리를 잘 드러내는 단면 중 하나였다.
인종차별에서 이어진 부당한 폭행.
거기에 의사와 경찰 간부 간의 은밀한 뒷거래까지.
어째서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타인을 손톱만큼이라도 존중했다면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최기석은 매튜를 통해 다시 한 번 배웠다.
의사는 자신의 명예와 이익이 아니라 환자를 향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마저 타락한다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최기석과 루카스가 보호자 제인에게 다가갔다.
"제인."
최기석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프리드를 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제 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닥터 최는 최선을 다했어요. 누구도 당신을 탓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잖아요. 우리 남편이 그런 것처럼."
제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닥터 최로 인해 남편의 누명이 벗겨졌어요. 미안해할 게 아니라 제가 고마워할 부분이죠."
"……."
"우리 남편. 저세상에서는 행복할 수 있겠죠?"
제인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고 최기석은 그녀를 가볍게 포옹하며 그녀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프다.
오래전 깨달음이 새삼 온몸을 찔러왔다.
"분명 행복할 거예요. 제가 보장합니다."
"네. 꼭 그럴 거예요."
최기석은 제인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루카스와 클리닉으로 복귀했다.
날씨는 여전히 어두웠고 빗줄기는 갈수록 거칠어졌다.
프리드의 억울한 죽음에 하늘도 슬퍼하는 게 아닐까.
"미스터 최. 괜찮나?"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환자를 떠나보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 차라리 가슴에 못질을 당하는 게 나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잘 이겨 내야 해. 역설적인 말이지만 의사는 많은 죽음을 경험할수록 강해지는 법이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리닉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루카스와 헤어진 후 일반외과 병동을 찾았다.
"기석아!"
"왔군."
정설화와 정진명이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주 좋아. 당장 복귀해서 변호할 수 있을 정도로."
"아버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충분히 쉬셔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차라리 일을 완전히 쉬시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일을 그만두면 설화랑 마누라는 누가 먹여 살리나?"
"제가 먹여 살려야죠."
그의 말에 정설화가 볼을 붉혔고, 정진명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메이죠에서 치료받으며 그는 최기석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은퇴 이야기에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진심으로 아버님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나 압박감이 심하셨을 테니까요."
"이 기회에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감사합니다."
"근데 웬일로 정장을 입었어?"
정설화가 화제를 돌렸다.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프리드 환자 알지?"
"아…… 그랬구나. 마음고생 많았을 텐데…… 수고했어."
정설화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빠. 전 이제 가 볼게요."
"그래. 괜히 나를 따라 미국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그런 소리 마세요."
정설화가 손사래 치며 정진명을 꼭 끌어안았다.
"끝까지 함께 있지 못해서 미안해요. 치료 잘 받고 돌아오세요."
"그래."
부녀의 작별인사가 끝났다.
이윽고 최기석은 정설화와 차를 타고 미네소타 공항으로 향했다.
정설화의 연차는 내일로 끝난다.
그래서 오늘 의진대로 돌아가야 했다.
"아쉽다. 모처럼 미네소타에 왔는데 같이 있었던 시간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
"그러게. 아버님 치료도 있었고 나한테 워낙 큰일이 많이 생겨서."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정설화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가?"
"기석이 네 일상이 너무 파란만장하잖아. 프리드 환자 일도 있었고 샴쌍둥이 분리 수술도 있었고. 다른 사람은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할 일을 동시에 겪다니."
"부정할 수가 없네. 설화가 내 일복 좀 덜어 갈래?"
"난 안 돼. 너만 한 능력이 없잖아. 기석이 네가 그런 힘든 일을 겪는 건 그걸 이겨 낼 만한 능력이 있어서라고 생각해."
"으음…… 듣고 보니 설득력 있네."
최기석이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그럼 이렇게 착하고 예쁘고 참한 설화를 만난 것도 같은 이유겠네. 그렇지?"
"몰라. 바보."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했고, 최기석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참. 치료비 벌써 계산했어? 중간 수납하러 갔더니 수납할 게 없다고 하던데."
"이틀 전에 전부 결제했어. 아버님은 그냥 퇴원하시면 돼."
"한국에 돌아가면 진료비 입금해 줄게. 중입자 치료까지 받아서 금액이 엄청 크게 나왔잖아. 너 혼자 부담하게 할 수 없어."
"설화야."
차가 신호에 멈춘 사이 최기석이 정설화를 응시했다.
"나는 그동안, 네 사랑을 받기만 했어.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내 마음을 받을 차례야.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자."
"그래도 안 돼. 이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네."
최기석은 슈퍼볼에 당첨된 사연을 설명했다. 시간을 넘어서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우연히 복권을 사서 당첨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정말? 슈퍼볼에 당첨됐다고?"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아버님 진료비가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도 그거고."
"우와. 나 지금 꿈만 같아."
"나도 그래. 흉부외과 최고의 써전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으면, 아마 우리 둘이 평생 해외여행만 다녔을걸?"
최기석이 다시 차를 몰았다.
"가족들은 당첨된 거 알아?"
"아직 말 안 했어. 집안 형편이 당장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벌써 말할 필요 없지."
"하긴 소문이 퍼지면 피곤할 테니까. 오늘 이야기는 나도 못 들은 걸로 할 게.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역시 설화야. 어쨌든 이번 진료비 건은 그냥 넘어가는 거다?"
"……응. 고마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미네소타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하면 전화할 게. 사랑해."
정설화가 그의 볼에 입 맞춘 후 게이트로 향했고 최기석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빴던 마지막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 * *
신경외과 수련이 계속되었다.
최기석은 꾸준히 신경외과 동영상을 촬영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트레이닝 룸 수련과 PVP 모드 수련에 힘썼다.
덕분에 수련 4개월 차에 레온을 넘어서 임무를 완수했다.
임무 보상은 500 P.
P 그리고 PVP 모드 입장 횟수가 3회로 증가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루카스가 그를 조기 진급시키면서 성형외과로 이동하게 되었다.
성형외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합 솜씨.
최기석은 그동안 갈고 닦은 봉합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신규 레지던트임에도 펠로우 급의 꼼꼼함과 봉합 속도를 뽐냈다.
성형외과에서도 그를 끌어내리려는 무리가 있었지만 당하지 않았다. 매튜나 다른 인물들에게 했던 것처럼 속칭 역관광을 선사했다.
정치력과 카리스마 스탯을 각각 8단계까지 상승시킨 그다.
그의 앞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흉부외과에 필요한 로테이션 기간은 총 5년.
최기석은 과를 돌 때마다 조기 진급에 성공하는 전례 없는 기록을 남겼다.
시간이 흘러 메이죠에 온 지 3년이 지났다.
오랜 기다림의 결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최기석은 마지막 로테이션과인 정형외과에 안착했으며 충실한 처치로 조기 진급을 보장받았다.
그렇게 찾아온 정형외과 수련 마지막 날.
이제 흉부외과가 코앞이다.
* * *
K 로젯.
정형외과 스태프들이 수술을 앞두고 최종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었다.
"환자는 42세. 진단명은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로 인공관절 대체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수술 과정은……."
최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
이것은 골반 뼈와 맞닿은 넓적다리뼈 위쪽 끝부분에 혈류가 차단되어 뼈 조직이 죽는 질환이다.
이를 방치할 경우 괴사 부위가 무너지며 고관절에 손상이 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유명 락 가수 김경오가 이를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상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좋아. 스크럽하고 들어가자고."
집도의 핀치의 말에 스태프들이 일렬로 늘어서 솔로 팔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벅. 벅. 벅. 벅.
"아쉽군. 오늘이 자네와 하는 마지막 수술이라니."
핀치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향했다.
"저도 아쉽습니다. 헤드 치프께 정말 많은 걸 배웠는데……."
"그래? 그렇게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정형외과 전공으로 바꾸는 건 어때?"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흉부외과밖에 모르는 바보 같으니라고."
핀치가 웃으며 로젯으로 들어갔고 스태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외과 로테이션 마지막 수술이구나. 깔끔하게 끝내 주겠어.'
최기석은 각오를 다지며 제1보조 자리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