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일격 (7)
터벅. 터벅.
매튜는 빠른 걸음으로 파커의 집무실을 찾았다.
최기석이 폭탄을 터뜨린 지 하루가 지났다.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화살들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종류도 매스컴, 메이죠 동료, 대학 동기, 환자들 등등으로 전방위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야 해.'
매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신경외과 헤드 치프는 고사하고 교수직에서 잘리고, 의료법 위반으로 형사 입건될지도 몰랐다.
사회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해도 비리 커넥션 또한 명명백백하게 존재한다.
어쩌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빌어먹을 자식.'
문득 최기석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외과 로테이션 중인 레지던트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위기만 벗어난다면 최기석을 반드시 퇴출하리라.
벌컥!
매튜는 문을 열고 파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노크도 없이 뭐하는 짓인가?"
업무 책상에 앉아 있던 파커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네. 상황이 너무 급해서 말이야. 자네가 어제부터 전화를 받지 않아서 더 초조해졌다고."
"아. 어제 전화 말인가? 일부러 안 받았어."
파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자네한테 볼일 없거든."
"이 봐. 난 매튜라고! 미국 대륙에서 뇌종양 분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써전이란 말이야. 내 가치가 이리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하나?"
"맞아. 자네는 이제 끝났어."
"끄…… 끝났다고?"
"그래. 자네만 그 사실을 못 받아들이는 것뿐이지. 이런 경험은 처음일 테니까. 미스터 최가 녹음 파일을 틀었을 때부터 게임은 끝났어."
파커의 말에 매튜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 주게. 부탁이야. 나를 구제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의 개가 되겠어. 자네가 원한다면 그때마다 짖을 수도 있다고."
"구질구질하군. 내가 아는 매튜 맞나?"
파커의 시선에 경멸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야. 부탁이네. 파커. 제발! 나를 도와줘."
"병신같이 굴지 말고 꺼져!"
파커의 호통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매튜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무실을 나왔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임원회의가 시작되었다.
임원회의는 각 과의 헤드 치프와 과장급, 클리닉 운영 임원들이 참석하는 최상위 회의다.
참석자들은 'ㄷ'자 형태의 테이블에 앉았고, 회의를 진행하는 부병원장은 테이블 중앙에 자리 잡았다.
"매튜.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더구나."
부병원장 크리스토퍼가 매튜를 보며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매튜는 크리스토퍼와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 말인즉슨 지금까지 부병원장의 신임을 받았다는 소리다.
"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넌 메이죠의 위신을 떨어트렸어. 의사가 경찰과 손을 잡고 진단명을 위조하다니……. 지금 메이죠에서 진료받는 환자들이 메이죠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죄송합니다."
"이 정도 그릇인 줄 알았으면 진작 쳐 내는 건데. 쯧쯧쯧."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구기며 회의를 진행했다.
이번 달 클리닉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을 소개하고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지막 순서는 대망의 신경외과 헤드 치프 선출이다.
"뭐. 이걸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절차는 따라야겠지. 신경외과의 차기 헤드 치프로 루카스를 지지하는 사람부터 손을 들어 보게."
크리스토퍼의 말이 무섭게 참석자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매튜는 손을 든 사람들을 훑어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최기석이 어제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바뀌었을지 모르는데…….
"의사들 만장일치에, 운영위원 여덟 명까지 만장일치군. 대단해, 매튜. 자네가 메이죠의 새 기록을 세웠어. 아마 이 기록은 평생 깨지지 않을 걸세."
크리스토퍼가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신기록 달성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
"이번 주 안으로 업무 정리하고 메이죠를 떠나게. 뭐, 시간이 필요하다면 더 줄 수는 있지만 아마 자네가 원하지 않을 것 같군. 남은 시간 동안 좋은 변호사를 찾아보라고."
"……."
"그리고 루카스. 신경외과의 차기 헤드 치프가 된 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루카스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회의실에 박수갈채가 터졌다.
임원회의가 끝난 후.
크리스토퍼는 그의 집무실에서 파커와 대화를 나누었다.
"매튜 녀석. 키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실망하게 할 줄이야. 나도 나이를 먹었나 봐. 사람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아."
"부병원장님. 그럼 말씀 마십시오. 메이죠의 매출을 두 배로 끌어올린 건 부병원장님의 탁월한 인재 발굴 능력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인재를 보는 눈이라……. 혹시 자네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
"저를 포함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크리스토퍼가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신경외과에서 수련 중인 기석 최는 어떤가?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그가 생각하기에 최기석은 미스터리한 존재다.
신규 레지던트임에도 웬만한 펠로우 못지않은 의료실력을 갖췄다. 더불어 그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대형 사건사고들이 발생했다.
크리스토퍼가 최기석을 더 주목하게 된 것은 오늘 마무리된 매튜 사건이다.
최기석은 매튜와 나눈 대화를 녹음하여 결정타를 날렸다. 그 모습은 의사라기보다는 정치인, 전략가 같은 풍모를 짙게 풍겼다.
"제가 탐내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몇 주 전 매튜를 차기 신경외과 헤드 치프로 밀어달라고 부병원장님께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사실 그건 미스터 최를 응급의학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헤드 치프가 된 매튜를 앞세워서 미스터 최의 수련 과정을 망칠 생각이었죠."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겠어."
크리스토퍼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업 제대로 해 놔. 아군이라면 든든하지만 적이 되면 피곤한 스타일이야. 나야 자네를 믿지만, 상황이란 게 항상 마음대로 굴러가지는 않지 않나. 매튜까지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게. 난 다음 미팅이 있어서."
크리스토퍼는 파커를 보낸 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기석 최라……."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스크럽을 막 끝내고 휴게실로 향했다.
무려 여섯 시간짜리 수술의 제1보조를 맡았다. 환자 바라기의 효과로 체력 부담은 덜했지만, 정신력 소모가 컸다.
머리가 텅 빈 깡통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온음료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자 서서히 의식이 맑아졌다.
'신경외과도 무사히 지나가겠구나.'
상태창을 띄우며 미소를 지었다.
어제 기자회견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매튜의 평판이 확 떨어졌다. 킹메이커 임무에 필요한 평판 감소는 3단계였지만 무려 10단계를 깎아 버렸다.
현재 매튜의 평판은 -3.
속된 말로 거지꼴이 된 셈이다.
어쨌든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기에 조기 진급은 따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샴쌍둥이 수술과 정진명의 치료뿐.
최기석은 휴식을 끝내고 영안실을 찾았다. 제인이 영안실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인, 안녕하세요."
"아, 닥터 최! 감사해요."
제인이 벌떡 일어나서 그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닥터 최 덕분에 남편이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경찰에서 부검을 강행하고 사인이 병사로 밝혀졌다면 전 참을 수 없었을 거예요."
"제인과 같은 생각입니다. 부당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았네요."
"네. 정말 감사해……."
제인이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최기석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경찰도, 매튜도 이번 사건에서 발을 빼지 못해요. 사건이 워낙 이슈가 된 만큼 확실한 처벌을 받을 거고요."
"……."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네. 저도 이제 남편을 편히 보내 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아요."
"힘들겠지만 잘 이겨 내리라 믿습니다."
띠링!
[숨겨진 임무, '불의에 맞서서'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0 P.
P와 한계의 돌 열 개, 랜덤 스탯업 북을 제공합니다.]
최기석은 제인을 위로한 후 영안실을 떠났다. 그리고 병동으로 이동하는 도중 랜덤 스탯업 북을 사용했다.
휘이이이잉.
상태 창에서 하얀빛이 뿜어지면서 한순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띠링!
[외과적 처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외과적 처치: 7 ----> 외과적 처치: 8]
알림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가장 원하던 스탯에 레벨업이 이루어졌다.
외과적 처치가 8단계라면 웬만한 펠로우와 교수급 레벨이라 볼 수 있었다.
문득 좋은 일을 해서 좋은 보상이 들어오는 건가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신경외과 병동에 돌아왔다.
"미스터 최. 잠깐 나 좀 보지."
복도 끝에 있던 루카스가 최기석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최기석은 그의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루카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은 표정.
오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신경외과 헤드 치프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뭐…… 뭐야?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 어떻게 알았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헤드 치프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하고 있는 걸요."
"티나 났군. 최대한 숨긴다고 숨긴 건데 말이야."
루카스가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승진 소식을 자네에게 제일 처음 알리는 거야. 내가 이 자리에 온 건 자네 도움이 컸어."
"제 도움이 있었지만, 헤드 치프가 영민하게 행동하신 부분이 더 큽니다."
"하하하. 아주 듣기 좋은 말이군.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겸손 떨지 않고 즐기겠어."
"괜찮으시다면 오늘 회의 때 있었던 일을 듣고 싶습니다."
"못할 것도 없지."
루카스는 임원회의에 있었던 일을 최기석에게 들려주었고 최기석은 이를 유심히 들었다.
전개 방향이 그가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무릇 도움을 받았으면 보상을 주는 게 도리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조기 진급을 하고 싶습니다."
"조기 진급이라……. 자네와 더 있고 싶은 나로서는 아쉬운 이야기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자네의 목표가 흉부외과에 있다는 건 누구나 아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하늘과 땅이 갈라지더라도 자네를 조기 진급시켜 주겠네."
루카스가 말하기 무섭게 알림이 울렸다.
띠링!
[신규 버프, 깨지지 않는 맹세를 획득하셨습니다.]
[루카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하이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쯤하고 슬슬 일어나 볼까? 샴쌍둥이 수술이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어."
"네."
두 사람은 집무실을 벗어나 수술실로 향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프리드 사건을 잘 마무리 지은 최기석은 샴쌍둥이 수술에 전력투구했다.
우선 수술 연습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시간이 남을 때는 촬영한 동영상을 보거나 트레이닝 룸에서 수련하기도 했다.
비록 모든 수련이 모형으로 이루어졌지만, 항상 현실을 가정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샴쌍둥이 수술 당일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