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일격 (2)
"마음 아플 거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어요. 꼭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
"……네. 지금 바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최기석은 레온과 대화를 마치고 보호자 대기실로 이동했다.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정작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뇌사판정을 내릴 때 제인이 지을 표정, 그녀가 느낄 감정들이 벌써 머릿속에 환했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되도록 그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제인은 물론 자신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제인."
"네. 선생님."
그의 부름에 제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희망이 최기석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혹시 프리드가 깨어났나요?"
"프리드는 아직 의식불명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도 수술이 잘 끝났으니까 조만간 의식을 차릴 수 있겠죠?"
"지금부터……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프리드는 수술 후 계속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오늘 아침부터는 호흡기에 의지하지 않으면 호흡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그건 알아요."
"지금까지 경과 관찰한 결과 프리드는……."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며 제인의 시선을 피했다.
"프리드는 뇌사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뇌…… 뇌사요?"
제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치켜떴다.
"네. 유감스럽지만 현재로써는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프리드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선생님.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수 있지 않나요? 몇 년 동안 의식불명이었다가 깨어난 사람이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혹시 프리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제인이 두 손을 모아 필사적으로 말했다.
"방금 제인이 말한 경우는 식물인간 상태입니다. 식물인간이라는 건 대뇌의 기능은 정지했지만 다른 기능은 정상을 유지하는 것이죠."
"……."
"식물인간은 뇌사와 달리 자발적으로 호흡이 가능하며 심박도 안정적입니다. 간혹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는 환자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건 그런 식물인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불행하게도 회복 가능성이 없습니다."
"선생님. 너무 딱 잘라서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제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남편 살려 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포기하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아……."
제인이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고, 최기석은 침묵 속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정설화와 결혼하고 그녀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 절망감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하죠?"
"가족분들과 상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시기나 장기기증 여부 같은 것도 결정하셔야죠."
"……."
"제인. 이런 말씀 드리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 저는……."
"저야말로 화내서 죄송해요. 닥터 최의 잘못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참기가 힘들어서."
제인이 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경찰관들, 우리 남편을 뇌사 상태로 만든 그 경찰관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파멸시키고 말 거예요."
제인의 저주가 대기실을 휘감았다.
최기석은 제인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기숙사로 복귀했다.
할 일은 많았지만, 뇌사판정을 내린 직후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뇌사에 빠진 프리드와 이를 지켜봐야 하는 제인과 가족들.
폭행사건으로 골머리를 치르고 경찰관들.
이들의 악연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끝나게 될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아팠다.
무거운 마음을 떨치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타다다다닥.
잠깐 미뤄 두었던 타이핑 작업에 들어갔다.
시한부 인생이 된 척추신경외과 교수 풀먼, 그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작업을 끝내야 한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눈을 감은 채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얼핏 보면 선잠을 든 것 같지만, 사실은 어제 촬영한 샴쌍둥이 모형 수술을 살피는 중이다.
'역시 만만치 않아.'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제는 총 4단계까지 진행되는 수술에서 1단계를 마쳤다.
수술 난이도가 가장 낮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집도 속도는 굼벵이처럼 느렸다.
그만큼 작업을 신중하고 꼼꼼하게 진행했다는 뜻이다.
실전이라면 모형 수술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모형은 피가 흐르지 않으며, 바이탈 또한 존재하지 않기에.
최기석은 수술 영상을 두 번 연속으로 돌려보고, 트레이닝 룸에 접속해서 PVP 모드를 선택했다.
휘이이이잉.
하얀빛이 뿜어지면서 주변의 모습이 바뀌었다.
그는 어느새 수술대 앞에 서 있었다.
[PVP 모드 입장을 환영합니다. 오늘 입장 가능한 횟수를 모두 채우셨습니다(1/1).]
[대결을 펼칠 수술로 뇌동맥류 수술, 상대 의사는 레온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집도를 준비해 주세요.]
알림과 함께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짜 레온이 자리를 잡았다.
그와 자신의 머리 위로 수술 진행 상태를 알려 주는 바가 떠올랐으며 가상의 스태프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뚜두두둑.
목을 꺾으며 승리를 다짐했다.
지금까지 레온과 펼친 뇌동맥류 수술 전적은 15전 0승 15패.
압도적인 열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레온이 남다른 실력자고, 자신보다 수련 기간이 길었다고 해도 패배가 달가울 리 없었다.
[지금부터 뇌동맥류 수술을 시작합니다.]
알림과 동시에 양쪽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두두두두.
드릴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 개두술이 끝났다.
이윽고 드러나는 머리 내부의 모습.
최기석은 미세 현미경을 보지 않고, 용의 눈 줌 인 기능으로 수술 부위를 살폈다.
"윌리스 써클로 들어간다."
최기석의 말에 가상 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수술 부위에 접근했다. 그러던 도중 지주막 부위에 발생한 출혈을 찾아냈다.
지주막에 외상이 없음에도 출혈이 발생했다는 것.
그것은 이미 파열된 뇌동맥류가 존재하며, 그곳에서 발생한 피가 지주막으로 흘러들었다는 뜻이다.
'서둘러야겠어.'
최기석은 스태프들에게 출혈 처치를 마치고, 수두증 치료에 나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주막하 출혈로 정체된 뇌척수액의 원활한 흐름을 도운 후 간신히 수술 부위인 중대뇌동맥에 도달했다.
중대뇌동맥의 상태는 심각했다.
혈관의 한 분지는 이미 터져 버렸다. 이와 가까운 곳에는 28밀리미터는 될 듯한 거대 동맥류가 자리 잡았다.
'어디까지 갔지?'
최기석은 힐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바가 절반까지 차올랐다. 수술을 절반 가까이 끝냈다는 뜻이다.
반면 최기석의 진행 과정은 아직 절반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
처치 속도는 큰 차이가 없었다.
딸칵!
최기석은 혈관겸자로 출혈이 발생한 혈관 상단부를 묶었고, 가상 스태프들은 석션기로 남은 피를 흡입한 후 터진 혈관을 전기 소작기로 지졌다.
치이이이익.
하얀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파혈된 혈관에는 근위동맥 결찰술을 하고, 동맥류에는 클립 결찰술을 한다. 4-0 Dexson, 인조혈관."
최기석은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파열된 혈관을 봉합해 나갔다.
7단계로 뛰어오른 외과적 처치와 양손잡이 스킬.
이 두 가지로 인해 손이 춤추듯 움직였다. 만약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볼 수 있었다면, 기절했을지 모를 만큼 봉합이 빠르고 정확했다.
그는 파열된 동맥에 대한 처치를 끝내고 뇌동맥류를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매일 뇌동맥류 트레이닝을 하다 보니 동맥류 크기만 봐도 대충 어떤 클립을 써야 하는지 감이 왔다.
"17번하고 4번 클립."
소독간호사에게 클립을 받아 부풀어 오른 동맥을 묶었다.
클립의 크기와 뇌동맥류의 크기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최기석은 추가적인 뇌손상이 있는지 살핀 후 두개골을 덮으며 수술을 마무리 지었다.
[PVP인 상대인 레온과 동시에 수술을 종료하셨습니다. 레온의 수술 랭크는 A+, 당신의 수술 랭크는 A입니다. 대결의 승자는 레온입니다.]
[당신은 패배하셨습니다.]
알림이 울리면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최기석은 아쉬움을 머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묘한 랭크 차이를 보면 레온이 처치 과정에서 조금 더 섬세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레온을 많이 쫓아온 셈.
조금 더 노력하면 그를 꺾을 수 있으리라.
기숙사를 벗어난 후 주차장으로 이동해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모처럼의 오프 날이다.
평소대로라면 구조 팀 활동에 나서야 하지만 파커에게 말해 특별히 하루 쉬기로 결정했다.
구조 팀 업무보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기에.
한참 도로를 달려 미네소타 공항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입국 게이트 밖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정설화와 그녀의 아버지 정진명이다.
"기석아!"
그를 발견한 정설화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아버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군. 설마 미국 땅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정진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차에 타시죠. 자세한 이야기는 병원에 가는 동안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이윽고 세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공항을 벗어났다.
"미국에 오신 결정,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말이야."
정진명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설화 말로는 자네가 내 치료비를 전부 부담한다고 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네. 맞습니다."
"당돌한 말을 했군. 우리 집안에 돈이 없는 것 같나?"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최기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교제를 시작한 후부터 설화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작 저는 설화를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고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설화는 물론 아버님께도 예쁨을 받아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치료비가 한두 푼이 아니잖아.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몇 천만 원은 족히 될 거라던데."
"저도 그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수련 중인 자네에게 그만한 비용을 부담할 여유가 있을까?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좋은 병원과 의사를 소개시켜 준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돈 많습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며칠 전 은행에 가서 슈퍼볼 당첨 금액을 받아왔다.
1등 당첨자가 많아서 다른 때보다 당첨금이 적었지만 그래도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뭐, 돈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중요한 건 치료를 어떻게 받느냐니까."
"네. 오늘은 일반외과 스미스 과장님께 진료를 보시면 됩니다. 아마 입원을 권할 테니 입원 후 수술을 받고, 추가적인 치료를 받으면 될 겁니다."
"기석아, 근데 정말 그 치료 받을 수 있는 거야?"
잠자코 있던 정설화가 나섰다.
"당연하지. 예비 장인어른에게 무엇이든 못해 드리겠어."
"그 치료라니? 무슨 치료를 말하는 건가?"
"꿈의 암 치료라 불리는…… 중입자 치료입니다."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