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54화 (253/407)

마지막 기회 (6)

[고…… 고민? 무슨 고민?]

정설화가 말을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당황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솔직한 정설화에게는 추궁 스킬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나한테 말 안 한 게 있다는 거 다 알아."

[그런 거 없어. 정말이야. 그리고 사람이 살다 보면, 걱정거리 하나씩은 다 있는 법이잖아.]

"사소한 고민거리가 아닌 거로 아는데. 나도 흉부외과 사람들한테 들은 게 있거든?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흉부외과 스태프가 그걸 어떻게 알지? 아 참!]

정설화가 황급하게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설화야."

[알았어. 다 말할게.]

정설화의 설명이 이어졌다.

며칠 전 그녀의 아버지 정진명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정진명은 췌장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췌장암 2기는 암 조직이 췌장 및 주변의 장기에 침범한 상태를 말한다.

문제는 췌장암의 경우 2기라고 해도 환자의 생존율이 지극히 낮다는 점이다.

[사실 검사 결과가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치료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너한테는 아직 말 한 거야. 속이려고 했던 의도는 없었어.]

그녀의 풀 죽은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췌장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까.

최기석은 정설화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녀의 아픔을 달랬다.

사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그녀에게 수없이 많은 빚을 졌다.

남자친구라면서 제대로 챙겨 준 것도 없으며, 늘 그녀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이제는 자신이 정설화를 도울 차례다.

"설화야. 내 말 잘 들어."

[응.]

"최대한 빨리 휴가 내고, 아버님이랑 메이죠로 와."

[메이죠에?]

"그래. 너희 아버님 메이죠에서 치료받게 해 드리자. 얼마 전에 암치료 장비가 새로 들어왔어. 전 세계에 다섯 대밖에 없는 건데, 이제 여섯 대가 됐지."

[설마 그 장비? 하지만 메이죠에서 치료받고, 그 장비까지 사용하면 치료비가…….]

정설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비용은 전부 내가 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안 돼. 그럴 순 없어!]

"왜 안 돼? 어차피 우리 결혼할 거잖아. 장인어른이 아프다는데, 예비 사위가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도리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아. 나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정설화와 대화를 나누는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정진명이 나타났다.

"아버님 좀 바꿔 줄래?"

[휴우…… 알았어.]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수련 중인 기석입니다."

[오랜만이군.]

정진명이 짧게 대답했다.

췌장암 때문인지 얼굴이 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초췌해 보였다.

두 볼은 움푹 패었으며,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삶을 포기한 듯한 분위기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막 설화를 통해서 아버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이 메이죠 클리닉에서 치료받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는 스미스라는 걸출한 일반외과 써전이 있습니다. 우선 그분에게 수술받고, 새로운 의료장치로 추가적인 치료를 받으면 분명히 완치되실 겁니다."

[희망고문인가?]

정진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희망고문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

"예전에 의료사고 건에서는 제가 아버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님이 저를 믿고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전심전력으로 치료를 돕겠습니다."

"후우……."

정진명이 대답 없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듬직한 대답이군.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지.]

"감사합니다."

이후 최기석은 정설화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파워볼 당첨권을 챙겨 놓은 가방을 어깨에 멨다.

파워볼 당첨금을 찾는 운명의 날이 찾아왔지만 마음은 편했다.

'아무래도 감지덕지지.'

미국은 복권 당첨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주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미네소타 주는 당첨금에 20퍼센트를 지불하면 신상 공개를 면할 수 있다.

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법을 재정한 것이다.

그의 경우 당첨금을 떼어 주고 신상 보호를 받을 생각이었다. 신상이 노출되면 병원 생활이 피곤해질 테니까 말이다.

부우우웅.

송명진의 차가 메이죠를 빠져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루카스가 주관하는 샴쌍둥이 수술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수술의 집도의는 루카스.

제1보조는 과거 무수혈 모야모야병 보조를 했던 펠로우 신디.

제2보조는 최기석, 제3보조는 니콜라이다.

세 사람이 한참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루카스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다들 일찍 왔군. 그럼 잡설은 생략하고, 미스터 최가 케이스 설명부터 해 볼까?"

"네."

최기석이 단상에 서서 포인터기를 손에 쥐었다.

"환자 아담과 브라이언은 샴쌍둥이로 머리의 양 끝이 붙은 채 태어났습니다. CT 검사 결과, 두 아이는 두개골과 일부 뇌 조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가 화면을 넘기자 CT 영상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이에 케이스를 처음 확인한 니콜라이가 입을 쩍 벌렸다.

"과장님. 분리 수술을 하면 오히려 환자가 죽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수술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두 아이는 평생 누워서 살아야 해. 성장하는 도중에 어떤 문제가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야. 수술은 꼭 필요하네."

루카스의 대답에 니콜라이가 입을 다물었다.

"브리핑 계속하겠습니다. 두개유합쌍태아의 수술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붙어 있는 뇌 조직을 가로로 떼어 내는 방법, 나머지 두 가지는 각각 왼쪽 사선 방향과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떼어 내는 방법입니다."

"이 환자의 경우는 어떤 방법이 나을 것 같나?"

"유착부위를 감안하면, 가로로 떼어 내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계속해."

최기석의 대답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술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두피와 두개골을 절개한 후 붙어 있는 뇌 조직과 신경을 분리합니다. 분리가 끝나면 두개골을 재건하고, 조직확장술로 머리를 꿰매면 됩니다."

"……."

"뇌 조직과 신경을 분리하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며, 두개골 재건술과 머리를 꿰매는 작업에서는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이뤄진 분리 수술을 감안하면, 수술 시간은 스무 시간이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최기석은 본인의 입으로 브리핑하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장장 스무 시간이 걸리는 수술이라니…….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간이 걸리는 수술 보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방금 설명을 들었겠지만, 이번 수술은 만만치 않아."

루카스가 단상에 서서 입을 열었다.

"수술 시간이 말도 안 되게 긴 데다가 매 순간 긴장을 늦출 수 없지. 한순간의 실수로 환자가 죽을 수 있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극도로 어려운 수술인 만큼 스태프 간의 호흡 및 수술에 대한 숙련도를 키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부터 격일 간격으로 수술 연습을 진행하겠어."

"연습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됩니까?"

최기석이 손을 들고 물었다.

루카스의 의도는 좋지만, 딱히 수술을 연습할 방법이 없었다.

샴쌍둥이 케이스가 워낙 드물기 때문이다.

회의실에 침묵이 도는 가운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택배 왔습니다."

"마침 잘 왔군. 여기에요."

루카스는 택배기사에게 받은 커다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스태프들의 시선이 상자에 쏠렸다.

정체불명의 상자, 그 속에는 과연 뭐가 들었을까.

"우와!"

"대단해."

상자가 개봉되자 스태프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담과 브라이언의 모형이다.

모형은 실제 환자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주치의인 최기석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번 수술은 클리닉은 물론이고,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병원장님을 설득해 특별히 3D 프린팅으로 모형을 만들었지."

"……."

"앞으로 모형을 이용해 수술 연습할 계획이다. 다들 불만 없지?"

"네!"

"좋습니다."

"그럼. 당장 수술실로 이동하지."

스태프들이 모형을 챙겨 회의실을 떠났다.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 막이 올랐다.

* * *

그날 오후.

매튜는 집무실에서 파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었어. 이런 중요한 시기에 실책을 범하다니."

파커가 매튜를 응시하며 혀를 찼다.

신경외과 헤드 치프 선출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다. 그런데 매튜는 수술대기 중인 써전을 개인적인 용무로 호출하는 실수를 범했다.

매튜가 부병원장에게 호출을 받아 호된 질책을 들었다.

이 소식은 현재 과장급 이상의 써전들에게 전부 퍼졌다.

"인정하지. 내가 경솔했어."

매튜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판세가 뒤집힐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자네가 나를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그거야 그렇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도 발을 뺄지 몰라."

"어허. 섭섭한 소리를……."

"섭섭한 소리가 아니야. 내가 자네를 위해 한발 물러섰으니 자네도 그만큼의 몫은 해야지."

파커는 말을 마치고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본래 매튜가 최기석을 내치는 것을 조건으로 매튜를 돕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을 바꾸었다.

매튜가 오히려 최기석에게 계속 당했기 때문이다.

파커는 우선 매튜를 신경외과 헤드 치프로 올린 후 매튜가 내친 최기석을 응급의학과로 받기로 했다.

매튜가 헤드 치프가 된다면, 지금보다 공세를 더욱 강화할 수 있기에.

'생각보다 못 미더운 녀석이군. 설마 헤드 치프가 돼서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파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분간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러면 반드시 자네가 헤드 치프가 될 테니까."

"명심하지."

퍼커가 떠나면서 집무실에는 매튜만 남았다.

매튜는 소파에 앉은 채 고개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헤드 치프가 되면 루카스와 최기석에게 본때를 보여 주리라.

지이이잉.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제이콥의 전화일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 아내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 큰일 났어요!]

"전화하자마자 웬 호들갑이야?"

[글쎄. 우리 드레이크가 다른 사람 물건에 손을 댔대요.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중인데.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뭐라고! 그 병신이 또 물건을 훔쳤어?"

[어떡하면 좋아요. 진짜.]

"당신도 지금 서에 있어?"

[네.]

"수술 스케줄 끝나는 대로 갈 테니까 기다려."

통화를 끊은 매튜는 책장에 꽂힌 책을 뽑아서 닥치는 대로 던졌다.

그럼에도 온몸에 넘치는 분노를 해소할 수 없었다.

"제길! 이 머저리 같은 자식을 당장……."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매튜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흠흠. 들어와요."

"매튜. 오랜만이군."

사전에 약속을 잡았던 제이콥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주 난장판을 벌여 놨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제이콥이 집무실을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있지, 아주 끔찍한 일이. 거기 앉게."

매튜와 제이콥이 소파에 앉아서 서로를 응시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함께 캠퍼스 생활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때는 자네가 자퇴하고 경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확실히 평범한 선택은 아니었지."

제이콥이 피식 웃었다.

그는 의대를 이 년간 다니다가 자퇴하고, 경찰대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경찰서장님께서 메이죠에는 무슨 볼일인지 모르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얼마 전, 자네 과에 입원한 프리드라는 환자 아나?"

"모를 리가. 지금 뉴스에서 난리인데. 안 그래도 그 환자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고."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제이콥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환자의 진료 기록이 필요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