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53화 (252/407)

마지막 기회 (5)

미네소타 경찰서.

집무실에 있던 한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창가를 내려다보았다.

경찰서 바깥에서 대기 중인 기자를 보는 순간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제이콥이 기어이 한마디 내뱉었다.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2인 1조로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한 흑인 남성을 현상수배범으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후의 전개가 개판이었다.

피해자는 부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 갔고, 급기야 이 소식이 뉴스에 보도되고 말았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말하자 한 남성이 나타났다.

남성은 제이콥과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죄, 죄송합니다. 서장님."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문제인가. 올해에 내 진급심사가 있다는 거 아나? 모르나?"

제이콥이 돌아서서 칼을 응시했다.

그의 살벌한 눈빛에 칼이 푹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서장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거기 앉아."

제이콥의 손짓에 칼이 소파에 앉았고, 그 맞은편에 제이콥이 앉았다.

"오늘 아침에 올린 보고서에는 경찰과 실랑이 도중 피해자가 쓰러졌다고 되어 있던데."

"……."

"그럼 왜 피해자 가족은 경찰이 폭행했다고 주장하지? 앞뒤가 안 맞잖아."

"사실은…… 과잉진압이 맞습니다. 오늘 아침 해당 경찰관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피해자와 대화하던 중 욱해서 곤봉으로 머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이 미친 새끼들!"

제이콥은 노기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에 놓인 신문을 구겨 칼에게 던졌다.

"다른 주에서 흑인을 과잉 진압한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거 몰라? 그런 상황에서 똑같은 짓을 했다고? 머리가 완전히 돌았군. 돌았어."

"죄송합니다."

"넌 '죄송합니다'밖에 할 줄 몰라?"

"죄…… 아, 아닙니다. 하지만……."

칼이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찰관들이 피해자를 폭행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건 피해자의 지인뿐입니다. CCTV 영상 증거 같은 건 남아 있지 않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기존 의견을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피해자에게 사과는 하되, 책임은 회피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언론이 잠잠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지."

제이콥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온몸을 휘감았던 분노가 물러가고, 냉철한 이성이 그를 지배했다.

물은 벌써 엎질러졌다.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올해야말로 만년 서장을 벗어날 절호의 시기였기에.

"피해자는 어때?"

"사건 후 메이죠 클리닉으로 이송돼서 응급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의식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메이죠 클리닉이라……."

제이콥이 턱을 쓸어내렸다.

메이죠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낯익은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진료과가 신경외과인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서장님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나라도 너희들이 싼 똥을 치워야 할 거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말하면 알 것 같아? 네 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그의 호통에 칼이 서둘러 집무실을 떠났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군."

제이콥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훑었다.

[메이죠 클리닉 뇌종양외과 과장 매튜]

꾹!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최기석은 휴게실을 나와서 한 병실을 찾았다.

샴쌍둥이 아담과 브라이언이 입원 중인 소아 병실이다.

"닥터 최.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보호자 루시와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아담과 브라이언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붙어 있는 형제는 티 없이 맑게 웃으며 팔다리를 흔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모빌을 보며 노는 중인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쓰렸다.

"선생님. 우리 아이들 같은 환자는 처음인가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음 아담과 브라이언을 봤을 때는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저랑 똑같네요."

루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연분만이 끝나고, 간호사가 우리 아이들을 보여 줬을 때, 그때의 감정을 전 아직도 잊지 못해요. 무사히 태어나 줘서 감사하기도 하고,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

"앞으로 건강히 자라 줬으면 좋겠는데."

루시의 말에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위로나 동정을 할 바엔 차라리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수술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습니다. 정밀 검사를 해 보고, 과장님과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분리 수술을 받으면……."

루시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쌍둥이 둘 다 죽거나 한쪽이 죽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 맞죠?"

"네. 그렇습니다. 분리 수술 자체가 워낙 고난도 수술이라서요. 아담과 브라이언의 경우 두개골과 뇌 조직의 일부를 공유하는 상태라서 더욱 만만치 않을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저는 애들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아요."

"다른 스태프들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보호자분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루시가 힘을 내야 아담과 브라이언도 힘을 내지 않겠어요?

최기석은 루시에게 격려를 걸어 주고 병실을 나왔다.

어제 당직을 서고, 오늘 정오까지 숨 가쁜 시간을 보냈다. 환자 바라기와 하티 덕분에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동영상 촬영은 하루 쉬어야겠다.'

기숙사로 발걸음을 돌리던 도중 복도 맞은편에서 루카스가 다가왔다.

"미스터 최. 바쁜가?"

"아닙니다.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그럼 잠깐만 시간을 내주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루카스와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 프리드의 수술기록지와 수술 후 검사 결과를 살펴봤다네. 어제 수술, 아주 멋지게 성공했던데?"

루카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사실 그에게 응급수술을 맡겼다는 사실이 편하지 않았다.

최기석이 다른 동기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제 수술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다.

신경외과 전공을 선택한 레지던트 3, 4년 차는 되어야 어제 수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기석은 동기들의 도움만으로 집도를 무사히 마쳤다.

가히 기적적인 솜씨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덕분에 늦지 않게 집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죽어 가는 환자를 방치한다는 건 몰상식한 일이니까. 이번 일로 매튜도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군."

매튜는 수술대기 중인 써전을 사적으로 불러낸 일로 오늘 진료과장에게 불려가 쓴소리를 들었다.

최기석과 루카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쌤통인 일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했나 보네.'

최기석은 캔 커피를 마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남은 킹 메이커 임무.

그것은 바로 매튜의 평판을 깎는 일이다.

어제 매튜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임무를 완수했다는 알림은 뜨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매튜가 헤드 치프에서 낙마할 결정적인 건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튜 과장이 정신 차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없다고?"

"네. 오늘 아침에 저를 불러서 협박했습니다.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니 쓴맛을 보게 될 거라고요."

"옹졸한 녀석. 내가 그런 녀석을 평생 동료라고 생각했다니……."

루카스가 이를 갈았다.

"과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제 입원한 샴쌍둥이 수술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일부터 스태프들을 모아서 수술 방향을 결정하고 연습도 해야지."

"……."

"자네에게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세컨드를 맡길 생각인데. 어떤가?"

"감사합니다. 저는 분리 수술에 참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최기석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써전은 많은 수술과 다양한 케이스를 경험하면서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분리 수술은 그에게 새로운 발판이 되어 주리라.

"그럴 줄 알았어. 자네는 천상 써전이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과장님은 이번 수술 외에 분리 수술을 집도하신 경험이 있습니까?"

"딱 한 번 있다네. 벌써 사 년 전의 일이군. 당시 쌍둥이는 지금 입원한 쌍둥이처럼 머리끝이 붙은 케이스가 아니었어. 얼굴 옆면이 달라붙어 있었지."

"수술은 성공하셨습니까?"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에 힘주며 물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대답 없이 가운에서 조그만 인형을 꺼냈다.

열쇠고리로 사용하는, 흔히 볼 수 있는 동물 인형이다.

"아쉽지만 실패했네. 쌈둥이 모두 수술 중에 죽었어."

"……."

"그래서 보호자에게 부탁해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이 인형을 받았지. 만약 다음번에 샴쌍둥이를 수술할 기회가 온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루카스의 눈에 광채가 감돌았다.

"참고로 이번 수술은 저번에 했던 수술보다 난이도가 높아. 분명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지. 그래도 그때와 같은 아픔은 절대로 반복하지 않을 걸세."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군. 내일 스태프 소집이 있다는 것만 알아 둬. 당직 끝나고 쉬지도 못했으니까 푹 쉬고."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최기석은 루카스와 대화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샤워 후 침대에 눕자 온몸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지이이잉.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자 긴장했던 몸이 다시 풀렸다.

"설화야. 보고 싶었어."

[나도. 저번처럼 뿅 하고, 의진대로 오면 안 돼?]

정설화의 농담에 최기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러고 싶어. 당직 중이지?"

[응. 그래도 아직까지 응급실 콜은 없어. 지금 한국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거든.]

"유비무환의 가호가 밤새 함께하겠네?"

[아마도. 신경외과 수련은 어때? 할 만해?]

"아주 죽겠어. 입원환자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복잡한 일이 계속 터져서."

최기석은 그동안 신경외과에서 겪은 일, 아직 진행 중인 일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간단히 설명만 할 생각이었지만 말이 점점 길어졌다.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을 사람은 정설화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상통화를 하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자신의 상태를 살폈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었는데 말이다.

최기석은 그것이 육감의 신호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힘들겠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인데. 그런 게 대체 몇 개나 겹친 건지.]

"아무래도 전생에 내가 죄를 많이 지었나 봐."

[그런 생각 마. 내 생각에는 하늘이 기석이 너를 강하게 키우려고 그러는 것 같으니까.]

"꿈보다 해몽이 더 좋네. 하여간 우리 자기가 최고라니까."

최기석이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설화야."

"응. 왜?"

"지금부터 내가 할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줘."

"칫. 언제는 내가 거짓말 한 적 있나?

"그건 알지만 이건 다른 문제라서 그래."

최기석이 휴대폰 너머의 정설화를 응시했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너 지금 고민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