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회 (2)
세부사항을 살핀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베라 모션은 의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였다.
휘이이이잉.
사용 가능한 부활을 펼치자 선택지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사용한 소모성 아이템을 부활시킵니다. 부활시킬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단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은 되살릴 수 없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활의 효과를 확인한 순간 전부터 되살리고 싶었던, 없어서 허전했던 아이템이 떠올랐다.
해당 아이템을 떠올리자 주변이 다시 한 번 빛에 둘러싸였다.
이윽고 아이템 창에 한 장의 카드가 황금빛 오오라를 뿜어냈다.
NEW [유니크: 불사신 칼라일]
- 죽는다고? 내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설령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이 몸은 항상 그 자리, 그곳에 있다.
- 이모탈 효과: 아이템을 장착하면 죽음의 위기를 한 차례 피할 수 있습니다. 재해나 외부적인 사건, 사고에 적용되며 질병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이템을 확인한 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삶을 한 번 더 얻었다.
불사신 칼라일로 외상 및 상해의 위협을 차단하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질병을 예방할 수 있기에.
칼라일을 보고 있자니 황정우와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베라. 고맙다."
그의 인사에 베라가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티나가 병실로 들어왔다.
"닥터 최. 좋은 아침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베라의 퇴원일이라서 상태를 확인할 겸 찾아왔습니다."
"……."
"베라는 수술 후 후유증이 없는 건강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뇌혈류 검사를 받아야 해요.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이는 일, 심한 운동도 피해야 합니다."
"네. 명심할게요."
티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수술이 끝난 후 남편하고 깊은 대화를 나눠 봤어요. 앞으로 베라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도중에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는데……."
"결론은 나왔습니까?"
"네. 앞으로 무수혈 수술을 고집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 부부의 믿음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어요."
베라의 말에 최기석은 한시름 덜었다.
부부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 한 무사 퇴원해도 베라의 삶은 먹구름이 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부모와 자식 간이라고 해도 베라에게는 베라의 인생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인생이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베라의 인생을 지나치게 간섭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티나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정말 죄송했습니다. 괜히 피해만 끼친 것 같아서."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쁩니다."
"그럼 베라가 아프면, 다음번 수술까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최기석의 말에 티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티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왔다.
그런데 스테이션을 지나치는 중 간호사 카렌이 그에게 손짓했다.
"카렌. 무슨 일 있어요?"
"네.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방금 루카스 과장님이 입원환자 보냈거든요."
"어떤 환자인데요?"
"맞춰 보세요."
카렌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루카스 과장님이 보낸 환자면 모야모야병? 혈관종? 그것도 아니면 뇌동맥류인가요? 기왕이면 뇌동맥류 환자였으면 좋겠는데."
최근 트레이닝 룸에서 뇌동맥류 수술을 하고서 B랭크를 받았다.
B랭크라면 실전에서 수술이 가능한 수준.
루카스에게 말을 잘한다면, 집도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아주 만만치 않은 환자예요. 상상의 나래를 훨씬 더 펼쳐야 할 거예요."
"으음…… 그럼 힌트 주세요."
"첫 번째 힌트는 소아 환자, 두 번째는 희귀 케이스."
"소아에 희귀 케이스라……. 아직 희귀 케이스는 받아본 적이 없는데……."
"마침 환자가 오네요. 직접 확인해 보세요."
최기석은 카렌과 함께 복도를 응시했다.
한 쌍의 부부 아이를 안은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를 확인한 순간 떡 벌어지는 입.
아이의 상태를 믿을 수 없어서 볼을 꼬집었지만 분명 꿈은 아니다.
"안녕하세요.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 루시입니다."
"반갑습니다. 주치의를 맡게 된 닥터 최라고 합니다."
최기석은 인사하면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이번에 맡은 환자는 샴쌍둥이다.
샴쌍둥이란 신체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쌍둥이를 말하는데, 탄생하는 신생아 십만 명 중에서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케이스다.
이 쌍둥이의 경우 두 개의 몸에 하나의 머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즉 한 아이의 머리끝이 다른 아이의 머리끝과 연결된 상태다.
"카렌. 병실 배정은 끝났죠?"
"네. 소아 병실 1인실이에요."
"보호자 분에게 입원 안내해드리고 병실 모셔다드리세요. 전 차트 확인하고, 병실로 갈게요."
최기석은 의국으로 돌아가 환자의 차트를 살폈다.
샴쌍둥이의 이름은 아담과 브라이언.
뇌 CT 결과 두개골은 물론이고, 일부 뇌 조직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분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성장 도중에 사망할 확률이 무척 높았다.
검사 결과를 훑는 최기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때마침 래리가 의국으로 들어와 그의 곁에 섰다.
"방금 환자를 받았는데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야."
"머리 붙은 샴쌍둥이? 그런 케이스가 있어?"
"직접 확인해 봐."
이윽고 래리가 차트를 확인하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너는 환자복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구나. 저번에는 모야모야병 무수혈 환자를 받더니."
"그러게.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아. 난 보호자 보러 간다."
최기석이 무거운 걸음으로 병실을 찾았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느지막하게 병동을 찾았다.
오늘은 당직이 있는 날로 엄밀히 따지면 오전과 오후에 할 일은 없었다.
병실을 돌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살피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오전 회의와 회진이 막 끝난 시간.
신규 레지던트들이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진짜 미스터 최에게는 개근상 줘야 해. 오프가 됐든지, 당직이 됐는지 하루도 안 빠지고 병동에 오잖아."
"맞아. 맞아."
"오늘은 밤새야 하는데 그냥 쉬지."
자넷의 말에 래리와 클레어가 맞장구를 쳤다.
반면 니콜라이는 아무 말 없이 최기석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오전 회의 때 폭탄선언 있었던 거 알아? 얼마 전 본원에 복귀한 척추신경외과 풀먼 교수님 있잖아. 폐암 말기래. 방사선 치료도 수술도 불가능하다는데?"
"아. 그래?"
"뭐야. 어째 별로 안 놀란다?"
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놀랄 이유가 있으니까."
최기석은 캔 커피를 뽑아서 래리 옆에 앉았다.
"그래서 풀먼 교수님은 어떻게 하신대?"
"일단 호흡기내과에 입원하신다고 들었어. 거기서 며칠 있다가 아마 호스피스 치료받겠지."
래리의 말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풀먼이 화제로 떠오른 후 레지던트 간의 대화가 잠시 끊어지고,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풀먼이 환자가 됐다는 것.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나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의사와 환자의 간격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을…….
최기석은 동기와 대화를 마치고, 호흡기내과 병동을 찾았다.
복도 끝 병실로 들어가자 독서 중인 풀먼이 보였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미스터 최."
"책 읽고 계시는데, 괜히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마침 쉬려던 참이었어요."
풀먼이 책을 덮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교수님 이야기는 다른 스태프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요. 미스터 최 덕분에 루카스 과장님께 잘 말씀드렸어요."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풀먼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도 동정과 연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합니까? 내가 불편해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요. 몸이 아프다고 내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네. 알겠습니다."
"어제부로 가족과 동료들이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걸 전부 알아 버렸어요. 여기까진 오는 길이 두렵고 힘들었지만, 막상 오고 나니까 후련하군요."
"……."
"이제 남은 시간을 최대한 의미 있게 보내야죠."
"혹시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풀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동안 의사 생활을 하면서 써놓은 에세이가 있어요. 그걸 다듬어서 책으로 내고 싶군요. 내가 세상에 있었다는 작은 표시를 남겼으면 좋겠어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제가 돕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풀먼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알림이 떴다.
[일반 임무, '세상의 끝자락에서'를 획득하셨습니다. 풀먼을 도와 에세이를 완성할 경우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자신 있습니다. 뭐든지 맡겨 주세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 좀 할게요. 우선 이걸 타이핑해 줬으면 좋겠어요. 수기로 적은 거라서 파일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죠. 어차피 타이핑을 하다 보면, 읽기 싫어도 읽게 될 테니까."
최기석은 풀먼이 건넨 노트를 살폈다.
두꺼운 스프링 노트는 풀먼의 에세이로 가득 찼다.
다양한 환자 및 동료들과 충돌하면서 겪은 감정과 성찰이 담겼는데, 그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마치 전문 수필가가 쓴 듯한 수준이다.
"대단하세요. 어떻게 일하면서 이런 글을 쓰셨는지."
"괜히 치켜세우지 말아요. 부끄러운 수준이니까. 하여간 괜한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렇게 좋은 글이 사라지는 건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죠. 대신 출간하면 미스터 최 이름을 아주 큼지막하게 박아 줄 테니 기대해요."
풀먼이 농담을 건넸다.
폐암 사실을 인정하고 털어놓은 후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였다.
최기석은 풀먼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병동으로 돌아갔다.
노트를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날 저녁.
타다다다닥.
최기석은 풀먼의 에세이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양손잡이 스킬이 타이핑에 효과를 미치면서 두 손이 날아갈 것처럼 빨랐다.
이윽고 키보드에서 손을 뗀 후 그동안 입력한 내용을 살폈다.
타이핑할 때보다 내용 읽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휴우……."
한숨 돌릴 겸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 물을 데웠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타이핑.
손가락 마디가 쑤셨지만 스스로에게 페인 킬러를 걸며 통증을 억눌렀다.
풀먼을 위해서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낼 생각이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과 풀먼에게 남은 시간은 그 무게가 확연히 다르기에.
"커피 마시게? 나도 타 줘."
곁에서 발표 준비하는 래리가 한마디 했다.
그런데 커피에 물을 붓는 타이밍에 야속하게 콜폰이 울어 댔다.
[선생님. 응급실인데요. 두부 외상이 심한 환자가 왔습니다. 바로 내려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바로 갑니다."
최기석이 통화를 끊자 래리가 호기심을 보였다.
"또 환자?"
"그래. 응급이란다."
"커피가 식기 전에 돌아와. 알았지?"
"가능하면."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응급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