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48화 (247/407)

레전드 (7)

신경외과 휴게실.

최기석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자 송명진은…… 3월 28일 새벽 4시 10분경, 교통사고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야사다의 사망선고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최기석은 얼굴을 구기며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아직도 스승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그저 꿈만 같아서 한숨 자고 나면 스승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는 문득 휴대폰을 응시했다.

스승의 사망 후 야사다와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최기석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송명진의 가족에게 부고를 알리라는 것이다.

'아…….'

수차례 전화기를 만지작거렸지만, 도무지 통화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한국에 있을 무렵, 스승의 초대를 받고 가족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던가.

그때의 기억이 자꾸 괴롭혀서 통화가 불가능했다.

이윽고 최기석은 뭔가에 홀린 듯 흉부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그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송명진의 집무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움직였는데 잠겨 있지는 않았다. 의료에 관해서는 꼼꼼한 스승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소 허술한 면이 있었다.

그는 집무실을 훑어보며 추억에 잠겼다.

공채에 합격하기 전에 들러서 외과 매뉴얼을 받았던 일.

종종 찾아와서 환자에 관한 대화를 나눴던 일.

스승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오르자 더더욱 그의 부재를 인정하기 힘들었다.

"이건……."

책상에 놓인 수첩을 발견했다.

이 수첩은 스승이 매일 있었던 일을 적는 일기장이다.

수첩을 읽어가던 그의 손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야사다가 흉부외과 스태프들 실력이 형편없다며 푸념했다. 메이죠 스태프들에게 만족 못 하면 다른 병원에서는 어떻게 일할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

.

[대화 도중 야사다가 최 선생에게 관심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 선생이 흉부외과에 오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그에게 아직 가르치지 못한 것이 많다.]

수첩을 읽은 최기석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이미 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교수님."

그의 애절한 부름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제 송명진은 세상에 없다.

* * *

며칠 뒤.

최기석은 병가를 내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온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환자를 돌보기는커녕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방에 불을 다 꺼놓은 채 술에 취해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쿵. 쿵. 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무시하려 했지만, 소리가 점점 집요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누구세요?"

"어? 최 선생님 맞으시죠?"

김혜진이 그를 보며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김혜진은 아래층에 사는 한국인으로 과거 그녀의 딸 진혜연이 머리를 다쳐서 머리카락으로 봉합해 준 적이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몸이 아프신 것 같기도 하고."

"아, 네."

최기석이 흐리멍덩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김치전을 해 왔는데 좀 드셔 보시라고요."

"감사합니다."

"근데 최 선생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 뒤에 있었던 진혜연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진혜연이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아이돌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간을 넘어서. 너를 만날 수만 있다면~"

"혜연아. 엄마가 음악은 이어폰으로 들으라고 했지?"

"이어폰 끼면 귀 아파."

"으이그, 못 살아. 최 선생님, 그럼 저희는 가 볼게요.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해 주세요."

"네."

최기석은 김치전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팽개쳐두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모든 욕구가 사라졌다.

오로지 술만이 그의 벗이었다.

사 놓은 술이 떨어져서 어제부터는 술도 마시지 못했지만 말이다.

"시간을 넘어서?"

최기석은 폐인이 된 후 처음으로 혼잣말했다.

진혜연이 들었던 노래가사가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뒤늦게 깨달은 것은 자신이 시간을 넘어서라는 아이템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상태창을 띄어 올리자 한 장의 두루마리를 응시했다.

[레전드 두루마리: 시간을 넘어서]

-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 봉인된 아이템으로 능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비밀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비밀의 열쇠는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현재 그가 보유한 P.

P는 49,500.

500 P.

P만 더 모으면 레전드 아이템 사용에 필요한 비밀의 열쇠를 구입할 수 있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의 충격으로 그동안 아이템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가능할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 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가정을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는데 아이템이 계속 거슬렸다.

레전드라는 등급이 주는 무게감과 아이템의 이름.

이 두 가지를 따져 봤을 때 그 일을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와 면도를 하자 말끔한 얼굴이 드러났다.

찰싹!

두 볼을 세차게 두드리고, 곧바로 메이죠 클리닉으로 향했다.

쿵. 쿵. 쿵. 쿵.

클리닉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새로운 희망이 온몸에 넘쳐 났다.

단순한 가정이 이제는 확신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신경외과 병동에 도착해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래리가 다가왔다.

"미스터 최, 아직 병가 남았잖아? 더 쉬지그래."

"이제는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눈이 새빨갛다고."

래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그냥 하는 소리 아니야. 루카스 과장님은 집무실에 계시지?"

"맞아."

"있다가 보자."

최기석은 노크 후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루카스는 책상에서 서류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미스터 최였나?"

"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송 치프의 일은 안타깝게 됐어. 그렇게 세상을 떠날 사람이 아니었는데……."

루카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고 벌써 복귀하는 건가? 아니면 병가를 연장해 줬으면 하는 건가?"

"복귀 신고 드리러 왔습니다."

"무리해서 일할 필요 없어. 자네와 송 치프의 관계는 모두 알고 있으니까."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일하고 싶습니다."

"허허. 그것 참……."

"과장님.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오는 길에 수술 스케줄 표를 확인했습니다. 오후에 뇌동맥류 수술과 뇌전증 수술이 있던데 두 수술에 퍼스트를 서고 싶습니다."

"복귀하자마자 수술 보조를?"

"네."

최기석의 말에 루카스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자네 실력은 충분히 알지만 당장 보조로 들어가기엔 일러.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저 역시 과장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수술 보조로 꼭 들어가는 이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그 이유가 대체 뭔가?"

"보조가 끝나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하는군."

"죄송합니다. 지금으로써는 이 말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 차례 대화가 오간 후, 긴 침묵이 흘렀다.

이내 루카스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말하기 힘든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 수술 스케줄은 조정해 보겠어."

"감사합니다. 과장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최기석은 벅찬 감정을 억눌렀다.

레전드 아이템을 향한 첫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최기석은 루카스의 배려를 받아 뇌동맥류 수술과 뇌전증 수술에 퍼스트로 나섰다.

수술 전 동영상을 살피고 트레이닝 룸에서 사전 연습한 덕분에 보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어제부터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정신이 명료해진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두 수술을 끝내자 600 P.

P가 모였다.

그는 휴게실에 자리를 잡은 후 상태창을 띄웠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P.

P로 비밀의 열쇠를 구입했다.

아이템 창에 자리 잡은 황금빛 열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기적을 바라는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심호흡하고 열쇠로 레전드 아이템의 봉인을 풀었다.

띠링!

[레전드 아이템: 시간을 넘어서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레전드 두루마리: 시간을 넘어서]

-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 아이템 사용 시 최대 닷새 전까지로 시간을 돌릴 수 있습니다. 롤백 시간은 정오로 고정되며, 아이템 사용 시점을 기준으로 닷새 동안 얻은 보상은 초기화됩니다.

봉인이 풀리면서 마침내 아이템 설명이 나타났다.

최기석은 놀란 표정으로 설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효과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다행이야. 정말.'

굵은 눈물이 빗줄기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이템을 사용하면 스승이 사고당했던 당일로 돌아갈 수 있다.

미리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계속 방구석에서 폐인처럼 지냈다면 이 같은 기회는 찾지 오지 않았으리라.

아이템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간이 닷새였기에.

"혜연이에게 고마워해야겠네."

그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확인한 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작업은 이제 끝.

남은 것은 그의 결심뿐이다.

휘이이이잉.

아이템을 사용하자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눈부신 빛이 세상을 휘감았다.

최기석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아……."

현기증이 몰려오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최기석은 게시판 벽면에 손을 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안개처럼 뿌옇던 의식이 점점 명료해졌다.

응급실의 풍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돌아온 건가?'

최기석은 가장 먼저 달력과 벽시계를 살폈다.

오늘이 화요일이고 현재 시각이 정오임을 확인한 순간 벅찬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해냈어!"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돌아왔다.

스승이 사고를 당하던 당일로 돌아온 것이다.

"닥터 최.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근처에 있던 간호사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죠. 앞으로는 없을 거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기분이 좋아서 헛소리가 나오는 거니까."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응급실을 나왔다. 그리고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 외워 두었던 정보를 콜폰에 저장했다.

"닥터 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응급실을 나오자 구조 1팀 스태프들이 구급차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이템 사용 전과 정확히 같은 흐름이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스승은 분명 또 사고를 당하게 될 것이다.

"잘 마실게요."

"오늘은 날씨가 흐리네요. 금방 비가 올 것 같아요."

스칼렛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바람도 제법 쌀쌀하게 불고 있었다.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잠시 후면 비가 내리고 첫 출동을 하리라.

"잠시만요."

최기석은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송명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선생. 무슨 일이에요?]

스승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감정이 북받쳤다.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흉부외과 응급환자라도 생겼어요?]

"아…… 아닙니다. 그냥 교수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요."

[하하하. 싱겁기는.]

"교수님 혹시 본원으로 복귀하는 길 아니신가요?"

[그걸 최 선생이 어떻게 압니까? 아무에게도 말 안 했는데.]

"교수님이 복귀 중이라는 감이 왔습니다. 혹시 오는 길에 한국 식당에 들러 주실 수 있나요?"

[한국 식당이요?]

"날씨도 우울한데 갑자기 제육볶음이 먹고 싶어서요."

[으음…… 방향이 정반대기는 한데…… 최 선생이 먹고 싶다면 사다 줘야죠.]

"감사합니다."

[그래요. 있다가 봅시다.]

"네. 안전 운전하세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스승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사고 발생한 시간에 사고가 난 장소에 스승은 없을 테니까.

"저기 웬 애가 있네요."

구급차 조수석에서 출동을 기다리는데 찰리가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응급실 입구와 가까운 곳에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연신 '안 돼요'를 외쳤던 엘린이다.

"신경 안 써도 돼요. 부모가 금방 데리러 올 테니까."

"정말 그럴까요?"

찰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최기석의 말대로 부모가 나타나 엘린을 데려갔다.

"와우. 닥터 최, 족집게네요."

"오늘은 감이 좋은 날이거든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살시도 환자로 인해 출동하게 되었다.

최기석은 현장에 도착해서 당시와 같은 처치를 하고 복귀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가슴이 욱신거리는 육감의 통증이 없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스승에게 별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첫 번째 출동 후 한 시간 가까운 공백이 생겼다.

과거였다면 스승의 교통사고로 출동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출동대기를 하는 도중 보고 싶었던 사람이 구급차를 향해 다가왔다.

바로 송명진이다.

그의 손에는 포장한 제육볶음이 들려 있었다.

"교수님!"

최기석은 조수석에서 내려 송명진을 끌어안았다.

스승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최 선생, 갑자기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네. 있었습니다."

최기석은 스승을 더욱 힘차게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악몽을 꿨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악몽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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