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4)
찌그러진 차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너무나 익숙한 외관의 차량.
그 안에 누가 타고 있을지도 한눈에 그려졌다.
한순간이나마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번호판을 확인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타다다다닥.
최기석은 구급함을 들고 차를 향해 달렸다.
트럭과 승용차가 빗겨서 충돌했는지, 차의 앞쪽 면과 운전석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졌다.
'아…….'
운전석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의식불명의 송명진이 피 칠갑이 된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복부에는 충돌의 여파로 튀어나온 철골이 박혔다.
'기석아. 지금은 안 돼.'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을 다독였다.
제이스의 복강경 간암 수술할 때 얼어붙은 심장이 일시적으로 깨진 적이 있다. 부상을 입은 스승을 확인하자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 밀려왔다.
"찰리! 나 좀 도와줘요."
"지금 갑니다."
"운전석이 찌그러져서 문을 열 수 없어요. 우선 환자를 조수석 쪽으로 빼야 해요."
"알았습니다."
"찰리가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환자를 조심스럽게 빼 주세요. 나는 목을 받치고 있을 테니까."
그의 지시에 따라 송명진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송명진이 찌그러진 차에 눌려서 구출이 쉽지 않았다.
지나치게 완력을 쓰면 추가 부상의 염려가 있었다. 반대로 힘을 덜 쓰니 송명진을 빼낼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닥터 최. 환자 목을 잘 고정해 주세요. 힘을 써서 한 번에 뺄 테니까. 셋 하면 뺍니다. 하나. 둘. 셋!"
찰리가 기합 속에 송명진을 바깥으로 당겼고, 최기석은 송명진의 목을 제대로 고정했다.
두 사람의 호흡으로 송명진이 간신히 차에서 빠져나왔다.
체력: 3/10
주 증상: 호흡곤란 / 심정지 / 외상에 따른 내외부 출혈 / 경추골절 / 경추 및 우측 손 골절
아픈 부위: 폐 / 심장 / 십이지장 / 우측 손 / 머리 / 목
진단명: 경막하 출혈 / 두개 골절 / 폐 파열 / 폐동맥 파열 / 횡격막 파열 / 십이지장 파열 / 비장 파열 및 출혈
현재 상태: 응급(near death)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가족력: 없음
주의 요소: 없음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를 사용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송명진은 그가 처치한 교통사고 환자 중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즉사하지 않은 게 기적인 수준이랄까.
"제가 확인해 봤는데 트럭 운전사분은 다친 데가 없데요. 이 환자분은……."
뒤늦게 합류한 스칼렛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환자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내가 CPR을 맡을 테니까 나머지 처치는 여러분들이 해 주세요."
최기석은 살려야 한다 스킬과 각성 CPR 버프를 본인에게 걸고, 속사포처럼 지시를 내렸다.
"찰리는 외상 부위를 담당해 주세요. 우선 압박 붕대로 머리에 출혈 잡아 주고, 우측 손에 있는 개방성 골절 처치를 하면 됩니다. 그다음 복부에 있는 철골을 단단하게 고정하세요. 철골이 움직이면 추가적인 장기 손상이 있으니까요."
"네!"
"스칼렛은 정맥 라인 확보하고, B형 블러드 팩 달아 주세요."
"네!"
"그렉은 경추 고정기로 환자의 목을 고정해 주고, 제세동기 세팅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지시가 끝나고 본격적인 처치가 시작되었다.
퍽! 퍽! 퍽! 퍽!
최기석은 흉부 압박을 끝낸 후 후두경으로 송명진의 기도를 확보했다.
그리고 엠부백을 짜며 산소를 공급했다.
동료 스태프들의 처치가 하나둘씩 더해졌지만, 상태는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경막하 출혈, 폐 파열과 폐동맥 파열, 비장 및 십이지장 파열.
이런 핵심적인 외상에 대한 처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리와 그렉은 이송 준비해 주세요. CPR은 이동하면서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송명진을 들것에 눕힌 후 신중하게 구급차 후방좌석에 실었다.
위이이이잉.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도로를 질주했다.
최기석은 스칼렛과 그렉의 도움을 받으며 CPR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허겁지겁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신호음이 고작 두 번 울렸을 뿐인데도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됐다.
"헤드 치프. 기석 최입니다."
[자네가 나한테 통화를 다 하다니. 별일이군.]
스미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급 상황이라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흉부외과 헤드 치프가 본원 복귀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헤드 치프께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뭐라고? 닥터 송이 교통사고를?]
"네. 아무래도 일반외과 수술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헤드 치프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았어. 당장 응급실로 내려가지.]
스미스가 통화를 끊은 후 최기석은 간신히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위장관외과와 대장관외과 그리고 간담췌외과까지.
이 세 가지 분과를 마스터한 스미스라면 스승님을 살려 줄 수 있으리라.
'조금만 참으세요. 제발.'
최기석은 송명진을 내려다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때로는 맞은편에 서서, 때로는 곁에서 서서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스승이다. 이렇게 환자와 의사로 만나서 일방적으로 내려다보는 건 원치 않았다.
"찰리, 클리닉까지 몇 분 남았죠?"
"대략 십 분 정도 보면 됩니다. 빗길이 미끄러워서 더 세게 밟을 순 없어요."
"알았어요."
그는 송명진에게 다시 한 번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호흡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맥박도 뛰기 시작했다. CPR을 중단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바로 혈흉이다.
폐 파열로 인한 후유증이 뒤늦게 나타나고 있었다.
"스칼렛. 흉강삽관 세트 준비해 주세요."
"네? 흉강삽관이요?"
스칼렛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닥터 최. 흉강삽관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확신할 수 없잖아요. 더군다나 지금은 차가 움직이고 있다고요. 천자가 실패라도 한다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요."
"삽관 세트!"
쩌렁쩌렁한 호통이 퍼졌다.
스칼렛을 바라보는 최기석의 눈빛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하아…… 진짜. 닥터 최 때문에 내 수명이 매주 줄어든다니까."
스칼렛이 탄식하면서 삽관 준비를 시작했다.
최기석은 수술 장갑을 착용한 후 스칼렛이 건넨 메스를 손에 쥐었다.
때마침 구급차가 커브를 돌면서 차체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스칼렛의 우려대로 삽관을 시행하기에 최악의 조건이다. 하지만 메스를 쥔 그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클리닉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십 분.
천자에 성공하지 못하면 송명진은 수술실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할 수 있어. 나라면.'
최기석은 심호흡하며 카테터를 송명진의 흉부에 가까이했다. 이에 스칼렛과 그렉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손끝에 모든 것이 달렸다.
스으으으윽.
메스를 세로로 내리긋자 피부가 갈라졌다.
"켈리."
"네."
스칼렛이 건넨 겸자로 늑골 사이의 근육을 서서히 떼어 냈다.
빗길을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도 그의 손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침상 위에 있는 환자를 처치하는 것처럼 편안하기만 했다.
"여기에요. 흉막이 만져집니다. 튜브."
최기석은 적당한 힘을 주며 흉막 안쪽으로 튜브를 밀어 넣었다.
순간 얇은 막을 뚫는 느낌이 손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콸콸콸콸.
흉강에 고여 있던 피가 튜브를 타고, 배액통으로 쏟아졌다.
그 양이 어찌나 많았던지 배액통의 삼분의 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스칼렛. 블러드 팩 새로 달아 주세요."
"네? 아, 네."
스칼렛은 최기석의 처치를 넋 놓고 지켜보다가 뒤늦게 움직였다.
처치하는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봤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그의 진단은 정확했고, 달리는 차 속에서 펼쳐진 처치는 완벽했다.
신규 레지던트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스칼렛은 블러드 팩을 교체하면서 생각했다.
최기석이라면 다 죽어 가는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휴우……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최기석은 흉관삽관한 자리를 고정하고,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잠시 후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십 분이 지나고, 구급차가 메이죠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동료들과 송명진이 누운 스트레쳐카를 응급실로 밀었다.
"저 사람? 흉부외과 헤드 치프 아니야?"
"정말이네. 닥터 송이 대체 왜?"
송명진을 알아본 몇몇 스태프들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제때 도착했군. 닥터 송의 상태는?"
응급실에서 대기 중이던 스미스가 번개처럼 다가왔다.
그와 마주한 순간 최기석은 괜히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송 도중 스승이 세상을 떠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스미스를 마주한 순간 마음이 풀렸다.
실력 있는 써전이 주는 안도감이다.
"바이탈이 괜찮아졌다면 우선 검사부터 해야겠군. 도중에 다시 CPR을 해야 할지 모르니 자네는 책임지고 닥터 송 옆에 붙어 있어. 검사 끝나는 대로 수술실로 올라오고."
"네!"
최기석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후 동료들에게 구조 팀 활동을 계속할 수 없음을 알리고 검사실을 찾았다.
지금 같은 마음으로 다른 응급환자를 봤다간 오히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몰랐기에.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스승의 수술에서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드르르르륵.
최기석은 모든 검사를 끝내고 수술실로 이동했다.
송명진은 여전히 의식불명이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상태는 응급(near death), 경과는 불량에서 회생불능으로까지 떨어졌다.
'교수님. 메이죠는 세계 최고의 병원이잖아요. 그러니까 반드시 교수님을 살려 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최기석은 송명진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지이이이잉.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자 D 로젯 앞에 일반외과 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스크린을 통해 검사결과를 살피는 중이다.
"도중에 문제는 없었지?"
"네, 없었습니다."
"그럼 바로 스크럽 들어가지. 미스터 최를 퍼스트로 세울 거니까 정신 단단히 차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웠다.
스승의 치료를 돕고 싶은 마음을 스미스가 알아줘서.
벅. 벅. 벅. 벅.
스태프들이 나란히 서서 스크럽에 나섰다.
"미스터 최."
스미스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향했다.
"네. 헤드 치프."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닥터 송의 상태는 절망적이야. 손상 부위가 너무 광범위해. 게다가 일반외과 수술이 끝나면, 흉부외과와 신경외과 수술까지 곧바로 받아야 하지."
"……."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닥터 송을 살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벌써 송 교수님을 데려갈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어쩌면 자네 말대로……."
스미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수술은 하늘의 뜻을 시험하는 자리가 될지 모르겠군. 이제 가자."
"네!"
두 사람과 스태프들이 일제히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취의가 전신마취하는 가운데 스태프들이 각자 제 위치에 섰다.
최기석은 제1보조 자리에 서서 송명진을 내려다보았다.
수술등의 환한 빛으로 스승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이번에는 제가 지켜드릴게요. 반드시!'